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꼬무 찐리뷰] 부천서 성고문 가해 경찰 "손 댄 적 없다" 뻔뻔한 부인…끝까지 싸운 故조영래 변호사

강선애 2023. 3. 17.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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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6일 방송된 '나의 변호사'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작사가 김이나, 가수 치타, 개그맨 서경석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평화시장 여공의 생활을 궁금해하던 남자

때는 1976년 봄, 22살 순애 씨가 버스를 타고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길이야. 만날 사람은 바로 이 남자야.

듬직한 체격에 온화한 미소, 그리고 소박하고 털털한 느낌의 남자야. 순애 씨와 이 남자가 만난지는 벌써 1년째야. 그런데 이 만남에는 '절대 이름을 묻지 말 것', '만남은 일주일에 2번, 수요일과 일요일', '약속시간에서 30분이 지나도 안 오면 기다리지 말고 갈 것'이라는 특이한 조건이 있었어. 무슨 스파이들의 첩보 작전 같지? 그래서 순애 씨는 1년째 만나고 있는 이 남자의 이름을 몰라. 더 수상한 건, 두 사람이 만나는 장소야. 바로, 무덤 앞이였어.

"전 그때 나이가 19~20살이니까. 묘 앞에서 얘기하기가 싫었거든요. 차마 용기가 없어서 '왜 묘 앞에서 만나냐'는 소리는 못 했지만, 묘 앞에서 장시간 앉아서 얘기를 했어요."

-신순애, 당시 22살

두 사람은 생판 모르는 남의 무덤 앞에서 만나 대화를 나눴어. 남자가 순애 씨에게 원한 건 딱 하나,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거였어. 남자가 질문을 하면, 순애 씨는 대답했어. 그 질문은 순애 씨의 일과 관련된 것들이었어. "월급은 얼마 받나", "몇 시에 출근해서 몇 시에 퇴근하나", "일하는 곳은 어떻게 생겼나" 이런 시시콜콜한 것들. 당시 순애 씨는 평화시장 봉제공장에 다니고 있었어.

평화시장 봉제공장은 '닭장'이라 불릴 만큼 환경이 열악한 곳이야. 순애 씨는 13살부터 이 곳에서 여공으로 일했어. 하루 종일 좁은 공간에서 허리도 못 펴고 미싱을 돌렸어. 순애 씨는 이 남자를 만나는 날이면 신이 났어. 여공인 자신을 이렇게 궁금해하는 남자는 처음이었거든. 게다가 눈 한 번 안 돌리고 진지하게 경청하는 남자의 태도가 감동이었어.

그런데 어느날, 남자로부터 소식이 뚝 끊겼어.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흘러 이 남자가 다시 순애 씨 앞에 나타났어. 그런데 털털했던 모습은 어디 가고, 말끔하게 양복을 차려 입고 나타났어. 그리고 이 남자는 순애 씨에게 "이제 우리 못 볼 거다"라고 말해. 그러면서 덧붙여. "저 지금, 자수하러 갑니다"라고. 그렇게 이름도 모른 채 사라진 이 남자, 과연 정체가 뭘까?

그로부터 10년 후인 1986년 7월. 인천의 한 교도소 접견실에 수의를 입은 누군가가 앉아있어. 이 사람이야.

22세 권인숙 씨. 창백하고 야윈 모습이 며칠째 잠도 못 잔 거 같아. 그리고 인숙 씨 맞은편에는 한 남자가 앉아있어. 이 남자는 인숙 씨에게 "괴롭겠지만,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해. 앞서 순애 씨한테 이야기를 해달라 한 것 처럼. 맞아, 순애 씨와 인숙 씨가 만난 사람은 같은 남자야. 바로 이 사람.

이름은 조영래, 직업은 변호사야. 근데 아까, 순애 씨에게 자수하러 간다고 했잖아? 10년 전에 순애 씨를 만났을 때는, 변호사가 되기 전이야.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유신 반대운동을 하다가, 주동자로 몰려 도피생활 중이었어. 그래서 이름도 밝히지 못하고 순애 씨를 무덤 앞에서 만났던 거야.

