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사진을 보라. 싱가포르 공공장소 곳곳에 붙어있는 껌 금지 표지판이다. 흡연 금지도 아니고, 주차 금지도 아니고 껌을 금지한다고? 표지판 아래엔 어길 시 1000 싱가포르 달러, 우리돈 98만원의 벌금 부과라는 무시무시한 경고도 적혀있다. 얼마전 김민재가 소속된 바이에른뮌헨이 아시아 투어로 싱가포르에 왔을 때도 구단 차원에서 껌 금지령이 내려졌다던데 유튜브 댓글로 “싱가포르에선 껌 씹는 게 불법이라던데 정말인지 알아봐 달라”는 의뢰가 들어와 취재해 봤다.

싱가포르 대사관에 정말 껌을 씹는 게 불법인지 물어보니,
싱가포르 대사관 관계자
“씹는 것 자체가 불법은 아니고요. 씹고 나서 버리다가 문제가 생길 수가 있어서…되게 철저하게 금지 표시라든지 그런 부분들이 잘 되어 있긴 합니다. 철저하고 그리고 또한 다들 또 잘 지키고...”

엄밀히 말하면 ‘껌을 씹는 것’ 자체는 불법이 아니고, 벌금이 부과되는 건 공공장소에서 껌을 씹거나 뱉을 때다. 즉, 집이나 호텔에서 혼자 껌을 씹는 것까지는 가능하다는 이야기. 다만, 싱가포르 내에선 껌의 구매와 판매, 반입이 일절 금지되어있기에 사실상 껌 구하는 일 자체가 쉽지 않다.

게다가 껌을 밀매하다가 잡히면 징역 2년 이하 혹은 최대 1억의 벌금까지도 부과한다고 하니, 이쯤이면 싱가포르가 껌과 무슨 엄청난 악연이라도 있을 것 같은데... 싱가포르는 왜 이렇게 필사적으로 껌 씹는 걸 막는 걸까?

의외로 그 이유는 지하철에 있었다. 싱가포르가 이렇게 철저하게 껌 씹기를 금지하기 시작한 건 1992년. 싱가포르 국립 도서관 자료에 그 역사가 남아있다 . 자료에 따르면, 껌씹기가 금지된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싱가포르의 지하철인 MRT가 껌 때문에 구동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우리나라처럼 1980년대 싱가포르에도 지하철 빌런들이 있었는데, 그 중 가장 골칫거리 빌런은 지하철 문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도록 문 센서에 껌을 붙이는 껌 빌런이었다.

지하철뿐 아니라, 엘리베이터 센서 등 센서라는 센서마다 껌을 붙여대서 민원이 잦았다고 하는데, 심할 때는 하루 평균 민원이 525건에 달했다고 한다. 싱가포르 정부도 초창기엔 그저 껌 광고를 제재하고, 공교육으로 껌 예절을 가르치는 등의 얌전한 대책을 세웠지만, 문제가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고 민원 처리에 드는 비용이 늘다 보니 1992년 특단의 조치를 내리는데. 껌 판매와 구입 금지 그리고 공공장소에서 껌을 씹는 행위까지 금지한 거다. 효과는 굉장했는데, 껌 금지령이 시행되고 525건에 달하던 민원은 하루 평균 2건으로 대폭 줄어들었다.

껌 빌런들 잡으려다가 도시 경관도 덩달아 좋아졌는데, 이곳저곳 사람들이 뱉어댄 껌이 사라져서 도로가 청결해지고 껌 처리에 들어가는 청소 비용도 줄었다. 이런 건 좀 부럽기도..?

이렇게 껌에 대한 기준이 엄격한 싱가포르에서 껌을 씹을 방법이 하나 있긴 한데,
싱가포르 관광청
“껌은 의학용 이외에는 소비하실 수가 없어요. 싱가포르에는 껌이 없어요. 의학용으로 드시는 게 아니고서는요.”

껌을 씹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껌이 필요한 의학적 이유를 처방이나 진료 등으로 증빙하여 껌 씹는 사람(gum user)으로 등록하고 약국에서 신분증을 검사하고 구매하면 된다. 판매는 일부 금연껌과 의료용 껌만 가능하다.

특히나 싱가포르에는 이런 이색적이고 다소 엄격한 법이 꽤 많은데, 벌금의 나라라는 별명에 걸맞게 생소한 벌금이 워낙 많다. 흡연과 술은 당연히 벌금이고, 물 낭비하면 벌금, 비둘기 밥 줘도 벌금, 화장실 물 안내려도 벌금, 심지어는 이런 일이 있나 싶은 엘레베이터에서 소변을 봐도 벌금이라는 표지판도 있다. 벌금이 워낙 많다보니 여행객을 위한 벌금 안내 티셔츠까지 있다고 한다.

그래도 취재하면서 느낀 건 싱가포르 현지인이나 싱가포르에 사는 사람들이 이런 엄격한 법을 다소 불편하긴 해도 싫어하진 않았다는 건데. 누구는 이래서 봐주고, 누군 저래서 봐주고 하지 않고 법 앞에선 모두 평등하게 엄격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싱가포르가 국제투명성기구에서 발표하는 공공부문 부정부패 수준이 낮은 국가부문에 해마다 상위권에 오르는 게 엄격한 법 집행이 가능한 것도 그 이유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