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쇄 앞둔 옛 포항역 ‘빨간집’…성매매 탈출해도 불안한 미래

주성미 기자 2024. 10. 10.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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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포항 대흥동 성매매집결지
경북 포항시 북구 옛 포항역 인근 대흥동 성매매집결지 중 한 골목 바닥에 ‘청소년 통행 금지구역’이라고 적혀 있다. 주성미 기자

지난달 25일 저녁 7시께 경북 포항시 북구 대흥동의 한 골목. 흔한 간판 조명도 없이 어두운 길 어귀로 빨간 불빛이 새어나왔다. 가게 안이 훤히 보이는 유리문 너머로 한 여성이 벽에 비스듬히 세워진 전신 거울을 들여다봤다. 양손으로 머리칼을 쓸어넘기고 짙은 화장을 얹은 눈가를 한번 찡긋거렸다. 양손으로 짧은 바지춤을 끌어올린 그가 밖을 내다보며 소리쳤다. “커피 하나요!” 어두운 골목 끝에서 “알겠다”는 목소리만 흘러나왔다.

속칭 ‘유리방’으로 불리는 성매매업소가 밀집한 경북 포항시 북구 옛 포항역 인근 대흥동 성매매집결지. 주성미 기자

70여년째 그 자리, 대흥동의 그곳

150m 남짓한 골목 양쪽으로 줄지어 선 가게의 구조는 비슷했다. 2~3층짜리 건물에 유일하게 불이 켜진 1층은 속칭 ‘유리방’이라고 불릴 정도로 투명했다. 유리문은 가게 안팎을 차단하지 않았다. 닫힌 문은 오히려 안쪽의 무언가를 전시하는 듯했다. 유리문 안쪽의 의자들은 밖을 향했다. 밤을 향해 시간이 흐르자 여성들이 그 의자에 앉았다. 긴 파마머리 가발을 쓰고, 검은색 짧은 원피스에 프릴이 달린 흰 앞치마를 두른 이도 있었다. 대낮에는 커튼에 가려 보이지 않던 가게, 만나지 못한 이들이었다.

포항역 앞 ‘빨간집’이라고 불리던 대흥동 성매매집결지의 모습이다. 1950년 6·25 전쟁 직후 형성됐다고 알려진 이곳에는 한때 60여곳의 업소, 300명이 넘는 성매매 여성이 있었다. 2004년 ‘성매매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 시행 이후 점차 쇠락하다 상권이 변하면서 남은 집결지는 옛 포항역 인근, 속칭 중앙대, 우체국 등 세 구역으로 나눠졌다.

집결지는 쪼개졌지만 이곳의 성매매 업소 30여곳은 여전히 영업 중이다. 전국적으로 성매매집결지가 잇따라 폐쇄되자 일부 업소들이 남은 집결지로 몰려드는 ‘풍선 효과’도 있었다. 실제 경남 창원에서 영업하던 업주는 2021년 말 창원 마산합포구 서성동 집결지가 폐쇄되자 여성들을 데리고 포항 대흥동에 자리를 잡았다. 반성매매 활동가들은 현장상담(아웃리치)을 통해 하루 평균 성매매 여성 30여명을 만나는데, 포주나 속칭 ‘나까이’라고 불리는 호객꾼의 훼방으로 얼굴조차 보기 힘든 여성까지 고려하면 80여명일 것으로 추정한다.

70년 넘게 성매매집결지였던 대흥동 주변은 개발 바람이 불고 있다. 2015년 포항역이 지금의 북구 흥해읍으로 옮기고, 2021년 옛 포항역마저 완전 폐쇄되면서다. 철도부지 일대가 도시개발사업으로 떠오르며 신세계건설이 70층 규모 주상복합 건물을 짓기로 했고, 공원과 복합문화공간 등을 조성하는 청사진이 나왔다. 주변 환경이 변하면 집결지도 자연스럽게 폐쇄될 거란 기대가 있다.

지난 8월 경북 포항시 북구 옛 포항역 인근 대흥동 성매매집결지에 문을 연 현장시청 ‘빛나길 센터’. 주성미 기자

재개발에 밀리면 이젠 어디로 가나

집결지 폐쇄는 물리적인 공간 의미에서는 도시개발사업과 맞닿아 있다. 우리나라 1호 집결지인 부산 서구 완월동, 경기도 파주시 용주골과 평택시 삼리 일대는 재개발사업이 추진되면서 집결지 폐쇄 절차를 밟고 있다. 전북 전주시는 문화재생사업을 통해 선미촌을 2022년 폐쇄했고, 강원도 원주시 희매촌은 도시재생사업이 진행 중이다.

