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중대재해처벌법 기소 기업 87%, 위험성 평가 똑바로 안했다
외부양식 ‘복붙’하거나 향후 조처 안해
중소기업 위주 기소…대기업 수사 지지부진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 위반으로 기소된 경영책임자가 가장 많이 준수하지 않은 의무는 ‘위험성 평가’로 나타났다. 위험성 평가는 사업장 환경에 맞게 유해·위험 요인을 스스로 발굴해 개선하는 절차인데, 산재예방의 기본적인 조처를 제대로 하지 않아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고 있는 것이다.
한겨레는 박지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통해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2022년 1월부터 지난 8월 말까지 해당 법률 위반 혐의로 기소된 기업 60곳과 지난달 기소된 아리셀·영풍석포제련소의 공소장을 20일 입수했다. 이를 분석한 결과, 기소된 기업들은 중대재해처벌법·시행령의 여러 의무를 위반한 혐의를 받는데, 위험성 평가 의무 위반이 87.1%(54건)로 가장 많았다.
외부 양식 베낀 위험성 평가
중대재해처벌법은 경영책임자에게 사업장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 의무를 부여하고,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중대산업재해가 발생한 경우 처벌한다. 경영책임자의 의무 가운데 ‘사업장 특성에 맞게 유해·위험 요인을 확인해 개선하는 업무절차를 마련하고, 제대로 개선이 되는지를 반기 1회 이상 보고받을 의무’, 즉 위험성 평가 의무가 핵심 의무로 꼽힌다.
그러나 기소된 사례를 보면, 기업들은 위험성 평가를 아예 하지 않거나 요식행위로 진행했다. 작업 속도를 높이기 위해 산업용 로봇을 임의로 개조했다가 노동자가 기계에 끼여 숨진 제조업체는 위험성 평가 지침을 만들었지만,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의 위험성 평가 시스템을 그대로 ‘복사·붙여넣기’만 했다. 작업 중인 노동자의 감전 사고가 발생한 철강업체는 ‘공정안전관리’ 대상 공정에만 적용되는 위험성 평가 지침을 만들고, 감전 관련 사항은 없었다.
후속 조처를 제대로 하지 않아 사고가 발생한 기업도 있었다. 현대스틸산업은 위험성 평가 결과 지게차 작업 때 협착 사고를 막기 위해 전담 신호수 배치 등 조처가 필요하다고 했지만, 이를 이행하지 않아 하청노동자를 숨지게 한 혐의를 받고 있다. 대한석탄공사도 사고 두달 전 실시한 위험성 평가에서 갱 안에서 발생하는 ‘출수’로 인한 매몰 사고 위험을 인지하고도 조처하지 않았다가 노동자가 죽탄에 매몰돼 숨지게 한 혐의로 기소됐다.
‘중대재해 예방과 안전권 실현을 위한 전문가네트워크’의 권영국 대표(변호사)는 “위험성평가는 이미 2014년부터 산업안전보건법에 사업주의 의무로 규정돼있음에도 처벌규정이 없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해왔다”며 “중대재해처벌법을 통해 경영책임자의 의무로 간주되고 위반 때 처벌돼 마침내 실효성을 갖게 된 것”이라고 짚었다.
2교대 인력 배치 안 해도 기소
두번째로 경영책임자들이 많이 위반한 의무는 안전관리자에게 권한·예산을 부여하고, 제 역할을 하는지 평가하는 의무(42건·67.7%)였다. 한 건설업체의 대표이사는 외부기관의 현장점검 결과 안전난간 미설치를 지적받고도 이를 방치한 안전관리책임자에게 ‘적격’ 평가를 했지만, 그 뒤 하청노동자가 안전난간이 제대로 설치되지 않은 채 일하다 추락사한 사고로 인해 기소됐다.
또 중대재해 발생과 발생 위험에 대비한 매뉴얼 미수립·이행(19건·30.6%), 사업장 안전·보건에 관한 종사자 의견 청취 절차 미수립·이행(17건·27.4%), 하청업체 산재예방 조치능력·관리비용 관련 기준 미수립·이행(15건·24.2%)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하청노동자를 중심으로 중대재해가 끊이지 않은 한화오션(옛 대우조선해양)은 사외하청업체의 재해 예방 능력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재해 예방을 위해 필요한 인력·시설·장비 관련 예산을 편성하지 않은 혐의로 기소됐다. 알루미늄 섀시 제조업체 대표이사는 기계설비 보수 작업이 상시 발생하는데도 2교대로 근무할 설비 보수 인력과 관리감독자를 배치하지 않아 노동자가 숨졌다는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대기업 수사는 ‘하세월’
2022~2023년 발생한 재해 조사 대상 사망 사고는 469건에 달하는데, 기소는 60여건에 그쳐 사고 발생 이후 기소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특히 현재까지 기소된 곳은 대부분 중소기업으로 대기업집단 소속 기업·공공기관 가운데 기소 사례는 9건에 불과했다.
대기업의 경우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전후해 관련 조처를 해둔 곳이 많은데, 중대재해 발생 시 경영책임자의 의무 위반과 어떠한 인과관계가 있는지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이 수사가 길어지는 이유로 거론된다. 또 시행된 지 얼마 안 돼 구체적 법리가 만들어지지 못한 상황에서 대기업들이 대형 로펌을 앞세워 대응하고 있다는 점도 수사를 늦춘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사고 발생 2년이 지나도록 기소가 이뤄지지 않은 사례도 많아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6월 공장에서 발생한 화재로 23명이 숨진 아리셀의 경우 검찰은 사건 발생 석달 만에 기소하기도 했다. 박지원 의원은 “대기업에서 중대재해가 반복되고 있음에도 수사가 지연되면서 조속히 시정할 기회가 사라지고 있다”며 “검찰은 수사 지연 원인에 대해 명확히 파악해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 김해정 기자 se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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