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박진명
사진 김윤경
[1] 하이킹 Hiking
도시가 숨 쉴 수 있는 이유를 찾아서
세계에서 4번째로 높은 인구 밀도, 코 앞에 있는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고 해안을 따라 촘촘히 세운 고층 빌딩, 밤새도록 조명이 꺼지지 않는 명품 브랜드 매장. 홍콩을 떠올리면 곧장 생각나는 이미지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는지 고민하다 ‘도시 면적의 70퍼센트가 녹지 공간’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홍콩의 녹지 면적 중 40퍼센트는 공원에 해당하는데, 이는 건물 밀집 지역에서도 차로 10분 정도만 이동하면 울창한 숲을 만날 확률이 높다는 의미다. 그곳에서 즐길 수 있는 아웃도어 액티비티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된다.
화려한 쇼핑몰과 마천루가 줄줄이 늘어선 코즈웨이 베이(Causeway Bay)의 센트럴역에서 홍콩을 상징하는 빨간 택시를 잡아 탄다. 차창 밖 풍경을 구경한 지 5분이 지났을까. 오래된 택시는 주거 지역의 비탈길을 힘겹게 올라 브래마 힐(Braemar Hill)에 도착한다. 왕복 1시간의 가벼운 하이킹을 즐기고 일몰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트레일 주변은 사람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은 듯 제멋대로 뿌리내린 나무에 휩싸여 있다. 투박하게 이어진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원시림 사이로 건물이 슬며시 보이기 시작한다. 첫 번째 전망대에 이르렀다는 신호다. 센트럴의 스카이라인과 홍콩의 랜드마크 빅토리아 하버(Victoria Habour) 너머 구룡반도가 발밑에 펼쳐진다. 이 지점에서 보는 전망도 훌륭하지만 조금 더 높이 올라가면 홍콩을 360도로 조망할 수 있다. 좁은 숲길을 지나 암벽을 오르는 구간(길이 위험하므로 등산화는 필수)에서는 약간의 용기가 필요하다. 등산화 끈을 동여매고 두 팔까지 동원해 전망대에 다다른다. 도심에서는 빌딩숲에 가려 보이지 않던 홍콩의 산등성이가 이제야 보인다.
어느덧 하늘은 어두워지고 도시는 이내 별천지가 된다. 밤이 어두울 틈을 주지 않는 홍콩의 인공조명을 바라보고 있자니, 아이러니하게도 거리 위 나무 한 그루도 헛되이 여기지 않는 홍콩 사람들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2016년 홍콩 정부가 안전을 이유로 본햄 로드(Bonham Road)의 나무 네 그루를 베어버렸다가 환경운동가와 식물 전문가는 물론 주민들에게 엄청난 질타를 받은 사건 말이다. 이곳 사람들은 시야를 방해한다거나 건물을 지어야 한다는 이유로 나무를 함부로 베지 않는다. 실제로 홍콩에서는 나무를 그대로 보존한 채 세운 버스정류장, 나무뿌리가 휘감은 건물의 벽면 등을 수시로 마주칠 수 있다. 고밀도 도시의 삶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건 자연을 소중히 대하는 사려 깊은 태도가 아닐런지. 조명 하나 없는 어둡고 고요한 숲을 가로질러 다시 환하게 불 밝힌 도심으로 향한다.
[2] 도심 러닝 City Running
*험프 데이, 런 데이!
약 150년 동안 영국의 식민 통치를 받다 1997년 중국에 반환된 홍콩에는 여러 영국식 유산이 남아 있다. 5만 4,000명을 수용하는 홍콩 최대 규모의 경마장 해피 밸리(Happy Valley)도 그중 하나. 1845년, 당시 홍콩에 거주하던 영국인에게 오락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지은 곳이다. 오늘날에도 9~7월 사이 이곳에서 경마 경기가 열리는데, 수요일 밤 경기 규모가 가장 크다고. 하지만 모든 이가 경마 배팅을 위해 해피 밸리를 찾는 건 아니다.
