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훈 칼럼니스트]
1943년 4월3일 이전의 제주
제주시 봉개동에 있는 제주 4·3평화기념관 제1관 ‘역사의 동굴’에는 백비(白碑)가 하나 누워있다. 이 백비는 77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제주4·3이 올바른 제 이름인 정명(正名)을 갖지 못하고 있음을 상징하고 있다. 국가는 50년간 “폭동”이라 했고 진보사학계는 “항쟁”이나 “학살”이라 부르기도 했다. 국가문서에는 “사건”이란 중립적인 표현을 쓰고 있다. 이처럼 백비를 일으켜 세우지 못하는 이유는 4·3이 7년 7개월의 기나긴 과정을 거쳐 마무리됐기 때문이다. 그 기간 미 군정의 개입과 군·경의 초토화작전, 분단과 한국전쟁, 그리고 서북청년단의 반인륜적인 잔악 행위가 얽히고설켜 있다.
이번 글에서는 1948년 4월 3일의 무장대 봉기와 6월 18일 박진경 9연대장의 암살까지 한 달 보름 동안 전개된 이야기를 몇 줄로 축약해 담아보려 한다. 숨 가빴던 이 기간에는 9연대장 김익렬과 무장대 사령관 김달삼이 맺은 4·28 평화협상 성사와 ‘메이데이 작전’으로 불리는 5월 1일 오라리 방화사건이 끼어있다. 그리고 5월 5일 있었던 군경수뇌부의 극비 비밀회의도 4·3 전개의 분수령 역할을 한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6월 18일 새벽에 벌어진 암살의 주범 문상길 중위와 박진경 대령이다. 제주에서 악연으로 만난 두 사람은 모두 이십 대였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해방 전후 제주의 상황을 몇 줄 쓰는 게 좋겠다. 일본군사령부는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 본토로 진격하는 미군을 방어하기 위해 '결7호작전'을 세웠다. 2개 사단과 1개 여단을 거느린 일본군 58군은 제주 해안과 중산간(中山間) 곳곳에 동굴 진지와 지하갱도를 파며 옥쇄를 각오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하며 일본군 7만 명이 썰물처럼 제주 섬을 빠져나갔다. 그들은 여러 무기를 한라산 허리에 파묻기도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은 섬나라. 한반도 육지에서 떠돌던 사람들과 일본에서 일하거나 공부하던 사람들은 대한해협과 현해탄을 건너 밀물처럼 고향으로 돌아왔다. 학병으로 끌려가 만주벌판을 헤매던 생존자들도 그리운 고향 섬나라로 돌아왔다. 해방되면서 섬으로 돌아온 귀환자는 6만 명이 넘었다. 그들과 함께 섞여 들어온 사상과 이념이 조직화하기 시작하였다. 귀환 청년들이 가진 새 나라 건설에 대한 열망은 불꽃처럼 타올랐다. 그들은 교사와 활동가로 활약하며 학생과 고향 사람들에게 세계정세를 설명해 주었다.
무능력한 미 군정의 부정부패
해방공간에서 미 군정의 행정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경우가 많았다. 엉성한 미 군정의 틈새를 일제 강점기의 기득권층이 노리고 들어갔다. 도민의 눈에는 세상 돌아가는 것이 정의롭게 보이지 않았다. 좁은 섬나라는 갑자기 몰려온 귀환인구의 구직난과 생필품 부족, 그리고 콜레라 발생과 극심한 흉년으로 민심이 흉흉하고 삶은 핍박해졌다. 그런 데다 육지에서 쌀을 들여와 배분하는 미곡정책까지 실패하였다. 일제의 경찰 노릇을 하던 사람들이 미 군정의 경찰로 변신하는가 하면 미 군정 관리들의 부패행위가 큰 사회문제가 되었다. 섬사람들의 불만은 부풀 대로 부풀어 갔다.
