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가 아닌 ‘NA’… 중독자가 돕는 마약자조모임 [당신의 병명은 마약 중독·(4-3)]
안녕하세요 중독자 OO입니다
안녕하세요
성별도, 나이도 제각각인 30여명의 사람들이 긴 책상에 둥그렇게 둘러앉아 인사를 나눴다. 이름 대신, ‘닉네임’으로 나를 소개하면,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반갑게 인사했다.
지난달 13일 늦은 오후, 서울시 영등포에 위치한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를 찾았다. 이 날은 마약중독자들이 매주 모여 자조모임 ‘NA’를 하는 날이다. 취재를 위해 참관을 허락하는 조건으로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가만히 있겠다’는 약속을 한 터였다. 마약에 중독된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으니, 어떤 사람들일까 궁금하면서 살짝 긴장도 됐다. 약속시간이 다 되자 하나둘 사람들이 모였다. 구면인듯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이들도 있고, 몇몇은 어색한 듯 긴장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평범했다. 마약중독을 치료하는 중이라고 밝히지 않는다면 직장에서, 학교에서, 길거리에서 보는 평범한 이웃의 모습이었다.
사회자가 모임의 시작을 알리자 가장 먼저 ‘왜 우리가 이 모임에 왔는지’를 묵상하는 시간이 시작됐다. 모두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생각이 끝나면, “나는 마약중독자임을 인정한다”로 시작하는 NA 12단계 프로그램을 한명씩 낭독한다. 이 프로그램은 일종의 마약중독 치료를 위한 주기도문이다. 치료를 위해 중독자들이 항상 명심하고 지켜야 하는 일종의 규칙이다.
미국서 시작된 마약중독자 자조모임 ‘NA’
한국에서는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돼
서로의 극복 경험 교류하며 회복 의지 다져
단약 관리하도록 감시… 사회 징검다리 역할
낭독이 끝나고 나면, 각자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자유롭게 꺼내놓는다. 모두가 마약중독을 겪었고 극복하는 과정에 놓여 있으니, 그 마음을 서로 이해할 것이라는 바탕에서 출발한다. 말하지 않는 것 역시 자유다. 가만히 듣고 있어도 괜찮다.
이곳에서 나온 이야기들은 모임이 끝나는 동시에 ‘비밀’로 부쳐진다. NA 모임의 규칙인데, 그래야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어서다.
“주약물은 필로폰이고요, 10여년 동안 (수사망에) 안걸렸는데, 살기 위해 자수했습니다”
“6개월만에 모임에 참석했어요. 이직하고 바쁘게 지냈는데 이전에 마약을 하던 시절 알고 지냈던 친구가 교도소에 잡혀들어갔다는 소식이 들려 기분이 이상하더라고요. 마음을 다잡고자 오랜만에 모임에 왔습니다”
“오늘 출소하자마자 NA 모임을 찾았습니다”
“며칠 후에 선고재판이 있어 다음주 NA 모임엔 참석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사연은 다양했지만, 서로의 고백에 진심어린 박수갈채를 보냈다. 마약중독의 굴레 속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는 걸 잘 알기에, 서로에게 보내는 공감과 응원이다.
서울 영등포에 위치한 마약퇴치운동본부
매주 모이는 자조모임 ‘NA’ 찾아가보니
‘왜 우리가 이 모임 왔는지’ 묵상으로 시작
낭독 끝나면 자유롭게 이야기 하는 시간
NA는 미국에서 시작된 마약중독자 자조모임으로, 한국에선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됐다. 현재 한국에서 진행되는 정기 모임은 18개로, 온라인 모임·영어 모임·성소수자 모임 등 형태는 다양하다.
NA는 마약중독자들이 사회에 정착하기 위해 없어선 안되는 징검다리다. 이곳에서 중독자들은 서로의 경험을 교류하며 회복 의지를 다진다. 매주 NA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일주일을 참는 것 만으로 단약을 관리할 수 있어서다.