수요일 밤, 해피 밸리에 들어서자 경마 트랙 위에서 홍콩 사람들이 여가 시간을 즐기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다. 레이스가 없는 날이면 이곳은 드넓은 운동장이 된다. 너른 잔디밭을 나눠 골대를 세우고 공을 차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보인다. 러닝 크루 하버 러너스도 몸의 열을 올리고 근육을 늘리며 달릴 준비에 한창이다. 하버 러너스는 홍콩 시내를 달리며 활기찬 홍콩을 탐험하고 러닝의 즐거움을 알리고 싶은 사람들로 구성된 커뮤니티다. 2010년부터 몇몇 디자이너와 크리에이터가 스트레스 해소를 목적으로 달리기 시작해 지금은 다양한 분야의 종사자들로 구성된 커뮤니티 기반의 달리기 모임으로 발전했다.
* Hump day, Run day. 홍콩 러닝 크루 하버 러너스의 슬로건. ‘Hump day’는 한 주의 중간인 수요일을 언덕에 빗댄 표현으로 달리기를 통해 한 주의 중턱을 넘었다는 뜻이다.
태풍경보 3호가 발효된 상황에도 30여 명의 러너가 모였다. 오늘의 코스는 해피 밸리에서 출발해 빅토리아 하버, 소고 백화점을 거쳐 다시 해피 밸리로 돌아오는 총 6킬로미터의 여정. 코스는 매주 달라진다. 하버 러너스는 화려한 등불이 아름다운 웡타이신 사원(Wong Tai Sin Temple), 사바나 예술 대학(Savannah Colledge of Art and Design) 홍콩 캠퍼스로 사용하던 옛 북구룡 지방법원, 트램이 시장 안을 가로지르는 진풍경으로 유명한 춘영 거리(Chun Yeung Street) 등 이 도시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간다.
해피 밸리를 빠져나오자 ‘도시는 우리의 놀이터(City is our playground)’라는 하버 러너스의 지향점처럼 도심 곳곳이 러닝 트랙으로 변신한다. 러너들은 빛나는 네온사인 아래 건물 틈을 비집고 날쌔게 달리며 도시 거리에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홍콩의 스카이라인이 펼쳐진 항구와 삶의 족적이 가득한 지하철역을 달리는 동안 구석구석의 분위기와 매력에 매료된다. 홍콩의 숨은 야경 스폿을 찾아 달리고 싶다면 언제든 하버 러너스의 문을 두드려보자. 별도의 참가 신청 없이 매주 월요일 SNS로 공지하는 러닝 일정에 맞춰 참여하기만 하면 된다.
[3] 요가 Yoga
상념이 지나간 자리
서구룡 문화 지구(West Kowloon Cultural District)에는 다양한 목적을 가진 이들이 모여든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미술관과 공연장을 찾고, 카페와 레스토랑에 가고, 공원에서 시간을 보낸다. 어쩌면 1998년 홍콩 정부가 서구룡 문화 지구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상상한 광경이 바로 이와 같지 않을까. 홍콩 정부는 아시아의 문화·예술 시장을 이끌어 가겠다는 포부로 중국 본토와 연결된 40만 제곱미터 규모의 간척지를 조성했다. 그 결과 중국 전통극을 소개하는 시취 센터(Xiqu Centre)와 중국의 귀중한 보물을 소장한 고궁 박물관, 현대 예술을 위한 공연장 프리스페이스(Freespace), 아시아 현대 비주얼 컬처 박물관 엠플러스(M+) 등 과거와 현재, 미래의 유산을 총망라하는 예술 지구가 탄생한 것. 카페와 레스토랑, 쇼핑몰, 공원도 함께 자리해 문화 · 예술과 여가 활동을 위한 최적의 동선을 제안한다.
