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개그맨에서…다시 무명으로 시작해 활동중인 이분

(Feel터뷰!) 영화 '세기말의 사랑'의 임선애 감독을 만나다

지난 1월 24일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세기말의 사랑>을 연출한 임선애 감독과 만났다. 인터뷰 당일은 개봉일이었다. 첫 영화를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아 두 번째 영화를 선보이게 된 소감을 묻자 “담담할 줄 알았는데 악몽을 꿨다. 영화의 꽃은 개봉이니까 걱정 된다”며 웃으며 말했다.

올해 독립예술영화 제작지원사업 예산이 114억 원에서 67억 원으로 줄고, 영화제 지원사업 예산도 24억으로 지난해 대비 절반이 삭감된 우울한 현실이다. 두 번째 장편을 개봉한 임선애 감독이 악몽까지 꾼 상황이 조금은 이해되었다.

임선애 감독은 무거운 소재였지만 꼭 필요한 이야기를 전했던 <69세> 이후 4년 만에 <세기말의 사랑>을 발표했다. 한국 영화의 열악한 상황에서 독립 영화의 선전이 기대되는 영화다. 통통 튀는 귀여운 톤이 세기말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고 말하니 “10년 전 썼던 시나리오를 세기말로 수정했다”고 털어놨다.

*인터뷰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작품 하나 나오는 데 걸리는 시간이 감독마다 다를 것 같다. 4년 만에 두 번째 장편을 선보이게 되었다.

“<69세> 이후 차기작을 물어보는 질문이 많았다. 한 편 만들기도 어려운 게 현실이고 사라지는 감독도 많았다. 마음은 급한데 뭔가 닿지 않더라. 신나서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써 놓은 이야기 중에 골랐고 10년 전 시나리오를 꺼내 봤다. 원래 이 작품으로 데뷔하고 싶었기에 하다 만 숙제 같은 느낌이었다. 제대로 끝내보자고 생각해서 마음먹고 시작했다.

결국은 제작비가 문제였다. 운 좋게 제작지원에 선정되어 촬영이 진행되었다. 제작자의 의지와도 맞아야 했는데 <69세> 제작사 대표님이 함께해 주어서 편안하게 작업했다. 4년 만이라고는 하지만 결코 긴 시간이 아니었다. 시나리오 수정 과정도 충분했고 캐스팅도 어렵지 않게 모두 오케이 해주셨다. 4년 준비하고 작품 하나 나오는 게 운이 좋은 거다. 그렇지 못한 감독도 많다”

-세기말하면 부정적인 인상이 있다. 세기말과 이천년 배경으로 쓴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처음에는 2012년 배경으로 썼다. 읽어보니 이야기가 낡아 보였고 영미가 짝사랑을 고백하려면 계기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이 멸망할 정도로 큰 계기, 바로 ‘세기말’을 떠올렸다. 세기말은 영미를 지칭하는 별명이기도 하다. 세기말이 배경인데 세기말이 별명인 여자가 사랑하는 이야기다. 제목에 세기말과 사랑을 붙이니까 시나리오 수정에 속도가 붙었다”

-세기말에 무엇을 하고 있었나, 그때 기억이 반영된 시나리오인가.

“세기말을 배경으로 하면서 그 시기를 겪었던 인물들의 심리에 주목했다. 당시 20대였고 영화에 막 인문 했을 때였다. 종말은 믿지 않았지만 정전이나 컴퓨터 혼란이 오면 전산장애가 온다고 생각했다. 사재기도 했었다. 그때는 그 과에 대단한 꿈을 품고 간다기보다, 점수에 맞추거나, 다 떨어져서 가기도 했던 때다. 제가 미대를 다녔는데 앞으로 뭘 해야 할까 혼란스러웠다. 그래서인지, 어떤 일이 크게 벌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의 전환. (웃음) 혼란스러웠지만 기대되기도 했다. 살면서 앞자리가 ‘2’가 된다는 상상을 하지 못했던 때였으니까. (웃음) 막연해서 불안했고 설레기도 했었다”

-<화차>,<사바하>, <남한산성> 등 굵직한 영화의 스토리보드 작가로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 [오징어 게임]의 스토리보드에도 참여했고, 스크립터, 시나리오 작가 등 다방면에 경력을 쌓았다.