이런 분위기에서 남로당 제주도당은 정치사회 전반에 대한 항의로 1947년 삼일절에 조직을 총동원하여 시위를 벌였다. 결국, 이 삼일절 시위는 제주4·3 봉기의 신호탄이 되었다. 남로당 제주도당 주도로 벌어졌던 이 삼일절 시위로 시민 6명이 사망하고 여러 사람이 감옥에 갇혔다. 삼일절 사건에 총파업으로 맞서던 활동가들은 탄압으로 일관하는 미 군정에 절망하기 시작했다.
신중 온건파였던 중장년 간부들이 일본과 육지로 도피하고 감옥 가느라 빠진 신촌회의에서 20대 청년 김달삼은 무장봉기 주장을 관철했다. 혈기에 넘친 그들의 구호는 “탄압이면 항쟁이다”였다. 4월 3일 새벽, 오름에 무장봉기를 알리는 봉홧불이 타올랐다. 지서가 불에 타고 우익인사와 서청 세력에 대한 무장대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학살주범 박진경을 암살한 문상길
우여곡절 끝에 4월이 가기 전 무장대와 9연대 간의 '4.28 평화협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무장대의 귀순절차가 시작되려는 과정에서 이 평화협상은 미 군정이 주도한 ‘메이데이 작전’으로 깨져버렸다. 5월 1일 발생한 오라리 방화사건은 4.28 평화협상을 방해하려는 음모였음이 나중에 밝혀졌다. 많은 학자는 4.28 평화협상이 성공적으로 실행되었다면 이후 벌어진 대량 학살극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토로한다.
5월 5일 제주시 미군정청 회의실에서 극비 최고수뇌 회의가 열렸다. 선무공작을 벌이며 무장대 사령관 김달삼과 ‘4·28 평화협상’을 성사시킨 김익렬 9연대장은 강경진압을 주장하는 조병옥 경무부장과 육탄전을 벌였다. 김익렬 연대장은 곧바로 해임을 당하고 후임으로 박진경 중령이 부임하였다. 박진경은 연대장 취임사에서 "우리나라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라고 밝혔다. 박진경 연대장은 자신이 말한 대로 강경 진압을 밀고 나갔다. 이는 ‘선 안무(按撫) 후 진압’을 주장하던 김익렬 연대장하고는 정반대의 작전이었다.
1948년 6월 17일. 무자비한 진압 공적으로 한 계급 특진한 연대장 박진경 대령을 축하해주기 위해 미군정장관 딘 장군이 서울에서 내려왔다. 딘 장군은 박진경을 위해 관덕정 인근의 요정 옥성정(玉成亭)에서 축하연을 열어주었다. 축하연에서 만취한 박진경은 밤늦게 연대본부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이튿날 새벽 3시경, 그의 숙소에서 두 발의 총성이 울렸다. 문상길 중위로부터 명령을 받은 손선호 하사는 M1 소총으로 박진경 대령의 머리와 심장을 향해 두 발의 총격을 가했다. 문상길 중위와 그를 따르는 부하들의 목숨을 건 거사의 목적은 동족인 제주도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민족반역자의 처단이었다.
잔혹무도한 박진경과 백선엽
박진경 대령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애초 일본군 소위 출신 박진경은 부산 제5연대에 사병으로 입대했다. 영어를 잘했던 그는 당시 연대장 백선엽 중령의 추천으로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간주하고 소위로 임관되었다. 박진경은 지난 6월 1일 자로 대령으로 진급했는데, 백선엽이 대령 진급을 한 것이 불과 얼마 전이었다. 박진경에 대한 미 군정의 총애가 어떠했는지 이를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초고속 진급이란 말조차 무색할 정도였다.
박진경은 경남 남해군 남면 홍현리에서 ‘대정익찬회’ 간부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진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오사카외국어대학 영어과 졸업 후 학병으로 징집되어 일본 마쓰도 육군 공병 예비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공병 소위로 임관 되어 태평양전쟁 기간 제주도에서 복무하였다.
