
중국 전기차 시장이 또 한 번 폭탄을 투하했다. 지리홀딩스의 프리미엄 전기차 브랜드 지커(Zeekr)가 공개한 신형 SUV ‘9X’는 전면부에 롤스로이스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직립형 그릴을 장착하고, 측면으로 돌아가면 현대차 팰리세이드를 닮은 프리미엄 실루엣을 자랑한다. 하지만 진짜 충격은 따로 있다. 10분 만에 완충되는 900V 초고속 충전 시스템과 1000km가 넘는 주행거리, 그리고 레벨3 자율주행 기술까지 담아냈다는 점이다.
2025년 11월 현재, 전 세계 자동차 업계는 전기차 충전 속도와 주행거리 확보 경쟁에 돌입했다. 테슬라는 슈퍼차저 V4를 통해 15분 충전을 목표로 하고 있고, 현대차는 800V 시스템으로 18분 충전을 제공 중이다. 하지만 지커 9X는 이 모든 경쟁자들을 단숨에 제쳤다. 과연 이 차는 어떤 기술로 이런 성과를 이뤄냈을까?
롤스로이스 닮은 외관, 그러나 가격은 절반

지커 9X를 처음 마주하면 누구나 롤스로이스를 떠올린다. 압도적인 크기의 직립형 그릴은 영국 명차의 위엄을 그대로 재현했고, 수직으로 뻗은 LED 헤드램프는 초고층 빌딩처럼 당당한 존재감을 뽐낸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모방이 아니다. 중국 프리미엄 브랜드들이 글로벌 럭셔리 시장의 디자인 언어를 정확히 이해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결과물이다.
차체 크기도 압도적이다. 전장 5.2미터에 달하는 대형 SUV로, 국내에서 ‘큰 차’로 통하는 현대 팰리세이드(4.995m)보다도 더 길다. 6인승 또는 7인승 구성이 가능하며, 3열까지 넉넉한 공간을 확보했다. C필러의 크롬 장식과 플로팅 루프 디자인은 현대차의 프리미엄 SUV 라인업을 연상시키지만, 더욱 과감하고 미래지향적인 감성을 더했다.
예상 가격은 약 60만 위안, 한화로 약 1억 1500만 원 수준이다. 롤스로이스 컬리넌(6억 원대 이상)의 절반 이하 가격으로 비슷한 럭셔리 감성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가성비 프리미엄’ 전략이 돋보인다. Daum
900V 플랫폼의 비밀, 10분 충전의 현실화

지커 9X가 업계를 충격에 빠뜨린 가장 큰 이유는 바로 900볼트 전기차 아키텍처다. 현재 대부분의 전기차가 사용하는 400V 시스템은 물론, 현대차 아이오닉 5·6에 적용된 800V 시스템보다도 한 단계 진화한 기술이다. 이 시스템을 통해 배터리 잔량 10%에서 80%까지 단 10분 만에 충전할 수 있다.
이는 테슬라 슈퍼차저 V3의 15~20분보다 빠르며, BYD가 최근 공개한 5분 충전 기술과 함께 중국 전기차 업계의 초고속 충전 전쟁을 이끌고 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순수 전기 모드만으로도 380km를 주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가솔린 엔진과 결합하면 총 1000km 이상의 주행거리를 확보할 수 있어, ‘충전소 찾기 스트레스’와 ‘주행거리 불안’이라는 전기차의 두 가지 최대 약점을 동시에 해결했다.
지커가 사용한 플랫폼은 모기업 지리(Geely)의 ‘SEA-S 아키텍처’로, 순수 전기차(BEV)는 물론 플러그인 하이브리드(PHEV), 주행거리 연장형 전기차(EREV) 등 다양한 파워트레인을 수용할 수 있는 유연한 구조다. Daum
레벨3 자율주행, 운전대에서 손 떼는 시대 개막