“홍대 광고멀티디자인과를 나왔다. 광고도 만들었지만 영상 만드는 작업도 배웠다. 영상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스토리보드를 처음 그려보게 되었다. 그땐 영화 잡지를 구독하고 관심 많았던 씨네 키즈였다. 자연스럽게 영상 작업을 하다 보니까 서사를 만들게 되었는데, 그때 영화감독을 막연히 꿈꾸게 되었던 것 같다.

2학년 때 과감하게 휴학하면서 현장 경험을 쌓았다. 스크립터 연출부 막내였는데 감독님이 미대 출신이라며 스토리보드 작업을 맡겼다. 본격적으로 그림 실력을 뽐내야 했다. 막막했다. 콘티는 또 다른 영역이었다. 만화책이나 콘티 관련 서적을 보면서 연습했고 컷 공부도 하게 되었다. 연출부를 마치니까 콘티 작업 의뢰가 꽤 들어왔다. 영화 메커니즘을 처음부터 끝까지 경험한 게 나름 경쟁력이 된 거 같다. (웃음)

휴학 상태라 계속 일할 수 없었다. 그때 조금씩 번 돈을 모아서 단편 하나 찍게 되었다. 영화 현장에 깊숙하게 들어가며 병행했다. 졸업할 땐 영상영화전공과가 생기더라. 그 과 친구들과 졸업작품 협업도 했다. 스토리보드 작업하면서 영감도 받고 연출자와 오랫동안 소통했던 경험이 체화되었다. 세 보니 50여 편을 작업했더라. 제 작품을 빨리 써서 데뷔할 수 있었지만 개미 걸음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69세>로 데뷔했고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10년 전 시나리오를 수정하면서 달라진 점이 궁금하다.

“두 여성이 불편한 동거로 서로에게 영향을 받고 스스로 존엄을 깨달아 무너졌던 삶을 회복하는 맥락은 같았다. 크게 달라진 점은 유진 서사 안에서 미리라는 인물의 등장이다. 유진이 육아가 어려우니 언니가 자기 호적에 올리자고 했던 거다. 시나리오를 쓸 때까지만 해도 미리는 사실을 모르는 설정이었다. 언니가 끝까지 밝히지 않고 떠났을 텐데 차츰 미리가 눈치채지 않았을까 싶다. 미리는 아마 엄마나 이모의 존재가 부담스러워서 가출했을지도 모른다. 미리가 진실을 알든 모르든 다 이해되었을 설정이다.

둘째는 미술 학원에서 찍은 듯 보이는 유진과 유진 언니 사진이다. 교복 입은 사진 한 장으로 발병 시기를 유추할 수 있다. 유진의 모델이었던 이모도 20대 초반에 근육병이 왔었다. 호구 1번(김기리)과의 대사를 곱씹어 보면 임신할 무렵 근육병이 왔던 거다. 이 병은 임신하면 진행 속도가 빨라진다. 유진은 20대 초반부터 무너지기 시작했고 고등학교 졸업쯤 임신하게 된 거다. 그걸 잘 모르다가 근육병이 왔다고 설정했다.

원래 욕조 장면에서 과거를 술술 풀어 주는데 편집했다. (웃음) 중요한 건 장애 발병 시기나 삶이 무너지는 게 아니다. 그저 그 사람의 취향, 성격, 가치관이 드러나고 서로의 트라우마가 은근히 드러나길 유도했다”

-보석 같은 배우의 캐스팅으로도 빛나는 영화다. 적재적소에 딱 맞는 맞춤옷을 입은 듯 영미와 유진이 스크린을 뚫고 튀어나올 것 같다.

“유영 씨는 처음부터 개성 강하고 독특한 캐릭터였다. 예쁘지 않은 배우로 캐스팅하는 것도 일종의 선입견이지 싶었다. 그래서 주근깨를 그리거나 안경을 씌우고 싶지 않았다. 원래 모습에서 기존 이미지와 다른 스펙트럼을 어떻게 보여줄까 고민했다. 유영의 동그랗고 귀여운 느낌 안에 똘끼가 보였다. (웃음) 하얀 도화지 같았고 더 해부하고 싶었을 정도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역할 같았는데 승낙 받을 자신감이 있었다. 오래 끌지 않고 답을 주더라.