교도소 접견실에서 만난 조 변호사가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요청하자 인숙 씨는 이렇게 대답했어. "제가 당한 일을 폭로하고 싶어요"라고. 인숙 씨는 무슨 일을 당했길래, 폭로하고 싶다는 걸까? 이 일이 일어난 건 한달 전이야.

▲ 경찰서 안에서 자행된 끔찍한 악몽

인숙 씨는 자취방에 누워 책을 읽고 있었어. 갑자기 초인종이 울리고, 남자 두 명이 들이닥쳤어. 이들은 다짜고짜 방을 막 뒤졌고, 뭔가를 찾아냈어. 그러더니 "우리랑 좀 같이 가야겠어"라며 인숙 씨를 어디론가 데려갔어.

인숙 씨가 도착한 곳은 부천 경찰서. 남자들의 정체는 형사였어. 형사들이 인숙 씨의 방에서 찾아낸 건, 인숙 씨의 주민등록증과 이력서였어. 그런데 주민등록증과 이력서가 좀 이상해.

사진은 인숙 씨 사진인데, 이름은 '김현숙'으로 되어있어. 주민번호, 주소, 학력, 다 가짜야. 그동안 인숙 씨는 남의 신분으로 살아온 거야. 왜 이런 신분세탁을 한 걸까? 가짜 김현숙, 인숙 씨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봤어.

"그때는 위장취업자라는 게 국가 정부의 경계심이 아주 크게 올라왔던 때예요. '위장 취업한 사람들이 누굴까' 그걸 찾아내는 과정이 아주 요란했었고요. 그때 신분조회를 다 해보는 그런 분위기였거든요."

-권인숙, 現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한마디로 신분을 속이고 취업을 한 거지. 인숙 씨의 진짜 학력은 중졸이 아니고 대학 중퇴야. 그것도 서울대. 근데 왜 일부러 스펙을 낮춘 걸까. 공장에 취직하려고 한 거야. 인숙 씨는 운동권 학생이었거든.

당시엔 학생 신분을 버리고 노동현장에 뛰어드는 운동권이 많았어. 야학을 열거나 노동조합 설립을 주도했어. 공장 사장님들은 이런 사람들이 반가울 수가 없지. 당시 분위기는 노동자를 선동하는 불순세력, 빨갱이라 생각했어. 그래서 업주들도, 정권도, 학생 출신 노동자를 솎아내려 혈안이 되어있었어. 이런 상황에 이력서에 '대학생'이라 썼다? 당연히 취업이 안되지. 그래서 신분세탁을 하는거야.

공문서, 사문서를 위조한 거니 이건 당연히 불법이야. 인숙 씨는 남의 신분증으로 공장에 취업했다고 경찰에 순순히 자백했어. 자백했으니 검찰로 넘겨지거나, 운이 좋으면 훈방조치도 가능해. 그런데 그 다음날, 더 강도 높은 심문이 이어졌어. 경찰은 인숙 씨에게 자꾸 선배들, 친구들 이름을 대라고 강요했어. 대답이 제대로 안 나오니 폭력까지 휘둘러. 뺨을 때리고 주먹으로 사정없이 구타했어.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인숙씨를 미끼로 거물을 잡으려는 거야.

이때는 1986년이야, 87년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나기 1년 전이야. 민주화의 함성이 점점 높아지고 위기를 느낀 전두환 정권의 탄압도 무자비하던 시절이야. 인숙 씨가 체포되기 한달 전에는 '인천 5.3 민주항쟁'이라는 대규모 시위도 있었어. 수백명이 잡혀서 고문당했고, 전국에 시위 주동자 검거령이 내려졌어. 경찰 내부에서는 '다른 어떤 범죄보다 우선해서 수사해라', '주동자 검거하면 특진에 표창까지 내린다'는 말이 돌았어. 그러니 경찰들은 검거를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지. 인숙 씨를 통해서 '인천 5.3 항쟁' 핵심 인물들을 찾으려고 한 거야.