지커 9X는 단순히 빠르고 멀리 가는 차가 아니다. 차량 곳곳에는 레벨3 자율주행을 구현하기 위한 첨단 하드웨어가 빼곡히 장착되어 있다. 다중 카메라, 라이다(LiDAR) 센서, 밀리미터파 레이더가 조합된 시스템은 운전자의 개입 없이도 고속도로와 도심 주행 대부분을 스스로 처리할 수 있다.
레벨3 자율주행은 특정 조건에서 운전자가 운전대에서 손을 떼고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단계다. 현재 중국 정부는 승용차의 완전 자율주행을 레벨2로 제한하고 있지만, 지커는 이미 완전 자율주행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기술은 준비됐고, 규제만 풀리면 언제든 활성화할 수 있는 상태다.
차량에는 엔비디아의 최신 자율주행 칩과 함께 360도 전방위 인식 시스템이 탑재됐다. 이는 단순히 차선 유지나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을 넘어, 복잡한 도심 교차로나 주차 공간에서도 스스로 판단하고 주행할 수 있는 수준이다. Daum
프리미엄 인테리어, 롤스로이스급 감성 구현

지커 9X의 내부는 나파 레더, 우드 트림, 대형 파노라마 선루프, 듀얼 스크린 인포테인먼트 시스템 등으로 구성됐다. 2열과 3열 모두 전동 조절이 가능하며, 프리미엄 오디오 시스템과 앰비언트 라이팅도 기본 탑재된다. 특히 6인승 구성에서는 2열 독립 시트가 퍼스트 클래스 좌석 수준의 편안함을 제공한다.
중앙 콘솔에는 15.6인치 터치스크린이 자리 잡고 있으며, 운전석 앞에는 12.3인치 디지털 계기판이 배치됐다. 음성 인식 AI 시스템은 자연어 처리 기능을 통해 운전자의 명령을 정확히 이해하고 실행한다. 여기에 무선 충전 패드, USB-C 포트, 냉장 기능이 있는 센터 콘솔 등 실용적인 편의 사양도 빠짐없이 갖췄다.
중국 전기차 시장의 역설, 순수 전기로의 회귀

흥미롭게도 지커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를 내놓은 시점은 중국 시장이 다시 순수 전기차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때다. 중국승용차협회(CPCA) 데이터에 따르면, 2025년 상반기 순수 전기차(BEV) 인도량은 전년 대비 37% 증가했지만, 하이브리드와 연장형 전기차(EREV)는 27% 성장에 그쳤다.
불과 1년 전인 2024년에는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시장이 70% 이상 급증하며 전기차보다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소비자들이 충전 인프라 부족과 주행거리 불안 때문에 하이브리드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25년 들어 분위기가 바뀌었다. 중국 정부의 대대적인 충전소 확충, 배터리 기술 발전으로 인한 주행거리 증가, 그리고 순수 전기차 가격 하락이 맞물리면서 소비자들은 다시 BEV로 회귀하고 있다.
그럼에도 지커는 9X를 ‘브리지 모델’로 포지셔닝하고 있다. 순수 전기차로의 완전 전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소비자들에게 가장 합리적인 중간 다리를 제공하겠다는 전략이다. Daum
지리홀딩스, 지커 완전 자회사화로 ‘EV 제국’ 구축
지커의 모기업 지리홀딩스(Geely Holding)는 올해 상반기 눈부신 실적을 기록했다. 전체 판매량이 전년 대비 47% 증가한 140만 대에 달하면서, 연간 목표를 270만 대에서 300만 대로 상향 조정했다. 이 기세를 이어가기 위해 지리는 미국 나스닥에 상장된 지커의 잔여 지분 인수 계획을 발표했다. 현재 65.7%의 지분을 보유한 지리는 나머지를 모두 인수해 완전 자회사로 편입할 예정이다.
일각에서는 이 움직임을 ‘미국 시장 철수 준비’로 해석한다. 싱가포르의 자동차 전문 리서치 기관 DZT는 “미·중 무역 갈등 심화에 대비한 전략적 철수”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중국 전기차 브랜드들은 미국의 고율 관세와 규제 강화로 인해 북미 시장 진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흥미롭게도 지커의 기업가치는 예전보다 낮아졌다. 현재 약 64억 달러(약 8조 8천억 원)로 평가되는데, 이는 2023년 투자유치 당시 130억 달러, 2024년 뉴욕증권거래소 상장 당시 70억 달러에 비하면 크게 떨어진 수치다. 하지만 일부 투자자들은 이를 ‘시장 과소평가’라고 본다. 지커가 보유한 900V 플랫폼 기술, SEA 아키텍처, 그리고 9X와 같은 차세대 모델 라인업을 고려할 때, 진정한 가치는 아직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대차·제네시스, 중국 전기차와의 기술 격차 우려