대흥동 집결지 일대도 가로주택정비사업이 논의 중이다. 영업도 하지 않으면서 업소 문을 열어둔 80대 업주는 ‘보상’을 기다리며 버티는 중이다. 그는 “보증금 몇백짜리 가게가 전부인데, 차라리 보상금이라도 받게 개발이나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집결지 폐쇄’라는 풍문은 개발 바람을 타고 여기저기서 흘러나온다. 집결지에 남은 이들은 미래가 불안하다. 집결지에서 만난 60대 여성 ㄱ씨는 “10여년 전 지옥 같았던 이곳을 벗어났지만 사업이 망해 빚만 잔뜩 떠안고 돌아왔다”고 했다. 그는 “(집결지 폐쇄 계획을) 듣긴 했지만, 이 짓(성매매)을 그만두면 배운 것도 없고, 할 수 있는 일도 없는데 무슨 일을 하면서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다”며 “한달에 몇십만원 주는 공공일자리 같은 걸로는 빚을 갚기도, 먹고사는 것도 힘들다”고 말했다.

포항시는 성매매집결지 대책을 마련하고 성매매 여성 등과 소통하기 위해 지난 8월 대흥동 집결지에 현장시청 ‘빛나길 센터’를 열었다. 더는 영업하지 않는 성매매 업소를 임대한 이곳에는 시간제 인력 2명이 상주하고 포항시 공무원이 탄력적으로 근무한다. 집결지 정비가 본격화하면 이곳은 거점 역할을 한다.

집결지 폐쇄 맞춰 성매매 여성 지원을

성매매집결지 폐쇄 논의를 위한 첫발은 뗀 셈이지만, 폐쇄 이후 탈성매매 여성들의 안정적인 삶을 위해선 좀 더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첫걸음은 ‘탈성매매 여성 지원 조례’ 제정이다. 현재 전국의 17개 광역·기초지방자치단체에는 탈성매매 여성의 재활과 자립을 지원하는 조례가 있다. 대부분 매달 100만원의 생계비, 30만원의 직업훈련비를 최대 1년 동안 지원한다. 월세 등 주거지원비는 연간 600만~700만원 수준이다.

경기도 파주시는 지난해 5월9일 조례를 제정하면서 지원 기간을 최대 2년으로 정했으나, 올해 말까지 한시적으로 시행 중이다. 서울 영등포구는 2019년 12월 조례를 제정했지만, 시행규칙은 만들지 않았다. 2017년 11월 조례를 만든 서울 성북구도 조례를 근거로 한 지원은 없다고 밝혔다. 대전시는 재정 악화로 지난해부터 예산을 확보하지 못했고, 전남 여수시는 지원자가 없다는 이유로 사업을 하지 못했다. 2021년 10월 수원·성남·평택을 보조 지원한 경기도는 대상자들의 자활 준비 미흡, 실적 부진 등을 이유로 2022년 12월 종료했다.

대구 자갈마당 집결지 폐쇄를 지원했던 정박은자 대구여성인권센터 사업감사는 “집결지마다 대상자의 평균 연령대, 성매매 지속 기간 등 여건이 다른 만큼 획일적인 지원 조례보다 맞춤형 조례가 필요하다”며 “생계비 등 지원뿐만 아니라 자활지원센터와 같은 기반시설도 뒷받침돼야 탈성매매를 더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집결지 폐쇄 이후 집결지의 역사를 어떻게 남길지도 숙제다. 전주시는 선미촌 집결지를 정비하면서 “그늘진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기 바란다”며 ‘정원의 숲’을 조성한 바 있다. 탈성매매 뒤 반성매매 활동가가 된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 저자 봄날(활동명)은 포항에서 열린 자신의 북콘서트에서 “집결지가 폐쇄되고 흔적도 없이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것을 보면서 나의 과거도 없어지는 것만 같아 허무했다. 꿈에 나올까 겁이 나는 곳이었지만, 이제는 여성들이 편하게 쉴 수 있는 곳으로,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곳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주성미 기자 smood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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