인숙 씨가 경찰서 보호소에 갇힌지 3일째 되던 6월 6일 새벽 4시. 형사가 인숙 씨를 부르더니 대뜸 따라오래. 갔더니 새벽인데 경찰들이 모여있어. 분위기가 뭔가 살벌해. 금테 안경을 쓴 중년 남자가 인숙 씨를 노려봐. 경찰 서장이였어. "권양, 수사에 이렇게 협조 안해서 되겠어?"라며 잔뜩 짜증난 목소리로 말하더니 휙 나가버려. 그러더니 완장을 찬 또다른 형사가 옆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자네가 맡아서 해"라고 지시했어. 거기엔 이 남자가 서 있었어. 문귀동, 계급은 경장이야.

"어떤 종류의 사람하고 비교해도 아주 무서운 인상의 얼굴이 시커멓고 눈도 굉장히 무섭게 생겨서.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질 만큼 압도하는 뭔가가 있었던 그런 외모의 사람이었어요."

-권인숙 국회의원

문 경장은 인숙 씨를 다른 방으로 데려갔어. 방안에는 단 둘뿐이야. 문 경장은 인숙 씨에게 "5.3 인천사태 관련자 누구 알아?"라고 추궁했어. 인숙 씨는 "아무도 모른다"고 대답했어. 이건 거짓말이 아니야 인숙 씨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 하지만 아무리 모른다고 해도 소용 없었어. 문 경장은 안되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어. 그리고 일어나서 인숙 씨 앞으로 왔어. 인숙 씨는 몸이 덜덜 떨려. 잔뜩 겁에 질렸어. 문 경장은 인숙 씨에게 "남방을 벗어"라고 시켰어. 인숙 씨는 시키는 대로 남방을 벗었어. 흰색 반팔 티셔츠만 입은 차림이야. 그 후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났어. 문 경장이 인숙 씨가 입고 있던 티셔츠와 속옷을 들춰. 그러더니 입에 담기 힘든 질문을 했어.

"맨 처음부터 사실은 이 사람은 뭔가 성(性)적으로 사람을 제압해서 자백을 받아내는, 아니면 단서를 끌어내는 그런 거에 익숙한 사람 같이 느껴질 만큼. 바로 가슴 들춰보고 이런 일들을 서슴없이 하는 그런 상황이었어요. '너 처녀 아니지?' 이런 식으로 상대방에 대해서 상상할 수 없는 공격을 함으로써 뭔가에 대한 자백을 받아내는 기술이 있었던 사람이었어요. 이 사람한테 너무 자연스러운 일 같이 느껴졌었어요."

-권인숙, 부천서 성고문 사건 피해자

스물 두살 어린 나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겠어. 경찰서 안에서 범죄를 하는 경찰, 이른바 '성 고문'이야. 자백을 받아내려 성적 수치심을 이용하는 거지. 인숙 씨가 계속 모른다고 하자 문 경장은 젊은 형사 한 명을 부르더니 고춧가루 물을 가져오라 시켰어. 그리고 인숙 씨한테 옷을 벗으라고 했어. 인숙 씨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어. 그래서 급하게 아무 이름이나 생각나는 대로 불렀어. 그러자 문 경장은 "진작 그럴 것이지. 더 아는 사람은 없니?"라며 목소리가 갑자기 부드러워져. 그리고 인숙 씨를 보호실로 돌려 보냈어. 이때가 새벽 6시였어.

"뭔가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 같고요. 다른 판단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니에요. 부끄럽고 굴욕적이고 이런 느낌이지, 다른 판단을 해볼 수 없을 만큼 정신이 없는 상태죠 사실은."

-권인숙, 부천서 성고문 사건 피해자

▲ 두 번의 성 고문, 폭로를 결심하다

다음날 인숙 씨가 다시 불려갔어. 경찰들 분위기가 어제보다 더 험악해. 인숙 씨의 거짓말이 들통난 거야. "권양, 너 오늘부터 대우가 달라질 거야!" 수사계장이 윽박 질렀어. 그러면서 문 경장한테 이런 지시를 내려. "오늘부터 그런 방법으로 해"라고. 대놓고 성고문을 하라고 지시한 거야.