국내 자동차 업계는 지커 9X의 등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최근 ‘2025 CEO 인베스터데이’에서 하이브리드 라인업 대폭 확대와 전기차 주행거리 개선을 약속했지만, 900V 플랫폼이나 10분 완충 기술은 아직 상용화하지 못한 상태다.
현대차의 아이오닉 5와 아이오닉 6는 800V 시스템으로 18~20분 충전을 제공하지만, 지커보다는 느리다. 제네시스 전동화 라인업인 GV60, GV70 전동화, G80 전동화 역시 비슷한 수준이다. 현대차그룹이 2026년부터 현지 전략형 전기차와 주행거리 연장형 전기차(EREV)를 대거 출시한다는 계획을 밝혔지만, 지커와 같은 중국 브랜드들의 빠른 기술 발전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더욱 큰 문제는 디자인 감성이다. 지커 9X는 롤스로이스와 제네시스, 현대차의 디자인 요소를 교묘하게 결합하면서도 독자적인 정체성을 확립했다. 이는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글로벌 프리미엄 시장의 언어를 정확히 이해하고 재해석한 결과다.
출시 일정 및 시장 전략, 내수 집중 노선
지커는 오는 청두 모터쇼를 통해 9X의 사전 판매를 시작하고, 2025년 3분기 내 고객 인도를 목표로 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미국 시장 진출 계획이 없다는 것이다. 대신 중국 내수 시장과 유럽 일부 국가를 주요 타깃으로 삼고 있다. 이는 미·중 무역 갈등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내수 강화 + 선택적 수출’이라는 전략적 판단으로 보인다.
한국 시장 진출 여부는 아직 불투명하다. 중국 전기차 브랜드들은 한국 시장을 매력적으로 보고 있지만, 높은 안전 기준과 까다로운 인증 절차, 그리고 국내 브랜드의 강력한 경쟁력 때문에 쉽게 진입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지커 9X와 같은 혁신적인 모델이 국내에 상륙한다면, 현대차와 제네시스에게는 상당한 위협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과도기적 완성체, 지커 9X가 제시하는 미래

지커 9X는 단순히 새로운 SUV가 아니다. 이 차는 자동차 산업이 내연기관에서 순수 전기차로 넘어가는 과도기에서 “지금 당장 소비자들이 원하는 완벽한 해답”을 제시한다. 1000km 주행거리, 10분 충전, 레벨3 자율주행, 롤스로이스급 디자인… 이 모든 것을 하나의 차량에 담아낸 지커 9X는 ‘과도기적 완성체’라는 역설적인 칭호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
중국 전기차 업계는 이미 테슬라를 넘어섰고, 이제 유럽과 한국의 프리미엄 브랜드까지 위협하고 있다. 지커 9X의 등장은 단순한 신차 공개가 아니라, 글로벌 자동차 시장의 판도가 완전히 뒤바뀌고 있다는 신호탄이다. 과연 현대차와 제네시스는 이 도전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2026년 이후 출시될 한국 브랜드의 차세대 전기차 라인업이 그 답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