8.15 광복 이후에는 부산에서 우파단체인 경남국군준비대와 부설 군관학교에서 활동하다가 제5연대 창설 요원으로 1946년 1월 29일에 이등중사로 입대하였으며 우수 하사관으로 추천되어 그해 4월 25일 소위로 현지 임관하였다. 그리고 1중대 보급관과 중대 인사계, 1대대 부관(현재의 인사장교), 연대부관을 지낸 뒤 송호성 조선경비대 총사령관 전속부관과 비서실장을 거쳐 경비대 사령부 인사국장이 되었다. 그리고 1948년 5월 6일부터 15일까지 제9연대장, 5월 15일부터 6월 18일 새벽 피살까지 제11연대장(33일)을 역임했다.
박진경은 연대장 취임식에서 자기 부친은 일제의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의 중요 간부였다고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대정익찬회는 1940년 제2차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내각 당시 신체제 운동의 추진을 목표로 하여 결성된 전체주의적 국민 통합 조직이다. 처음에는 기성 정당과 군인뿐 아니라 광범위한 국민 통합을 목표로 하였으나, 실제로는 군부에 이용되어 전쟁터로 국민을 동원하는 핵심 기구 역할을 하였다. 부친이 친일파 정치집단의 일원이었다는 것을 굳이 강조한 것은 자기는 공산주의자와는 적대관계라는 걸 강조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문상길 중위는 박진경 연대장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친일부역자에서 딘 장군이 총애하는 미 군정의 충견으로 갈아탄 기회주의자이며 민족반역자로 보였을 것이다. 태어난 뿌리와 성장 과정이 달라 도저히 화합할 수 없는 이십 대 동년배 두 사람은 제주의 하늘 아래서 부딪혔고, 마침내 피를 뿌렸을 것이다. 그러나 허수아비 하나 쓰러트린다고 세상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들의 죽음 뒤에는 더 큰 비극의 갈림길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사라져버린 문상길 중위의 기록들
그리고 문상길 중위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에 대한 공식자료는 재판과정의 토막 기사 말고는 어떤 연유인지 말끔하게 사라져 버렸다. 오랫동안 고향은 어디이고 그의 무덤조차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을 어렴풋이 알 수 있는 것은 겨우 제9연대 장교의 단체 사진에서다. 2000년에 들어서야 안상학 시인이 문상길 중위 고향을 찾아주었고, 주철희 박사는 그의 족보를 통해 몇 가지 사연을 밝혀주었다. 두 분의 노력 덕분에 그의 어린 시절과 집안 내력을 추측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안상학 시인의 시 『기와 까치구멍집』은 문상길 중위의 행적을 조사하는 노력이 더해져 제주 문학계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기와 까치구멍집
내가 한 일은 다만 1948년 그 사내가
안동 사람이라는 사실을 증명한 것
제주도민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린 지휘관을 암살한/국군이 국민에게 결코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던 대한민국 제1호 사형수 문상길 중위/고향이 어디인지 누구도 알 수 없었던/역사의 뒤안길에 묻힌 향년 스물셋 사내, 고향은 안동
내가 한 일은 다만
그 사내의 내력을 찾아낸 것
임하댐 수몰된 안동 마령리 이식골/남평 문씨 종갓집 막내아들, 그 사내가 살던 곳/그 사내가 떠난 곳,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곳/사내처럼 사라진 마을, 흉흉한 소문 떠도는/쉬쉬대며 살아온 일가붙이들 산기슭에 남은 곳