유진은 반대로 시니컬하고 도도하며 외모도 차별화되길 바랐다. 그래서 영미가 캐스팅되고 유진이 캐스팅되어야 했다. 선우 씨의 단, 장편을 보았다. 단편은 거의 다 찾아봤다. 현실적인 역할도 많이 했지만 로맨스물도 있었고 개구진 얼굴이 있었다. 고전적인 얼굴선이 가진 청순미를 깨보고 싶었달까. 이런 마스크는 한국 영화계에 드물다고 생각했고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외모였다. 저런 얼굴을 하고 위악을 부리면서 땍땍거리면 재미있지 않을까 상상했다.

현장에서 두 분이 시나리오보다 입체적인 캐릭터로 만들어 주었다. 유영 씨는 본인을 아끼지 않고 보여줄 것 외의 스펙트럼이 넘치는 배우다.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재촬영하자고 적극적으로 행동했고, 여러 가지 버전을 주었다. 현장 가면 ‘오늘의 영미는 어떤 연기를 할까?’ 기대하게 되었다. 시나리오보다 더 웃기고 귀여웠다. 활발한 물음표보다 느낌표가 어울렸던 배우다. 예상치 못한 방면으로 틀었을 때 올라오는 카타르시스를 즐기는 듯 보였다.

선우 씨는 본인뿐만 아니라 시나리오 전체를 본다. 앞뒤 장면을 어떻게 찍었는지 유진의 감정을 고려해서 연기 톤을 맞춘다. 연출부가 한 명 더 있는 듯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실제 이모님을 만나서 이야기도 나누었다. 장애보다는 한 인간의 뜨거운 면을 보여주기 위해 고민하는 흔적이 보였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물리적으로 몸을 움직이지 않기 위해 제약이 많았을 거다. 당시 제어하던 몸에 문제가 와서 2-3개월 재활했었다고 들어 미안했다”

-둘의 케미를 의도했다고 봐도 되는 건가. 어떻게 보면 워맨스를 넘어 로맨스로도 보인다.

“의도한 건 아닌데 그렇게 보시기도 하더라. 여자들은 나랑 친한 친구가 다른 친구랑 친하면 괜히 질투 난다. 연애나 우정도 친밀감이 크지만 약간의 집착성이 있다. 둘을 만나게 한 의도가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다는 걸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사회가 이 사람들을 약자, 아웃사이더, 모자란 사람이라고 카테고리 지을지언정. 스스로는 당당하고 오히려 자격지심 없는 사람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촌스러운 줄만 알았는데 나보다 멋진 여자네’, ‘저 여자 성격 괜찮네..’라면서 서로 보석임을 발견하게 되면 애정이 생기지 않을까 싶었다”

-유진과 영미는 도영을 동시에 사랑한다. 하지만 도영은 대체 누구에게 화살을 겨누는지 뚜렷하지 않다.

“초고부터 변하지 않았던 생각이다. 한 남자를 두 여자가 좋아하는데 많이 안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웃음) 플롯은 두 여자 중심이고 둘의 대화를 통해 대상이 어떤 사람인지 은근하게 드러나길 바랐다. 재원 씨는 제가 따로 흠모하고 있다가 발굴했던 배우다. <버닝>의 해미 역할을 두 가지 버전으로 연기하는 영상까지 보면서 빠지게 되었다. 꾸밈없는 얼굴이 딱 도영이었다. 꾸준히 디엠 보내면서 완고 되면 보여드리겠다고 했다. <살인의 추억>의 박해일 배우를 처음 봤을 때의 분위기가 도영 씨에게 보였다. 텍스트만 봐서는 도영을 잘 모르겠었는데 재원 씨를 보면 납득되도록 했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로 너무 유명해졌지만 그 김서완을 구도영으로 각인시키는 게 제 목표다. (웃음)”

영화 <세기말의 사랑>에 출연한 김기리

-호구 1번 김기리 배우 캐스팅이 의아하다. 대사를 유추해 보면 오래전에 유진과 만난 사이 같다. 뚜렷한 전사가 등장하지 않아 호기심이 생긴다.

