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째 이어지는 전쟁의 역사…왜 미국은 걸프에 집착하나

최수진 2026. 3. 6.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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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이라크, 쿠웨이트 침공하면서 발발한 전쟁
2000년대 부시 정부 거치면서 또 다시 발발
2026년 트럼프 압박으로 중동 갈등 심화
1991년 걸프전 당시 사우디아라비아 사막 한가운데서 다국적군 대원들이 장갑차 탄약을 받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시작된 걸프전은 현재 진행형이다. 사담 후세인 정권의 몰락, 9·11 테러와 이라크 전쟁, IS의 급부상에 이어 2026년 미국의 이란 공습으로 이어지고 있다. 

 ◆ 걸프전이란 

걸프전의 시작은 3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0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면서 발발한 전쟁이다. 미국이 자국군을 파병했으며 영국·프랑스·독일 등 전 세계 30여 개국이 다국적 연합군으로 참전하면서 국제전으로 확대됐다. 미국·유럽 등 주요 언론사들이 중립적인 명칭을 사용한다며 관련 지역을 걸프만(The Gulf)이라고 칭했고 전쟁 명칭도 ‘걸프전’으로 불렀다. 

 ◆ 1990년대, 쿠웨이트 해방전

첫 걸프전은 1990년 8월이다. 원유 생산량을 놓고 쿠웨이트에 대한 불만이 쌓인 게 그 시발점이다. 사담 후세인 당시 이라크 대통령은 쿠웨이트 정부가 할당량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판했으며 군사적 행동을 취한다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이라크는 1980년대 벌인 이란과의 전쟁으로 막대한 부채가 쌓였다. 석유 자원을 갖춘 쿠웨이트는 재정난을 해결할 수 있는 돌파구로 여겨졌다. 결국 이라크는 8월 2일 새벽 30만 명의 병사를 동원해 쿠웨이트를 침공, 6시간 만에 수도 쿠웨이트시티를 점령했다. 

이라크의 군사적 움직임은 국제적 비난을 받았고 미국 주도의 유엔 안보리는 이라크 제재를 시작했다. 1991년 1월까지 쿠웨이트에서 철수하지 않을 경우 개입하겠다고 통보했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자국군을 사우디아라비아에 배치했고 다국적군을 구성했다. 한국군도 비전투요원으로 참여했다. 

미국 주도의 군사작전은 빠르게 진행됐다. 지상전 개시 4일 만에 이라크군을 쿠웨이트에서 몰아내는 성과를 냈다. 이때 이라크군 사상자는 10만~20만 명 수준으로 추산된다. 이라크는 유엔 12개 결의안을 수락했고 1991년 2월 28일 부시 대통령이 종전을 선언했다. 

사담 후세인. (사진=연합뉴스)
조지 W. H. 부시. (사진=연합뉴스)

 ◆ 역사적 인물 1. 사담 후세인와 아버지 부시

첫 걸프전의 주요 인물은 사담 후세인과 조지 부시다. 후세인은 1937년 4월 28일에 티그리트에서 태어났으며 이라크 제5대 대통령으로 1979년부터 2003년까지 재임했다. 

후세인은 부통령 시절(1968~1979년) 석유 국유화 등을 통해 이라크의 근대화와 경제 발전을 이끌었으나 대통령이 되면서 독재자로 돌변하며 24년간 권력을 쥐었다. 후세인은 아흐마드 하산 알바크르 대통령이 1979년에 병환으로 사임하자 그해 7월 16일 대통령에 올랐다. 

이란 팔레비 독재국가가 시민혁명으로 무너지자 이란을 침공했고 석유에 대한 욕심으로 쿠웨이트와의 전쟁에도 나섰다. 후세인은 훗날 2006년 미군 공격으로 축출된 뒤 붙잡혀 사형이 집행됐다.

후세인을 저지한 것은 미국 제41대 대통령 조지 부시다. 아버지 부시로도 불린다. 텍사스의 석유 재벌인 부시 가문의 첫 번째 대통령이며 걸프전 직후 미국 역대 최고 수준의 지지율(89%)을 기록하기도 했다. 경기침체 등의 문제를 외부로 돌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만 경기침체 등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지지율이 급격히 떨어지며 재선에는 실패했다. 

 ◆ 2000년대, 후세인 정권의 몰락

두 번째 걸프전은 2003년 촉발한 이라크 전쟁이다. 2003년 미국은 이라크를 선제 침공했다. 이라크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게 이유다. 

첫 걸프전이 끝나고 유엔 안보리는 이라크에 모든 대량살상무기(WMD)를 파괴할 것을 명령하는 결의안 687호를 통과시켰다. 1998년 이라크는 돌연 유엔 무기 사찰단과의 협력을 중단했다. 또 2001년 9월 11일 알카에다(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조직)가 뉴욕 세계무역센터를 공격하자 미국은 이라크 침공을 본격적으로 계획했다. 2002년 10월 미 의회는 이라크가 WMD를 생산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이라크에 대한 군사력 사용을 승인했다.

이때 나온 단어가 ‘악의 축(Axis of evil)’이다. 2002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연두교서(State of Union address)에서 이라크, 이란,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칭했다. 

후세인 정권을 제거하고 친미 성향의 정부를 수립하려던 미국의 예상과 달리 전쟁은 2011년까지 지속됐다. 알카에다, IS 등의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세력이 확대되면서 2004년 내전이 발생했고 미국이 주장해온 WMD는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미국은 WMD 허위 정보, 장기화된 종파 갈등 등으로 최소 2조4000억 달러(약 3500조원)의 막대한 비용을 소모했고 급진 무장단체가 등장할 빌미를 줬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라크 전쟁은 미국의 실패한 전쟁으로도 불린다. 2008년 대통령 선거 당시 버락 오바마는 이라크전 종전을 약속하며 대선에서 승리했다. 

