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잘 지내십니까”.. 오빠부대를 이끌었던 대한민국 배구스타들의 ‘근황’
대한민국에 탈아시아급 선수가 있었다고?
배구판을 군림했던 배구 선수들 4인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사랑받고 있는 스포츠, 배구. 김연경 선수로 인해 최근 널리 알려지고 있지만 사실 이전에도 배구 팬은 많았다.
오랜 배구 팬들이 인정하는 대한민국의 배구 선수들이 있다. 그들의 전성기는 가히 독보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지금부터 그 커리어를 소개해 보려고 한다.
‘갈색 폭격기’ 신진식
실업 배구 77연승, 겨울 리그 단 9연패. 대전 삼성화재 블루팡스의 ‘갈색 폭격기’ 신진식이다.
성균관대학교 졸업을 앞둔 신진식의 재능을 알아본 팀은 현대자동차서비스였다. 그러나 1995년, 현대자동차와 협력 관계였던 성균관대가 삼성화재와 갑자기 손잡으면서, 성균관대의 배구부를 삼성화재가 지원하기 시작했다.
당시 삼성화재는 새로 생긴 팀이었어서 김세진 외에는 그렇다 할 선수가 없었다. 그래서 특출난 실력을 가진 신진식을 스카우트하려고 한 것이었다. 현대자동차서비스는 에이스 신진식을 놓칠 상황이 닥치자 삼성화재에 법정 소송을 걸며 스카우트 파동이 일어났다. 이런 사건이 일어났을 정도로 신진식은 절대 빼앗기기 싫은 선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결국 1996년, 신진식은 삼성화재에 소속되게 되었고, 그곳에서 함께 소속돼 있던 김세진과 ‘좌진식, 우세진’이라는 말을 들으며 무적의 팀으로 전성기를 누렸다. 그때 갈색폭격기라는 별명이 붙은 것이다.
이후 2000년, 올림픽에서 러시아 국가대표팀과 맞서 국제대회 한 경기 득점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신진식이 속했던 삼성화재가 얼마나 강팀이었는지 알 수 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때는 2004년, 배구챔피언결정전 2차전에서 삼성화재가 현대캐피탈과 붙어 3:2로 패배했을 때였다. 그 순간 현대 배구 관계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배구 팬들까지 소리를 질렀다, 환호의 의미였다. 이처럼 삼성이 패한 것에 모두가 기뻐할 정도로 삼성 팀은 배구판에서 적수도 없는 막강한 팀이자 모두의 적이었다.
은퇴 이후, 그는 코치와 감독의 길을 걷다가 현재는 고깃집을 열어 주방장 겸 사장을 맡고 있다.
김세진
신진식의 전성기에는 김세진이 빠질 수 없다. 신진식이 배구판을 날뛰던 시절 그의 옆엔 김세진이 함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둘은 그렇게 좌진식 우세진 조합으로 탈아시아급 공격수로 인정받았으며, 김세진은 FIVB 월드리그에서 공격수 상을 수상하기도 했었다. 그리하여 김세진은 월드스타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삼성화재가 강한 선수들을 다 빼앗아 가는 스카우트 만행을 펼쳤을 때, 그때 삼성화재가 선택한 선수에 김세진이 있었다. 그렇게 삼성화재는 김세진을 포함 김상우, 최태웅, 신진식 등까지 영입해 괴물 같은 전력을 갖춘 후 1997년, 슈퍼리그 우승으로 시작하여 V-리그 2000년대 초반까지 승리를 독식했다. 그리고 그 주요한 역할을 김세진이 해냈다.
많은 운동선수들이 그렇듯 그는 전성기를 구가하던 중에 부상 문제로 인해 한 시즌을 출전하지 못한 적이 있다. 그러나 2004년, 그는 수술 후 독한 재활훈련을 마친 뒤 컴백과 동시에 MVP로 선정되며 배구 국가대표 라이트로서 변치 않은 위상을 보여 주었다. 이로써 그날은 그가 4번째 MVP를 안은 영광의 날이 되었다.
그리고 은퇴 후 배구 해설위원과 감독으로 활동하던 그는 최근 2023년, 한국배구연맹의 운영 본부장으로 선임되며 새롭게 자리잡았다.