“돌이켜 보면 캐스팅에 선입견이 없었다. 기리 씨의 오디션 영상을 봤었는데 항상 최종 순위에 남아 있었다. 개그맨으로 활동하다가 공백기도 있었지만 계속 배우의 길을 가고 있었다. 전에는 코믹한 이미지로 연기해 왔었고 정극은 처음이었다. 만나보니 기훈 같았다. 편집되었지만 유진의 집에서 옛날이야기를 하면서 미리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기훈은 집이 망해서 미국으로 유학 갔었는데 그것도 망했다며 자책한다. 유진과 미술학원 동기고 미술학도였지만 지금은 피부과 실장이다. 생계가 중요했고 꿈을 잃어버린 친구다. 기리 씨가 캐스팅 소식 듣고 울셨다. 정극 연기도 할 수 있다고 자기를 발견해 준 감독이라며 고마워했다. 알고 보면 사실 연기 잘해서 뽑은 거고 만날수록 너무 좋은 사람이더라”

-카메라 시선이 수평적이라고 느꼈다. 그러면서 장애와 비장애, 아름다움과 이상함의 단어가 예상을 뛰어넘어 전개된다. 특히 목욕 장면에서 유진이 영미의 화장 자국을 만져보면서 서로 몸을 만지는 사이가 된다. 그때 공평하다는 말이 나온다. 그 부분이 완전히 서로 믿고 의지하는 것 같아 따뜻했고 용기를 내게 되었다. 영미의 상처 있는 손, 발꿈치, 화상 자국, 유진의 모기 물린 눈 등 상처를 클로즈업 자주 한다.

“둘은 수평적인 앵글로 바라보도록 의도했다. (웃음) 상처를 목격하고 위로해 줄 최초의 사람이길 바랐다. 유진이 소변으로 옷이 젖자 영미가 선뜻 옷을 벗어 가려준다. 영미는 몸에 화상 자국이 있어서 감추는데 이력 난 사람 아닌가. 그런 영미가 선뜻 벗어줄 수 있는 사람이길 바랐고, 그 자국을 보고도 찌푸리거나 혐오하지 않길 원했다. 화상 자국을 보고 무언가를 닮았다고 말해주는 유진의 태도도 중요했다. 상처를 처음 보고 만져 본 사람도 유진이길 바랐다.

욕조까지 오기 전에 각자의 치부를 목격하게 된다. 영미는 돈 빌려 간 오빠가 하대하는 장면을 들키고, 유진은 원하지 않게 생리현상을 참지 못한 상황이다. 이 둘이 욕실에서 감추고 있던 장막을 거두고 솔직하게 이야기할 공간이었으면 했다. 구도영을 좋아했던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각자 삶을 살아온 사람에 대한 질문을 주고받는 지점이다”

-화상 자국이 ‘맨드라미를 닮았다’는 대사를 할 줄 몰랐다. 맨드라미 꽃말도 인상적이었다.

“애초에 화상이 몸의 무늬로 보이길 기획했다. 상처도 내 인생의 일부이자 역사라고 생각했다. 화상 모양을 고민하다가 꽃이 생각났고, 익숙한 것 같아도 발견하기 어려운 꽃, 생명력이 강한 꽃, 화상을 닮을 꽃을 찾다가 맨드라미를 떠올렸다. 어릴 때는 모양이 징그럽다고 생각했었는데 영미 캐릭터와 플롯이 닮아 있었다. 내친김에 꽃말도 찾아봤다. 치정, 괴기, 시들지 않는 사랑이 나왔고 ‘이거다’ 싶었다. 맨드라미는 길거리에 피는 꽃이다. 꺾여서 꽃집에 있는 꽃과 달리 땅에 뿌리는 내리고 있어 생명력도 있다. 꺾인 꽃은 예쁘고 화려하지만 금방 시들기 마련이라 세 사람의 사랑이 뿌리내린 맨드라미라고 생각했다”

-상징하는 게 많아서 찾는 재미가 쏠쏠하다. 휠체어 바퀴, 대관람차, 공원 운동기구, 양푼 비빔밥 등 원형의 이미지가 많다.

