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루머의 시장, HBM

지난해 SNS를 경영 무기 삼아 글로벌 시장을 쥐락펴락하는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최고경영자)가 던진 한 줄의 글이 한국 증시를 흔들었다. 삼성전자가 테슬라의 인공지능(AI) 칩 'AI6' 위탁생산(파운드리)을 맡게 된다는 내용이 골자였다.

전날 같은 내용을 공시했던 삼성전자와 이를 바라봤던 국내 투자자들은 황당할 수 밖에 없었다. 약 23조에 달하는 파운드리 계약이 성사됐음에도 정작 고객사가 어디인지는 공개할 수도, 알 수도 없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계약 당사자가 스스로 밝혔기 때문이다.

특히 국내 주식시장 투자자들은 분노했다. 공시 상에선 삼성이 계약 조건상 고객사를 공개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고 시장에서는 수주처를 두고 다양한 추측이 제기됐지만 확정된 정보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증권사들도 앞다퉈 삼성 파운드리와 계약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복수의 고객사를 꼽는 리포트를 쏟아내며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러다 머스크의 SNS 글이 올라오자 난무했던 추정은 단번에 사실로 굳어졌다. 한국 대표 기업의 대형 수주가 국내 공시가 아니라 해외 CEO의 계정에서 최종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AI 시대 가장 핫한 아이템으로 떠오른 HBM(고대역폭메모리)을 둘러싼 최근 풍경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엔비디아의 퀄 테스트(품질 검증) 통과 여부, 구체적 물량과 공급 일정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실적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지만 기업이 공식적으로 확인해주는 정보는 사실상 전무한 상황이다.

역시나 고객사와의 '비밀 유지 계약(NDA)'이 그 이유다. "확인해 줄 수 없다"는 답변이 반복되는 사이 시장에는 전망과 전언이 쏟아진다. 공식 정보가 줄어든 자리를 비공식 정보가 메우는 구조가 이미 만연하다.

문제는 이 기업들이 한국 증시의 '국민주'라는 점이다. 개인 투자자는 물론이고 국민연금도 대규모로 보유하고 있고 지수 비중 역시 절대적이다. 이들의 핵심 사업에 대한 정보가 이미 구조적으로 확인 불가능한 영역으로 굳어졌는데 가격은 무엇을 근거로 형성되는지 미지수일 뿐이다. 반도체가 전략 산업이라는 이유로 침묵이 늘어날수록 시장은 '추정'과 '가능성'에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다. 루머는 급등을 만들고, 또 다른 루머는 급락을 만든다.

최근 한미반도체가 고객 요청으로 장비 공급 관련 자율공시를 중단한 사례 또한 이런 흐름의 연장선에 있다. 장비 반입만으로도 HBM 같은 전략 제품의 생산 능력과 일정이 역산될 수 있다는 이유로 정보는 또 한번 차단된다.

반도체 공급망 전반에서 정보 차단은 점점 전략이 되고 있다. 더 나아가 계약을 여러 차례로 나눠 체결해 의무 공시 기준을 피하는 이른바 '쪼개기 계약'까지 이제는 당연한 관례가 된 분위기다. 형식적으로는 제도 범위 안에 있을지 몰라도 시장이 체감하는 정보의 투명성은 낮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반도체는 글로벌 빅테크와 직결된 전략 산업이다. 대형 고객과의 계약에는 강력한 비밀 유지 조항이 따르고 공급사는 이를 거스를 수 없다. 일정 수준의 비공개는 구조적으로 불가피하다.

문제는 그 여파가 결국 누구에게 돌아가느냐다. 중요한 정보는 고객사 손에 있고 국내 기업은 고객사 입만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엔 없다. 그 사이에서 투자자는 확인되지 않은 전망과 추정을 근거로 투자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해외 CEO의 SNS 한 줄이 그 불확실성을 정리해주는 일이 반복된다면 시장은 기업이 제공하는 공식 정보가 아니라 외부 발언에 더 크게 반응하는 구조로 굳어질 수 있다.

HBM이 AI시대 전략물자이자 핵심 투자자산으로 자리를 공고히 하면서 이제 더이상 기술 경쟁만이 아니라 정보 경쟁의 무대가 됐다. 정보 격차가 투자자들의 수익률을 가르는 환경이 고착된다면 한국 반도체 산업의 변동성은 상수가 된다. '을(乙)'의 산업이라는 이유로 정보가 닫히는 순간, 그 공백은 루머가 채운다.

'루머의 시장'이 된 HBM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지 않다. 한국 경제는 HBM을 중심으로 한 반도체 산업으로 도약하고 있지만, 정작 그 성과를 반영해야 할 한국 주식시장은 확인되지 않은 정보에 더 크게 흔들리는 구조로 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때다. 산업은 성장하는데 시장의 신뢰는 약해진다면 그것이 또 다른 리스크로 돌아올 수 있다.

장소희 미래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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