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금 2돈 걸린 마을 최대 잔치 '면체'를 아시나요

면민 체육대회를 앞두고 장기자랑 연습에 한창인 모습. /박수진

2024년 4월 27일 토요일, 날씨 최고로 맑음.

상주한려해상체육공원에서 제15회 상주면 체육대회 및 화합 한마당 행사가 있었다. 자영업자라면 한창 바빠야 마땅한 토요일 오후에, 그것도 상주면에 살고 있지도 않은 내가 왜 체육대회(이하 전문용어로 '면체'라 한다)에 갔느냐고 물으신다면… 할 말이 너무 많은데 어디서부터 해야 할까.

그러니까 3월부터 두모마을에 있는 팜프라에 출근하고 있다. 팜프라는 판타지 촌 라이프를 꿈꾸는 이에게 필요한 인프라를 만드는 청년 기업이다. 시골살이를 경험해 보는 스테이 숙소, 촌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만드는 목공 작업장, 직접 만든 제품을 판매하는 스토어 겸 코워킹 라운지가 모여있다. 작년에 팜프라 친구들과 남해 로컬아트북페어 '남쪽바다책잔치'와 도시재생 화전플리마켓 '남해섬 둥둥마켓'을 함께 기획하고 운영하였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친구로서뿐만 아니라 동료로서 일을 할 때도 결이 잘 맞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올해에는 본격적으로 멤버로 합류한 것.

8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회사 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지, 책방과 겸업하는 게 무리가 되지는 않을지. 이런저런 걱정이 많았으나 기우였다. 어느 쪽으로든 고개를 돌리기만 하면 사방에 펼쳐지는 초록색 산과 들, 격무에 노고가 한 톨이라도 쌓일라치면 조르르 달려와 무릎 위로 올라앉는 낑깡이와 절미(팜프라 영업팀 소속 고양이), 아주 오래 함께 일한 것처럼 손발이 착착 맞는 멤버들까지. 그야말로 최고의 업무 환경이었다.

내가 근무하는 도모마을 팜프라 촌. /박수진

이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한 주의 루틴은 이렇다. 우선 수·목 평일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풀타임 근무한다. 책방을 열어야 하는 금·토·일요일에는 2시까지 근무 후 3시에 책방으로 출근한다. 월·화요일은 쉬는 날이지만 게으름 부리긴 어렵다. 기고 준비와 여름에 출간 예정인 책 원고 작업에, 밀린 집안일들, 간간이 들어오는 밭일이나 식당 품앗이 아르바이트까지 다녀오면 휴일이 순식간에 가버린다. 덕분에 남해에 온 이래로 가장 바쁜 날들을 매일 경신하며 보내고 있다. (혹시 이게 바로 요즘 친구들이 말하는 갓생일까…?)

하여간 그러한 연유로 면체에 가게 되었다. 두모의 온갖 대소사를 책임지며 10년 넘게 공직을 수행 중이신 손대한 이장님과 강미라 사무장님이 "(두모에 안 살아도) 두모에 출근하는 사람까지 두모마을 주민이다!"라고 하시는데, 말씀에 따를 수밖에. 초등학교 명랑운동회처럼 즐겁고 가뿐하게 진행될 줄로 예상했던 면체 준비는 생각보다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다. 우선 면체 7일 전, 계주 선수를 뽑는 선발전이 있었다. 팜프라 멤버인 오린지, 손유정과 사무장님이 100m 달리기로 겨루어 린지가 최종 선수로 선발되었다.

면체 3일 전. 체육 경기보다 더 중요한 마을별 한마음 노래자랑이 남아있었다. 가수(사무장님)와 노래(박상철 - 노래방)는 정해졌는데, 백댄서가 필요했다. 면체 당일 노래자랑 때 나는 책방에 있을 시간이라, 너무 아쉽지(않고 다행이지)만 린지, 유정만 백댄서로 함께하기로 했다. 사무장님은 연습도 실전처럼 해야 한다며 의상까지 바리바리 싸 오셨다.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벼락치기로 안무를 짰다. 적당히 쉽고, 가사와도 잘 어울리는 동작을 고안해 반복 연습했다. 나는 옆에서 동영상 촬영을 하고, 춤을 따라 춰보기도 하며 합이 덜 맞는 부분에 의견을 보탰다. 이때는 알지 못했다, 곧 닥쳐올 시련을….

면민 체육대회 2인 3각 달리기 모습. /박수진

면체 하루 전. 마을회관 앞을 지나는데 어르신들이 모여 투호, 제기차기 등 체육 경기 총연습을 하고 계셨다. 계주 선수들은 무엇보다도 몸뻬(일바지)를 빠르게 입고 벗는 데 집중해서 연습했다고 한다. 알고 보니 바통 터치 방식이 몸뻬를 벗어서 넘겨주는 것이었다. 뭐야 이거, 너무 재밌고 귀엽잖아…! 하루 앞으로 다가온 면체가 부쩍 기대되었다.