‘임꺽정’이란 불리던, 임도헌
배구 국가대표 라이트로서 한 시대 배구판을 군림했던 김세진. 그에게도 상대하기 어려운 선수가 있었는데, 그 선수는 바로 전 배구 선수, 현 감독 임도헌이다.
선수 시절 포지션은 아웃사이드 히터. 별명은 임꺽정, 그리고 “괴력의 강타자”라는 별명도 있었다. 묵직한 파워를 가진 스파이커였으며, 블로킹과 수비력까지 갖췄었다. 특히 사이드 블로킹 실력은 김세진 포함 많은 선수들이 상대하기 어려워했을 정도로 뛰어나면서 상대의 블로킹은 오직 힘으로 뚫어 버렸었다.
그의 큰 특징은 일그러져 있는 얼굴 한 쪽인데, 그렇게 된 이유는 훈련 중에 안면 마비 증상이 일어났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굴하지 않고 특유의 성실함과 뚝심으로 배구에 몰두했다. 그렇게 그는 세터 진창욱과 함께 성균관대 배구부를 대학배구 리그의 전설로 만드는 데 큰 공을 기여했으며, 국가대표 레프트로 전성기를 풍미한 공격수가 되었다.
1993년, 현대자동차서비스는 그에게 3억 5,000만 원이라는 당시 기준 큰 금액을 계약금으로 제시했고, 그는 입단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입단과 동시에 주전 자리에 앉았다.
1994년부터 1995년에는 슈퍼리그에서는 마낙길, 강성형과 함께 삼각편대를 이루어 우승을 차지했다. 이에 더해 MVP까지 품에 안는 영예를 누렸다.
그러나 1996년, 고려증권의 이성희, 박삼용에 밀리고, 1997년에는 삼성화재가 에이스 선수를 다 뜯어간 스카우트 비매너로 인해 신진식, 김세진 콤비에 밀려 우승을 하진 못했지만, 1995년 슈퍼리그부터 3년 내내 베스트 6로 뽑히는 잊혀지지 않는 선수였다.
이후 2003년, 캐나다 밴쿠버의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에서 1년 동안 지도자 연수를 받고 난 뒤 국가대표팀 및 청소년대표팀 코치의 길을 걷다가 2006년, 삼성화재 수석 코치 자리에 임명됐다. 그리고 최근에는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맡은 바 있다.
후인정
앞서 말했던 선수들만큼 화려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멋진 선수가 있다. 그는 바로 후인정이다. 후인정은 삼성화재가 신진식과 함께 데려가려고 했던 눈에 띄는 선수였다. 그러나 그는 삼성화재로 가지 않고 현대에 가기를 선택했다.
이후 삼성화재가 김세진, 신진식을 앞세우여 독재하는 바람에 그에게는 늘 ‘2인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이처럼 그의 선수 생활은 탄탄대로라고 할 수 없었다. 그가 몸 담았던 현대캐피탈은 계속된 내부 문제로 배구단 해체를 검토할 지경까지 다달았었다.
그러나 새로운 감독이 취임하면서 2005 시즌 정규리그에서 우승하게 되는데, 이때 후인정이 영광의 MVP의 주인공에 올랐다.
그러다 이듬해에 2005~06 시즌 통합 우승을 하며, 그는 배구 인생 처음으로 우승을 맛보게 되었다.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그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쏟고 말았다. 과거 우승을 눈 앞에서 놓친 좌절의 순간들이 떠올라 감격의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세월이 지나 후인정은 40대가 되었고, 그 나이에도 최고참 선수로 맹활약을 보여 줬다. 그는 여전히 뛰어난 블로킹 능력으로 주전 센터들과 로테이션으로 경기했다.
비록 전성기만큼은 아니었지만, 세트 후반부에 센터로서 경기의 흐름을 바꾸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로써 몸 관리를 잘한다면 나이 든 선수도 오래 경기장을 활보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는 현재 코치와 감독을 맡다가 좋지 못한 성적을 남기고 2024년 2월 14일, 이에 책임 지고 자진하여 사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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