청소년 시절부터 투약하기 시작한 마약을 50세가 넘을 때까지 끊지 못하고 교도소를 드나들었던 김재현(가명)씨는 처음엔 NA 모임에 나오라는 권유를 받고 코웃음을 쳤다. 수십년을 마약범죄에 길들여진 그의 입장에서 NA 모임은 ‘마약 처음하는 사람들이나 가는 모임’정도로 여겼다. 그랬던 그는 이제 NA모임만을 바라보고 살고 있다.
“NA 모임하며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행복을 알게 됐어요. NA에서 친해진 사람들과 같이 저녁먹고 서로 치료하는 이야기도 나누는 게, 그게 참 소소하지만 행복으로 다가오더라구요. 이전엔 계속 교도소에 들어갔다 나오길 반복했는데, 처음으로 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사회에 나와있어요. 다 NA 모임 덕분입니다.”
재현씨는 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마약중독자들에게 길잡이가 돼주고 싶어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다. 지금은 한 대학교의 사회복지과 입학을 앞두고 있다. 그는 자신이 단약을 위해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중독자들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사는게 목표다.
자조모임은 회복의지가 있는 마약중독자들이 사회를 향해 한 발씩 내딛을 수 있도록 돕는 건널목이다.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갈망에 대비해 마약중독자들이 단약을 잘 관리할 수 있도록 감시하는 역할이다.
이는 NA 모임이 지금보다 많아져야 하는 이유다. 그러나 NA 모임은 현재 서울, 인천, 부산, 대구 등 전국 대도시 중심으로만 운영되고 있어 모임에 참여하고 싶어도 참여기회가 적다. 심지어 지난해 기준 전국 마약사범이 가장 많이 적발된 경기도엔 자조모임이 한 곳도 없는 실정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 산하 공공기관인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가 NA 모임을 진행하게 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는 당초 마약 예방 목적으로 세워진 기관이지만, 최근엔 NA 모임과 같은 마약중독 재활에 집중하며 프로그램을 늘려나가고 있다.
서울·인천·부산·대구 등 대도시 중심 운영
마약사범 가장 많은 경기도엔 한 곳도 없어
박영덕 센터장, 단약 위한 유기적 시스템 강조
“중독자 출신 회복가 양성… 이상적인 모델”
박영덕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 센터장은 마약중독자가 단약을 이어가기 위해선 치료·재활·자조모임 모두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유기적인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치료기관은 갈망이 계속되고 재발하는 사람이 가야되고, 재활센터는 사회복귀를 위한 훈련장소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리고 자조모임인 NA는 중독 증상이나 경험을 고백하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어보면서 공감하는 곳이죠. 12단계를 따라가면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사실 박영덕 센터장 또한 청소년 시절부터 20여년간 마약을 끊지 못했던 중독자였다. 그는 정신병원에 10번도 넘게 입원했을 정도로 단약과 재발을 반복했다. 마약을 끊고 싶었지만 끊지 못했던 시절, 상담받을 곳이 한 곳도 없어 괴로웠던 기억을 되새기며 지금은 중독자들의 단약을 돕고 지원한다. 누구보다 마약중독자들의 고통을 잘 알기 때문이다.
“마약중독자들이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마약을 접했을지라도, 결국엔 희망이 없어서 마약을 끊지 못하는 거예요. 물론 정부가 마약 치료·재활 예산을 점차 늘리는 등 인식을 바꾸려고는 하고 있습니다. 다만, 마약중독자들이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시스템을 제대로 만들어놓는게 중요한데, 지금은 하나도 없어요. 그래도 정부가 전국에 마약류 중독재활센터 17개를 설치하겠다는 구상을 하고 있습니다. 센터가 제대로 잘 운영되려면, 저와 같이 각 센터에서 마약중독자 출신 회복가를 양성해서 관리하고 교육하는 게 이상적인 모델입니다”
/이영지·공지영·이시은기자 bbangzi@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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