오사마 빈 라덴. (사진=연합뉴스)
조지 W. 부시 (사진=연합뉴스)

 ◆ 역사적 인물 2. 오사마 빈 라덴과 아들 부시 

오사마 빈 라덴은 1957년 3월 10일 사우디아라비아 라덴 가문에서 태어나 수니파 이슬람 극단주의 성향 테러조직 알카에다를 만든 인물로 9·11 테러의 배후로 지목된다. 

빈 라덴의 정치 성향은 대학 시절 결정됐다. 사우디의 킹 압둘아지즈 대학에 다니면서 무슬림형제단(이슬람주의자 조직)을 알게 된 게 시작이다. 

미국의 표적으로 올라선 것은 1998년이다. 1998년 8월 케냐와 탄자니아 주재 미국 대사관 폭탄 테러를 주도해 2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빈 라덴은 테러 배후로 지목됐고 그해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수배자 명단에 올랐다. 빈 라덴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국제 테러리즘 지휘통제센터를 마련하면서 테러 조직 규모를 키웠다. 

빈 라덴은 2011년 5월 파키스탄 아보타바드 은신처에서 미군 특수부대(네이비실 데브그루) 넵튠 스피어 작전을 통해 사살됐다. 빈 라덴 죽음 전후로 전 세계 공항의 보안 체계도 강화됐다. 미국을 포함한 국제공항에서는 소총을 든 경찰 배치, 입국 심사 강화, 철저한 수화물 검색 등 초비상 보안 조치가 시행됐다. 

빈 라덴에 맞선 것은 미국 제43대 대통령 조지 W 부시(아들 부시)다. 9·11 테러 직후 90%의 지지율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지만 2008년 리먼브라더스 파산 영향으로 지지율이 25%까지 폭락했다. 아버지 부시와 달리 전쟁을 성공적으로 끝내지 못해 미국 위상을 약화시켰다는 비판도 받았다. 

 ◆ 2010년대 IS의 급부상과 2026년 

2014년 들어 수니파 무장조직 ‘이슬람국가(IS)’가 급부상했다. 미국이 2003년 이라크를 과하게 압박하는 과정에서 수니파 군인과 관료들이 대거 실업자가 됐다. 이들은 미국에 대립하는 저항 세력으로 커졌고 국가를 자처하는 IS로 성장했다. 

2014년 오바마 대통령은 유엔총회 연설에서 IS를 ‘죽음의 네트워크(network of death)’로 규정했다. 같은 해 IS는 세력을 확장, 이라크 제2의 도시 모술을 점령하고 3년간 통치했으며 지도자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는 스스로를 무슬림 지도자 ‘칼리프’로 칭했다. 미국은 국제연합군을 구성해 공습을 재개하고 2017년 모술 탈환에 성공했고 IS 영향력은 약화했다. 2019년에는 최후 점령지인 시리아 바구즈까지 내줬다. 근거지를 잃은 IS는 지하화와 분산화돼 여전히 유지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로이터 등 외신에 따르면 IS 지도부는 비밀리에 운영돼 전체 규모를 파악하기 어렵다. 전체 규모는 1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IS 세력 약화 이후 걸프전은 마무리될 것으로 예상됐지만 2026년 들어 긴장은 고조됐다. 결국 미국과 이스라엘이 2월 28일 이란을 공습하면서 중동 정세는 급격히 악화하고 있다. 이란 내 반정부 시위 세력 지원과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차단하겠다는 게 이유다. 미국은 핵·미사일 시설, 군사 인프라, 지휘통제 시설 등을 타격했고 이 과정에서 이란 최고지도자인 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하메네이가 사망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2월 28일 공습 발표 대국민 영상 연설에서 “우리의 목표는 이란 정권의 ‘임박한 위협’을 제거해 미국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알리 하메네이. (사진=연합뉴스)

 ◆ 역사적 인물 3. 알리 하메네이

알리 하메네이는 1939년 이란 북동부 호라산라자비주 마슈하드에서에서 태어나 제3대 대통령(1981~89년)을 거쳐 제2대 라흐바르(1989~2026년)를 지냈다. 약 40년간 이란 인사권을 독점한 사실상 독재자다. 

하메네이 이름 앞에는 고위 성직자를 의미하는 ‘아야톨라’와 이슬람 전지자 무함마드의 직계 후손임을 가리키는 ‘세예드’ 등이 함께 붙는다. 

1958년 이란 최대 규모 신학교 호자티예에 입학해 루홀라 호메이니로부터 윤리학을 배웠다. 호메이니는 하메네이의 정치적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고 1963년 호메이니가 주도한 팔레비 왕조 반왕정 운동을 기점으로 하메네이는 본격적인 혁명 운동가가 됐다. 지역 주민들과의 소통을 강화하면서 신임을 얻은 뒤 1981∼89년 제3·4대 대통령을 역임했고 1989년 호메이니 사망 후 제2대 최고지도자에 올랐다. 

최고지도자에 오른 하메네이는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측근을 대통령에 앉히고 반정부 시위를 제압해 비판을 받기도 했다. 또 여성, 동성애자, 종교적 소수자를 탄압하는 것으로도 문제가 됐다. 특히 2025년 경제 불황이 촉발한 반정부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면서 최소 3117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됐다. 미국은 이를 명분으로 삼아 무력 개입을 예고했다. 

결국 미국은 이란과 3차 회담이 열린 지 이틀 만인 2월 28일 공습했다. 하메네이는 만 8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최수진 기자 jinny06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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