그날 밤 6월 7일 밤 9시, 문 경장은 인숙 씨를 또 불러냈어. 인숙 씨를 조사실에 데려가더니 형사 둘을 불러. 두려움과 절망감에 온 몸이 떨려. 형사들이 인숙 씨의 손을 뒤로 돌려 수갑을 채웠어. 무릎을 꿇리고 다리 안 쪽에 각목을 끼워. 그러더니 사진을 한 장 한 장 보여줘. 시위 주동자로 수배된 사람들 사진이야. 인숙 씨가 그들을 모른다고 할 때마다, 허벅지를 곤봉으로 때렸어. 끝내 대답이 안 나오니 문 경장의 표정이 굳어져. "안되겠네. 너, 따라와"하더니 이번에는 문 경장의 조사실로 끌고 갔어.

불 꺼진 조사실, 바깥 불빛만 창문으로 희미하게 들어와. 문 경장이 인숙 씨에게 아버지 직업이 뭐냐고 물었어. 혹시나 아버지가 높은 사람일까봐, 저울질 하는 거야. 인숙 씨는 아버지가 식당을 하신다고 둘러댔어. 사실 인숙 씨 아버지는 공무원이야. 혹시라도 아버지에게 불이익이 갈 까봐, 일부러 거짓말을 한 거야. 이 말을 들은 문 경장이 웃더니, 또 다시 성고문을 시작했어. 당시 상황을 인숙 씨가 적어놓은 글이 있어. '꼬꼬무'는 이걸 공개해도 될까 고민했는데, 사건을 알리는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일부 공개하기로 했어.

"그는 비양거리면서 나의 티셔츠와 브래지어를 위로 올리고 바지 단추를 풀고 지퍼를 내렸다. 그는 ㅇㅇ마저 벗겨 내렸다. 나는 반벌거숭이 상태가 되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의자를 내 의자 앞으로 바싹 당겨 앉았다. 그리고 ㅇㅇ를 만지며 나의 몸에 자신의 몸을 비벼댔다. '너 같은 거 여기서 죽어도 아무 일 없어. 빨리 불어' 나는 더 이상 인간이기를 포기했다. 차라리 그가 나를 죽여주는 것이 훨씬 깨끗하고 고마울 것 같았다."

- 권인숙 자필 수기 '하나의 벽을 넘어서' 中

"나이가 몇 살이어도 비슷했을 것 같고요. 그 일은… 앉아있을 수가 없을 만큼 다 뒤틀리는 느낌, 그런 느낌으로 며칠을 보냈었고. 그냥 '내가 뭐지?' 그런 식의 명료하지 않게… 너무 극단적인 일을 경험했으니까."

-권인숙, 부천서 성고문 사건 피해자

경찰은 공권력을 이용해 성폭력을 고문수단으로 사용했어. 피해자는, 이걸 폭로할 수 있을까? 지금도 쉬운 일이 아니야. 그런데 이때는 40년 전이야. 여성이 성폭력 피해 사실을 드러낸다? 오히려 손가락질 받고, 자신은 물론 가족의 운명까지 걸어야 하는 엄청난 일이야. 게다가 상대는 경찰이야. 하지만 인숙 씨는 자신이 당한 성고문을 폭로하기로 결심했어. 왜? 내가 침묵하면, 그 처참한 짓을 누군가에게 되풀이할 테니까.

"폭로에 관해서는, 저로서는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굉장히 명확한 일이었어요. 경찰이 이렇게 까지 잘못한 일을 겪고 알리지 않는 것은, 제 생각에서는 옳지 않았어요."

-권인숙, 부천서 성고문 사건 피해자

인숙 씨는 공문서 위조 혐의로 구치소에 수감된 상태야. 그럼 어떻게 세상에 알릴 수 있을까? 자신을 도와줄 사람을 만나야 해. 그래서 만나게 된 사람이, 바로 조영래 변호사야.