내가 한 일은 다만
그 사내의 사진 몇 장 찾은 것
소년처럼 해맑은 사내의 마지막 웃음/두 손 철사로 묶인 채 나무 기둥에 결박당한 몸/가슴에는 휘장 대신 표적, 흑백사진 붉은 피는/두 눈 가린 채 목이 꺾인 사내의 최후 진술;/내 비록 미군정 인간의 법정에서는 사형을 받고 사라지나/공평한 하늘나라 법정에 먼저 가서 기다릴 것이다
내가 한 일은 다만
그 사내가 살던 집을 찾아낸 것
당당하게 살아남은 그 사내의 흔적/300년 문화재 기와 까치구멍집 건재한 사내의 생가 수몰을 피해 남후면 검암리로 옮겨 앉은 남평 문씨 종가/그를 기다린 40년 고향을 뒤로하고 1988년 옮겨 앉은 낮선 땅 32년, 기다리고 기다린/72년 만에야 불귀 주인 소식 전해들은 까치구멍집
무자년 사내가 가고 72년 만에 내가 한 일은 다만 그의 흔적을 찾은 것일 뿐, 고작 대문간에 막걸리 한잔 올리고 그의 죽음을 전하는 일이었을 뿐, 그 사이 하늘나라 법정에서 받아놓았을 그 사내의 판결문을 이 집 우체통에 전해주는 일은 그날 이후 남겨진 모든 사람들의 몫이라고 생각하며 음복주를 마셨다. 경자년 경칩 무렵, 복수초가 까치구멍집 화단에 피어 있는 날이었다. (2020년)
-안상학의 시 『기와 까치구멍 집』 전문
문상길이 태어나 자란 고향 안동시 임동면(臨東面) 마령리(馬嶺里) 이식골은 1984년 12월 시작해 1992년 완성된 임하댐 건설로 수몰되었다. 그의 생가이며 남평 문씨 종택인 '기와 까치구멍집'은 1988년 안동시 남후면 검바우길 28-3번지로 옮겨졌다. 거리로는 35㎞, 자동차로 달려 40분 거리다. 인척들이 수몰 보상금을 받고 가까운 언덕바지에 새집을 마련한 것과는 달리 그의 생가만 유독 그토록 멀리 이건(移建) 돼야만 했던 이유는 따로 있을 것이라 짐작된다.
다행히 그의 생가 ‘기와 까치구멍집’은 경북 민속문화재 69호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 사형판결과 총살집행을 알리는 신문기사 몇 줄 말고는 그의 유년기와 청소년기, 스물두 해 기록은 무슨 이유인지 통째 사라졌다. 그는 다시 살아나야 한다. 다만 마령리 음지마에 살던 그의 남평 문씨 친척 문병태 씨가 남긴 1960년대 기록 사진들을 보면 소년 상길이가 놀던 고향 마을을 그려볼 수는 있다.
한편 여수민중항쟁의 진실에 천착해 온 주철희 박사가 쓴 문상길 중위의 가계 족보에 대한 해설은 그의 행적을 유추해 볼 수 있는 귀한 자료다.
남평문씨 대동보에는 문상길은 1926년 9월 8일 태어났다. 사망 일자가 1945년 2월 25일로 기록되어 있으며, 국군 장교였다는 것과 사변에 순직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주4.3항쟁과 연관성을 없애기 위해서 사망 일자를 조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사망했다면 ‘국군’이란 표현은 맞지 않는다. 아직 해방도 되지 않은 일제 강점기에 ‘국군 장교’란 표현은 맞지 않기 때문이다.
문상길은 결혼했다. 그의 부인은 전주 유 씨로 1927년생이며, 1985년에 사망하였고 묘지가 만주에 있다. 이로 미루어보아 전주 유 씨와는 만주에서 알았던 것으로 예측된다. 상길은 국방경비사관학교 3기생이다. 3기생은 1946년 11월 입교해 1947년 4월 19일 임관하였다. 해방 이후 부인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곧바로 경비사관학교에 입교하였고, 그 부인 유 씨는 문상길이 사형되자 다시 만주로 돌아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길에게 직계 자식이 없어 형 상익의 삼남 영주가 양자로 들어왔다.
문상길 부는 원제(1889년생)이며, 그의 백부가 원호(1887년생)이며, 숙부가 원대(1891년생)이다. 상길의 조부가 제현(1865년생)이고 3형제가 원호, 원제, 원대이다. 조부 제현은 1917년 사망했으며, 그의 묘는 안동 임하에 있다. 그런데 백부, 부, 숙부의 묘는 중국 만주에 있다.
