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선 아시아인, 아시아선 유럽인”...오히려 그녀는 자유로웠다
로베르트 발저상·전미도서상 수상
인간 본연의 마음 포착해낸 작품
“세계 도처 독자 만나게 돼 기뻐
지리적 경계는 더는 문제 안돼”
30개국에서 번역 출간된 그의 데뷔작 ‘속초에서의 겨울’은 스위스 로베르트 발저상, 프랑스 문필가협회 신인상을 받았고, 미국 최고 권위 전미도서상(내셔널 북 어워드)까지 휩쓸었다. 이제 그의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진다. 지난 2월부터 속초에서 진행중인 영화 촬영 현장을 찾은 한국계 프랑스인 작가 엘리자 수아 뒤사팽(Elisa Shua Dusapinㆍ32)을 최근 이메일로 만났다.
“혼혈이지만 유럽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젊은 여성인 ‘나’의 이야기입니다. 사실 17세부터 21세 사이에 쓴 소설인데, 제 작품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독자의 관심과 인정을 받을 수 있었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속초에서의 겨울’은 뒤사팽 소설 세계의 키워드인 ‘경계인의 정서’를 집약한 장편이다. ‘나’는 엄마와 함께 운영하던 낡은 펜션에서 길을 잃은 사람처럼 도착한 노르망디 출신의 중년 만화가 얀 케랑을 만난다. 독을 품은 생선과 고통에 찌든 육체가 만나는 항구도시 속초는 마치 ‘나’와 케랑에게 세계의 끝인 것처럼 묘사된다. 북한과 인접한 지역이면서 산과 바다의 경계이기도 한 작은 도시, 어디선가 밀려와버린 사람들과 어디론가 떠나야 하는 사람들이 부유하다 만나는 종착역이 바로 속초다.
“처음엔 이 소설을 부산에서 쓰기 시작했습니다. 소설 화자가 누군지 알아갈수록 부산이 인물 심리에 부적합하단 걸 깨달았어요. 더 작고 내적으로 친밀한 도시가 필요했고, 그런 점에서 속초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속초가 국경의 개념, 여름과 겨울의 이색적인 분위기, 북한과의 경계 등을 드러내주는데 이런 요소를 통해 인물의 정체성을 허무는 경계로 작용하죠.”
뒤사팽 작가는 소설에서 혼혈이자 두 문화를 가진 ‘나’와 케랑의 대화를 통해 끊임없이 ‘인간으로서의 나란 누구이고 또 무엇인가’의 의미를 탐색한다. 속초 바다는 ‘나’의 아버지와 케랑의 고향인 노르망디해변을 떠올리게 한다. 바다 앞에 선 ‘나’의 심연은 곧 뒤사팽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로 이해된다.
정주하지 못하고, 무언가로부터 이탈되어버린 인간 본연의 이산(離散)의 감정이 문장마다 절절하다.
“유럽에서는 아시아인, 아시아에서는 유럽인. 예전에는 모든 곳에서 이질감을 느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기는 하지만 더 이상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저는 소설 속 인물에게 제 감정을 부여하고 또 제가 속한 부분이기도 한 새 영역을 창조해냅니다. 범위가 확장되면서 지리적, 문화적 경계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죠. 이렇듯 모든 걸 혼합하면서, 현실에서보다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의 소설은 카무라 코야 감독이 연출하는 동명의 영화로 제작돼 2024년 개봉한다. 카무라 감독도 일본계 프랑스인이다. 소설 속 케랑 역에는 2006년 프랑스 칸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 로쉬디 젬이 캐스팅됐다.
뒤사팽 작가는 이번에 한국을 찾아 소설 주인공 ‘나’이자 본인의 이름을 딴 배역인 ‘수아(Shua)’ 역의 배우 벨라 킴을 만났다. 세계적 문학상 수상에 이어 상상한 인물이 육화(肉化)되는 영화까지 안았으니 꿈같은 일의 연속이다.
뒤사팽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호응을 얻는 이유로 현 시대를 대변하는 주제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한다. “제 소설의 핵심이기도 한 정체성의 문제, 한국에 대한 국제적 관심, 여성들의 사회적 위치라는 문제를 거론할 때 제가 그 범주에 속하는 젊은 여성이란 사실이 국제적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는 전미도서상이 가진 유명세보다 ‘속초에서의 겨울’이 전미도서상 번역 부문 수상작이란 점을 귀히 여긴다. “모두가 같은 문화권이 아니고, 심지어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도 않으니까요. 번역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전미도서상을 받는다는 건 제게 상징적이면서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제 책이 세계 도처의 독자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입니다.”
스위스의 한 문학연구소에서 학위를 취득하고 현재 스위스에 거주하는 그는 ‘속초에서의 겨울’에 이어 ‘파친코 구슬’ ‘블라디보스토크 서커스’를 썼고, 이제 막 네 번째 소설을 탈고했다. 그는 글쓰기를 ‘무형의 통로’로 정의한다.
“제게 글쓰기는 정체성의 문제 속에서 진화해가는 통로였던 것 같습니다. 멀리 나아갈 수 있다는 것, 이건 정말 흥분되는 일입니다. 이같은 자유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 또한 크나큰 행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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