드디어 면체날. 린지는 오전 9시부터 면체 준비를 하러 가고, 나와 유정은 스테이 청소를 빠르게 끝내고서 상주로 넘어갔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운동장 주변이 차로 꽉꽉 채워져 있었다. 직사각형의 운동장에 들어서자 중앙에 설치된 무대 앞에 '순금 2돈'이라는 피켓이 가장 먼저 보였다. 아니 요새 금값이 얼마인데, 금을 준다고…?! 순금뿐만이 아니었다. 그 옆에 TV, 냉장고, 세탁기 등 다양한 경품 피켓도 줄줄이 놓여 있었는데, 아쉽게도 나는 지각을 해서 응모함에 이름을 적어넣지 못했다.

운동장 양쪽에는 벽련, 두모, 소량, 대량, 금전, 금양, 상주, 임촌, 금포, 총 9개의 마을 부스가 나란히 마련되어 있었다. 두모마을은 오른쪽 끝에서 두 번째 부스였는데, 마을 주민 모두가 쨍한 하늘색 조끼와 모자를 맞춰 입고 있어서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이날만큼은 온 동네 어르신들이 다 모인 듯했다. 아직 낯이 익지 않은 분들이 더 많은데도 왠지 모르게 반가웠다.

면민 체육대회 하이라이트인 장기자랑. /박수진

"안녕하세요! 저희 왔어요!!"

"오냐, 아가들. 얼른 와서 밥 먹어라."

서른 중반이 되었어도 어르신들께 우리는 그저 아가들. 50명 넘게 모인 어르신들께 평소보다 크게 인사를 드리고 자리를 잡았다. 오늘 점심은 출장 뷔페! 금강산도 식후경이니 밥부터 든든히 먹어둔다. 윷놀이, 제기차기, 투호 등 전통 놀이 경기는 이미 다 치러진 후였고, 하이라이트인 이인삼각과 계주는 시작 전이었다.

그런데 약간의 차질이 생겼다. 아침부터 전투적으로 임한 린지가 더위와 급체가 겹쳐 도저히 경기에 나갈 수 없는 상황이 된 것. 주말이라 문을 여는 병원도 없어 일단 집으로 보내고, 급하게 대체 선수를 구하고 나니 단 하나의 빈자리만이 남았다. 바로 노.래.자.랑. 백.댄.서. 부정하고 싶은 이 상황은 뭐지. 마치 나를 위해 기가 막히게 짜인 것만 같은 이 상황. 옆에서 구경하며 동작도 얼추 다 외웠으니 너밖에 할 사람이 없다는 사무장님의 말씀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면민 체육대회에서 환호하는 마을 주민들. /박수진

갑작스럽게 바뀐 상황에 당황하고 있다가 이인삼각 경기가 시작되었다. '두모'를 연호하며 열심히 소리를 지르면서도 머릿속은 온통 노래자랑뿐이었다. 이장님과 사무장님이 환상의 호흡을 보여주신 덕에 두모가 역전승을 했다. 노래자랑 어떡하지. 곧이어 계주 경기도 펼쳐졌다. 바통 터치도, 달리기도 압도적으로 빨랐던 우리 팀 마지막 주자 덕분에 계주도 1등을 했다. 목이 쉴 만큼 신이 났지만 그다음은 노래자랑이었다. 게다가 우리가 첫 번째 순서. 맙소사,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사무장님이 무언가를 한 아름 건네주셨다. 화려한 은색 스팽글이 달린 반짝이 조끼와 모자, 몸뻬를 더해 촌스러움을 강조한 완벽한 무대 의상이었다. 연습 때 봤던 이 옷을 내가 입게 될 줄이야. 동작이 더 잘 보이라고 팔에 풍선도 하나씩 붙이고, 선글라스까지 쓰고 나니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차라리 잘되었다.

"골목길 지나~ 길모퉁이 돌아서면~"

한 달여가 지난 지금까지 입가에 맴도는 노래의 첫 소절이다. 쿵짝쿵짝 박자에 맞춰 열심히 몸을 움직여 보아도, 유정을 곁눈질하며 따라 하느라 한 템포씩 박자가 늦어졌다. 어떻게 마무리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새 나도 리듬에 몸을 맡기고, 무대 앞에 나와 흥을 즐기는 어르신들을 바라보며 춤췄다. 오래오래 기억될 추억이 하나 더 생기는 순간이었다.

농번기에 시행하는 마을 공동급식. /박수진

면체가 끝나고 나서부터는 바로 농번기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오전 11시 50분이 되면 마을회관에 모여 함께 밥을 먹는다. 농번기 한 달 동안 일정 부분 군의 지원을 받아 이뤄지는 마을 공동급식이다. 노래자랑으로 얼굴 도장을 톡톡히 찍은 덕분에, 최근에는 부쩍 어르신들이 반갑게 인사를 받아주신다. 일지에 이름을 정자로 쓰고 자리를 잡으면 어머님들의 연륜이 담긴 밥, 국, 반찬들을 내어주신다. 오늘 메뉴는 자작한 국물에 나물이 곁들여진 비빔밥(헛제삿밥)이었는데 너무 맛있어서 남김없이 싹싹 긁어먹었다. 혼자 먹는 집 밥보다 훨씬 맛있는 밥을 함께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하며, 열심히 설거지를 했다.

남해에 살면서도 어느 공동체에 딱히 속해 있지는 않았던 내가, 요즘은 두모 친구들 사이에 끼여 이렇게 끈끈한 공동체 생활을 경험하고 있다. 도시에서 살 때는 상상해 보지 못했던 완전히 달라진 삶의 방식.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 많아져 행복한 5월이다.

/박수진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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