상업 시설이 문을 열기 전, 이른 아침부터 아트 파크(Art Park)에는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 이들로 분주하다. 산책로를 따라 달리는 사람들, 놀이 체육 프로그램에 몰입한 아이들을 차례로 스쳐 지난다. 샨티 아웃도어 요가(Shanthi Outdoor Yoga)의 수업도 이곳에서 열린다. 샨티 아웃도어 요가는 서구룡 문화 지구를 포함해 타마르 공원(Tamar Park), 쿤통 산책로(Kwun Tong Promenade) 등에서 일요일(오후 수업 진행)을 제외한 매일 아침 수련을 이끄는 요가 스튜디오다. 샨티 아웃도어 요가의 운영자 헬렌 취안(Helen Tsang)의 말에 따르면 홍콩 최초로 정기적인 아웃도어 요가 클래스를 진행하고 있다고. 동생 캐서린(Catherine)과 함께 투엔문(Tuen Mun)에서 요가원을 운영하는 그녀는 자연 속에서 몸을 움직이는 것이 수련에 더욱 효과적이라는 것을 직접 경험하고 야외 요가 전문 강사를 수소문했다. 현재 총 8명의 강사가 참여해 다양한 스타일의 야외 요가 수업을 선보인다.
오늘의 수업은 하타 요가(Hatha Yoga, 한 동작을 긴 호흡으로 길게 유지하는 요가 수련의 종류). 요가 강사 헤이 석(Hei Shek)의 음성에 따라 참가자들이 몸을 움직인다. 촉촉하게 젖은 잔디밭에서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린다. 맨땅에서 맨발로 균형을 잡기란 생각만큼 쉽지 않다. 고대 요가의 이론과 실천을 다룬 경전 〈요가 수트라〉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요가란 의식에서 일어나는 동요를 진정시키는 것이다.’ 쉼 없이 떠도는 상념을 통제하기 위해 눈을 감는다. 건너편 마천루와 빅토리아 하버의 풍경이 머릿속에 더욱더 또렷해지면서 홍콩이란 도시가 서서히 내 몸에 각인되고 있음을 실감한다.
[4] 아웃도어 숍 Outdoor Shop
홍콩 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아웃도어 여행을 시작하기 전 장비 쇼핑을 하고 싶다면 몽콕 (Mongkok)을 추천한다. 구룡 중심부에 자리한 몽콕은 홍콩에서 가장 활기찬 지역 중 하나로, 골목마다 꽃시장부터 레이디스 마켓, 금붕어 시장, 야시장까지 온갖 시장이 자리해 하나의 거대한 단지를 이룬다. 스포츠 · 아웃도어 브랜드 매장이 즐비한 골목도 있어 한정판 운동화나 희귀 아이템을 사수하기 위한 행렬을 마주할 수 있다.
몽콕역에서 내려 미로처럼 얽힌 골목 중 파윤 스트리트(Fa Yun Street)라고 쓰인 표지판을 찾는다. 수많은 글로벌 브랜드 매장을 지나 낡은 건물이 다닥다닥 늘어선 골목을 통과한다. 2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아웃도어 편집숍 엑스마크만큼이나 오래된 건물 4층에 오른다. “임대료가 저렴한 곳을 찾다 보니 접근성이 그리 좋지 않아요.”라며 앳된 얼굴의 매장 매니저 베티 웡(Betty Wong)이 반가운 얼굴로 맞는다. 엑스마크는 한국, 일본, 미국 등 유명 아웃도어 브랜드의 울트라 라이트 하이킹 제품을 큐레이팅해 판매한다. 홍콩의 산 대부분이 차로 접근하기 어렵고, 주거 공간도 협소하기 때문에 간단하고 가벼운 장비로 즐길 수 있는 울트라 라이트 백패킹이 대세로 자리 잡았다고.
이곳을 찾은 가장 큰 이유는 엑스마크에서 론칭한 아웃도어 브랜드 캄 디자인(Kam Design)의 티타늄 제품을 보기 위해서다. 베티가 커틀러리, 타프, 텐트, 배낭 등의 다양한 제품 중 손바닥 만한 크기의 냄비를 건네며 장난기 어린 얼굴로 용도를 맞혀보라고 한다. “짠, 이건 딤섬만을 위한 찜기예요.” 힘들게 오른 산 정상에서도 따끈한 딤섬을 맛있게 먹겠다는 의지와 얌차(飮茶, 광동어로 ‘차를 마시다’라는 의미. 서양 문화의 커피와 토스트처럼 차와 딤섬을 먹는 홍콩만의 간단한 식사 문화를 일컫는다) 문화에 대한 애정이 엿보인다. 홍콩의 문화와 삶에서 본질을 찾는 캄 디자인의 제품은 조만간 온라인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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