3형제가 어느 시점에 만주 목단강으로 이주하였는지 정확하지 않다. 조부인 제현이 사망한 1917년 이후가 아닌가 한다. 안동 임하에서 전해온 이야기로는 상길이 5살 정도쯤에 만주로 집안이 이주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면 상길 집안이 이주한 시기는 1930년경으로 추정된다.
상길 집안의 이주와 관련하여, 상길의 백부(원호)를 설명하는 서술을 보면, ‘事燮遷背鄕出國於滿洲牡丹江省海林幽置當’이란 구절이 있다.
해석해보면, ‘사변 이후 고향을 등지고 출국하여 만주 목단강성 해림에 피신하다’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사변’이란 필자는 만주사변(1931년) 또는 지나사변(중일전쟁, 1937년)이 아닐까 생각한다. 안동 남평문씨의 주장과 연결해보면, 1931년 만주사변 이후에 만주로 건너갔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상길 집안이 만주로 이주에는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 집안과 연관이 있다는 주장이 있다. 남평문씨 집안과 석주 이상룡 집안은 안동 출신이라는 점과 기독교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족보에 보면 백부 원호가 10세 때부터 특출났음을 알 수 있다. 백부의 장남 상익의 처가 철성 이씨이다. 철성은 고성의 옛 지명으로 고성 이씨와 한집안이라고 할 수 있다. 석주 이상룡이 고성 이씨이다. 석주 이상룡은 상길 집안에 앞서 1911년 일가족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했다.
상익의 족보에 보면, 만주로 이주하였는데, 10년 후에 상길의 조카 도주(道周)가 어머니와 찾아왔다고 되어 있다. 그렇지만 1948년 6월 상길의 박진경 암살 사건으로 9월에 상길의 처형(處刑)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조카와 그 집안사람을 안동에서 찾아볼 수 없다. 상길 부인 유 씨의 묘지가 만주에 있듯이, 이 시기에 다시 모두 만주로 간 것으로 추정된다.
상길의 양자 영주와 그의 조카 도주, 성주 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흑룡강성 목단강에 가면 문상길의 가족 이야기와 그의 뒷이야기를 알지 않을까 한다. 박진경은 친일에 기댄 집안에서 성장했다면, 문상길은 독립운동을 하는 가풍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을 것이라 쉽게 짐작이 된다.
민족반역자 박진경을 암살하며
1948년 8월 12일, 재판과정 내내 박진경을 ‘민족반역자’로 부르던 제9연대 3중대장 문상길 중위는 이날 최후진술에서 처음으로 연대장님이라는 존칭어를 썼다. 그의 최후진술 일부다.
“이 법정은 미 군정의 법정이며 미군정장관 딘 장군의 총애를 받은 박진경 대령의 살해범을 재판하는 인간들로 구성된 법정이다. 우리가 군인으로서 자기 직속상관을 살해하고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죽음을 결심하고 행동한 것이다. 재판장 이하 전 법관도 모두 우리 민족이기에 우리가 민족반역자를 처형한 것에 대하여서는 공감을 가질 줄 안다.“
박진경을 직접 사살한 손선호 하사는 박진경 연대장의 무자비한 공격작전과 처참한 목격담을 설명한 뒤 최후진술을 마쳤다. “박 대령을 암살하고 도망할 기회도 있었으나 30만 도민을 위한 일이므로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나 하나의 생명이 30만의 도민을 위한 것이며 3천만 민족을 위한 것인 만큼 달게 처벌을 받겠다.”
1948년 8월 14일, 고등군법재판은 문상길 중위, 신상우 1등상사, 손선호 하사, 배경용 하사 4명에 대하여 총살을 언도하였다. 그러나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만 수색에 있는 망월산 기슭에서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이들은 모두 20대 초반의 기독교인이었다.