▲ 법정 싸움의 시작, 뻔뻔한 가해자들

인숙 씨가 본 조 변호사의 첫인상은, 뭔가 믿음직스럽지 못 했대. 헝클어진 머리, 엉성하게 맨 넥타이, 낡아빠진 구두를 신은 모습이 '이 사람 변호는 잘할 수 있나' 싶을 정도였대. 사실 조 변호사는 어렸을 때부터 문제아 중에 문제아였대. 고등학생 때, 한일회담 반대 시위에 나섰다가 정학까지 먹었어. 근데 더 특이한 건, 그러고도 '서울대 법대 수석'으로 신문에 이름이 난 거야. 심지어 평소 그가 공부하는 걸 거의 본 적 없는데도 서울대를 떡 하니 수석으로 입학한 거야. 기자가 수석 합격 소감을 물으니, "뭐 대단한 일입니까? 그저 운이 좋은 덕이지요"라고 말했다고 해. 대학교에 간 조 변호사는 공부보다 시위에 더 열심이었어. 그런 와중에도 최소 3~4년이 걸린다는 사법고시를 1년만에 합격했어. 그야말로 천재야.

그런데 이렇게 엄청난 스펙의 조 변호사가 변호한 사람들은, 거대 권력에 맞서는 소시민들이었어. 늘 약자의 편에 섰던 거야. 망원도 수재 사건, 대우어패럴 사건, 진폐증 박길래 사건 등을 변호했어. 얼마 전에 변호한 사람은 23살의 직장인 여성이야.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택시에 치였는데, 사고 후유증이 심해 회사를 그만들 수 밖에 없었어. 그래서 택시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어. 그랬더니 법원에서는 이런 판결을 내렸어.

"여성의 정년(퇴직 연령)은 25세다"

여성은 보통 결혼하면 회사를 그만둔다, 한국 여성 평균 결혼 연령은 26세다, 그러니 여자의 정년은 25세다, 그래서 2년치 수입만 배상받아라는 취지의 판결이야. 지금은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당시 이 여성은 항소할 생각도 못 했대. 그런데 조 변호사가 등장해서 이 판결을 멋지게 뒤집은 거야. 여성의 정년도 남성과 똑 같은 55세라고. 그럼 조 변호사의 수임료는 얼마였을까? '빵원'이었어. 이 사건은 여성의 권익 전체를 대변하는 공익사건이기 때문에, 무료 변론을 한 거야.

이런 조 변호사가 경찰로부터 끔찍한 일을 당한 인숙 씨를 변호하러 나타난 거야. 인숙 씨는 문 경장을 강제추행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어. 조 변호사를 포함해 9명의 변호인단도 꾸려졌어. 변호인단은 고발장에 문 경장과 이 성고문을 지시하고 가담한 경찰들 모두를 수사해달라고 썼어. 이건 경찰과의 싸움이자, 5공 정권과의 정면 대결이야.

성고문 사건에 대한 검찰 조사가 시작됐어. 인숙 씨는 포승줄에 묶인 채 구치소와 검찰청을 오가면서 피해자 조사를 받았어. 조사를 받으며 떠올리기 조차 힘든 성고문의 순간을 반복해서 진술해야 했어. 피해자로서 너무 힘든 과정이야. 인숙 씨는 견디고 견뎠어. 진실을 밝혀 가해자를 처벌해야 하니까. 그런데 가장 끔찍한 순간이 다가와. 가해자와의 대질심문이야.

문 경장이 당당하게 검사실로 들어와 인숙 씨 옆에 앉았어. 그러더니 당당하게 "전 성고문을 한 사실이 없습니다"라고 말해. 자기는 6월 7일 저녁에 딱 한차례 두시간 가량 조사한 게 전부래. 첫번째 성고문이 있었던 6월 6일은 휴일이라 출근도 안 했대. 그날 유원지에 놀러갔고, 같이 간 친구들이 알리바이를 입증해줄거라고 주장했어. 그러면서 자신한테 왜 그런 누명을 씌우는지 모르겠대. 인숙 씨는 문 경장의 뻔뻔한 거짓말에 온 몸에 경련이 오고 손이 뒤틀리기까지 해. 그런데, 이게 문 경장만 그런 게 아니야. 경찰서장부터 형사들까지, 입을 맞춘 듯 똑같이 그런 적 없다고 말해. 더 기가 막힌 건, 문 경장도 검찰에 인숙 씨를 명예훼손과 무고죄로 고소했어.