“너무 의도했다. (웃음) 알아봐 주셔서 감사하다. 처음에는 원형 이미지가 많아서 몇 개인지 따로 그려보기도 했었다. 흑백 장면 중에 영미가 새천년이 돼서 떡국 먹는 장면에도 하얗고 동그란 떡국이다. (웃음) 카메라를 보면 영미는 구석에 있고 내몰린 상황이다. 뚫고 나가지 못하는 상황을 보여주려고 한쪽에 몰아넣는 구도로 찍었다. 새천년이 밝고 컬러풀한 화면이 되자, 다 잃었지만 어깨의 짐도 내려놓는다. 앞으로 본인 선택으로만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후에는 영미를 중간에 배치하는 앵글이 많았다. 중심에서 잘 굴러가길 바라서 오버 더 숄더 샷으로 잡았다. 원이라는 건 어느 방향으로 봐도 치우치지 않는다. 세상도 둘을 수평의 이미지로 봐주길 바랐다. 마지막 영미가 도영의 미수금 받는 카페 장면도 깨알 같다. 식탁, 커피잔, 인주, 지장 모양도 다 원형인데 미술팀이 고생했다”

-유진은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이용하거나 속이는 걸 알면서도 품어 준다. 범성애적 사랑 휴머니즘이 느껴진다.

“둘이 불편한 동거를 하게 된 이유도 주거와 돌봄 때문이다. 생존이 걸린 문제 안에서 사랑, 애증도 싹틀 수 있다. 유진은 돌봄이 중요하니까 주변에 손발이 되어 줄 사람이 필요하다. 공짜로 받지 않고 줄 수 있는 걸 교환하는 사람이다. 직업이 있다. 유진은 상반신만 나와도 되는 팸플릿이나 치아 모델 등을 하면서 생활비를 번다.

오준(문동혁)이 속인 걸 알아도 그걸 말하는 순간 죄책감에 집에 못 올 것도 알고 있다. 필요충분조건에 의해 베풂도 생존을 위한 방식이라고 봤다. 오준의 머리색을 물어보시는데 제가 민트색을 좋아한다. 민초파다. (웃음) 영미와 자주 붙어 있다 보면 보색 대비가 기괴하게 보인다. 영미 혼자 튀지 않게 밸런스를 맞춘 색깔이다”

-<69세> 이후 계속해서 소외되거나 불완전한 인물이 주인공이다. 계속 이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이유는 뭔가?

“성폭력 피해 여성이 주인공이고 장애인이 주인공인 영화는 많았지만 늘 불만이었던 것 같다. 성폭력, 장애 자체가 캐릭터화돼서 보여주는 방식이 싫었다. 그건 현재 상황을 표현하는 수식일 뿐인데 그들을 다루는 스테레오 타입이 정해져 있다고 봤다. 그래서 다른 각도에서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주변에 성폭력에 노출된 경험을 가진 친구들도 꽤 있어서 남 일 같지 않았고 내 이야기처럼 쓸 수 있었다. 이번은 이모가 유진과 같은 전신마비를 앓고 있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쓸 수 있었다.

인권주의 영화는 아닌데 소외된 인물이 흥미로웠다. 사회적 약자를 다루겠다는 의지는 없었다. 다만 그들을 영화나 미디어에서 보여주지 않은 방식으로 다루고 싶었을 뿐이다. 캐릭터가 돋보이는 영화를 좋아하다 보니 내가 보고 싶은 캐릭터를 그렸던 것 같다. 알고 보면 자기가 하고 싶은 걸 다 했다는 거다. (웃음)”

한편, 영화 <세기말의 사랑>은 세상 끝나는 줄 알았던 1999년, 짝사랑 때문에 모든 걸 잃은 ‘영미’에게 짝사랑 상대의 아내 ‘유진’이 나타나며 벌어지는 이상하고 사랑스러운 영화다. ‘세기말’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자유롭게 쓰이면서 다양한 사랑을 이야기한다. 1월 24일 개봉해 절찬상영중이다.

글: 장혜령

사진:(주)엔케이컨텐츠

세기말의 사랑
감독
임선애
출연
이유영, 임선우, 노재원, 임선애, 박 로드리고 세희, 박세영, 강민국
평점
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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