1948년 9월 23일 수색에서 집행한 총살형에 앞서 문상길 중위는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스물두 살 꽃다운 나이에 나 문상길은 저세상으로 갑니다. 여러분은 한국의 군대입니다. 매국노의 단독정부 아래서 미국의 지휘하에 한국 민족을 학살하는 한국군대가 되지 말라는 것이 저의 마지막 염원입니다.”
70여 년 이상 금기시하였던 문상길 중위와 6·18의거를 추념하는 행사가 2022년부터 사형선고일에 맞춰 이어지고 있다. 제주4·3 관련 단체들은 총살형이 집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수색 망월산 기슭에 이날 제사상을 차리고, 민족과 제주를 사랑했던 그들의 뜻을 기린다.
문상길 중위의 종갓집은 만주로 이주했지만, 안동 지역에 남은 집안은 암살사건 이후 많은 풍파를 겪게 되었다. 연좌제로 가족들이 취직이 안 되기도 하고 손가락질받기도 했다. 어느 언론사 기자를 만난 문상길 중위의 한 사촌은 그때 당시 제대로 된 평가가 있었더라면 자기 집안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라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지금이라도 사람들에게 다시 평가를 받길 원하였고 그게 그들의 바람이라고 했다.
문상길을 위한 추모
아래는 필자가 추념식에 다녀온 저녁 문상길 중위에게 바쳤던 추모글인데, 러시아 시인 조지프 브로드스키의 『시인에 대한 정의』를 변주했다. 이 시는 브로드스키가 스페인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Federico García Lorca,)를 추모하며 쓴 시다. 로르카는 서른여섯의 나이로 스페인 내란 중에 파시스트들에게 살해당한다.
사랑에 대한 정의
-문상길 중위를 추모하며
(나름의 전설이 하나 있다. 총살당하기 직전 그는 총살대 병사들 머리 위로 태양이 빛나는 것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주의 모든 것을 기억한다고.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목숨을 바친 사랑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른다.)
말들이 뛰노는 들판 너머
소들이 새김질하는 돌담 너머
바람이 구름을 몰아가는 오름 너머
풍경들을 기억해 두는 것.
같은 피를 나눈 사람들의 무덤 너머
풍경들을 기억해 두는 것.
우리가 사랑에 이끌려 나오는 순간
싸락눈은 얼마나 휘몰아 내리는지
기억해 두는 것.
우리가 가까운 이에게 사랑을 상기시키는 순간
비포장 신작로 위로 부서져 내린 하늘을
기억해 두는 것.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설명받는 순간,
초가지붕 위로 흘러내리는 붉은 빗줄기는
어떻게 삶의 터전을 일그러뜨리는지
기억해 두는 것.
숨을 곳 없는 곶자왈 위로
마지막 남은 곧은 총구가
어떻게 십자가를 내미는지
기억해 두는 것.
달 밝은 밤이면
나무 또는 사람이 드리우는 긴 그림자를
기억해 두는 것.
별이 빛나는 밤이면
늙은 아버지의 주름처럼 반들거리는
바다의 무거운 파도를
기억해 두는 것.
그리고 새벽녘이면
산사람이 이슬을 밟으며 돌아서 나오는
하얀 길을 기억해 두는 것.
토벌대들의 낯선 목덜미 위로
태양은 어떻게 떠오르는지
기억해 두는 것.
(조지프 브로드스키의 『시에 대한 정의』를 변주함)
※ 김양훈은 제주제일고와 고려대학교(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외환은행을 다니다 퇴직했다. 후배와 함께 조그만 공장을 10여 년 운영하며 험한 세상을 경험한 것이 좋은 약이 되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글 읽고 쓰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젊어서 시도 쓰고 짧은 소설도 끄적여 보았지만, 학교 교지에 몇 번 실린 것 말고는 남에게 보여준 적은 없었다. 프리랜서 작가란 타이틀로 한라일보 정기칼럼 <김양훈의 한라시론>을 2018년 이후 지금까지 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