검찰은 인숙 씨와 경찰들 중에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나에 수사 초점을 맞췄어. 그리고 6월 6일 1차 성고문이 있었던 날에 현충일이라서 근무를 안 했다는 말은 너무 허무하게 거짓말로 드러났어. 확인해보니 이날 비상소집이 있어 경찰서장까지 새벽부터 나와있던 거야. 그뿐만이 아니야. 경찰들의 말이 거짓이란 증언이 줄줄이 나와.

"6일이요? 제가 커피 배달을 갔었는데요."

-구대 다방 종업원의 진술

"7일 저녁이요? 권양 그날 밤 늦게까지 유치장에 안 들어왔어요."

-유치장 수감자 진술

모두 인숙 씨의 진술과 일치했어. 검찰도 슬슬 심증을 굳히기 시작해. 문 경장의 친구들을 불러 추궁했더니, 문 경장과 유원지에 놀러갔다고 한 건 거짓말이라 시인했어. 문 경장이 부탁해서 알리바이를 만들었고, 날씨, 출발시간, 저녁식사 장소, 술값 등 아주 세세하게 알리바이를 짜서 같이 입을 맞췄대. 심지어 현장 답사까지 다녀왔어. 이렇게 거짓말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경찰들의 거짓말도 무너지기 시작했어.

경찰의 거짓 주장이 드러나자 검찰은 강제추행 혐의 입증에 자신감을 보였어. 인숙 씨에게 "우리 검찰이 얼마나 공정한지, 알게 될 겁니다"라고 말하기도 했어. 그렇게 검찰 조사가 시작한지 열흘 째, 경찰 중에 한 명이 자백까지 했어. 이대로라면, 곧 문 경장이 구속되고 인숙 씨가 석방될거라는 희망이 보여.

▲ 수사 결과를 뒤집은 검찰, 침묵한 언론

며칠 후, 검찰 수사 결론이 나왔어. 이건 당시 수사 결과를 담은 신문 내용이야.

"검찰, '성적 모욕 없었다' 발표"

"권 양의 고소사실 중 문 경장의 성적모욕을 가했다는 부분은 인정할 수 없으나 폭언, 폭행을 했다는 부분은 일부 사실이 인정된다고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티셔츠를 입은 가슴부위를 3~4차례 쥐어박아 폭행한 사실은 인정된다고 밝혔다. 문 경장이 권 양에게 폭언, 폭행한 것은 조사에 집착한 나머지 우발적으로 저지른 과오로써 문 경장은 이로 인해 10년 이상 경찰에 봉직해 온 경력을 살펴 기소유예 처분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검찰이 경찰의 폭언, 폭행만 인정하고, 그마저도 우발적으로 일어난 실수라고 발표한 거야. 검찰은 문 경장을 기소유예 처분했어. 죄는 있지만 가벼워서 재판에 안 넘긴다는 거야. 즉 법적처벌이 없다는 이야기지. 더 기가 막힌 건, 검찰 발표 뒤에 나온 공안 당국의 분석이야.

"권 양은 급진좌경노선을 신봉하는 행동대원으로서 목적관철을 위해서는 어떠한 방법도 서슴지 않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혁명을 위해서는 성(性)도 도구화 즉, 좌경의식화된 학생들은 성을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자신의 석방 구명을 위하여 사실이 아닌 고문, 폭행, 추행을 날조 주장하도록 철저히 교육받고 있다."

인숙 씨가 혁명을 위해 성까지 도구로 삼는 급진 좌경 세력, 즉 빨갱이래. 석방을 위해 없는 성고문 사실을 꾸며냈다는 거야.

"미친 X이죠. 완전히 제정신 아닌 사람이죠. 혁명을 위해서라면 무슨 거짓말도 할 수 있는 사람같이 그려진 거죠. 그 정도의 거짓말을 하면서 자기를 희생할 사람이 누가 있을지 알 수는 없는데, 그렇게 주장을 하는 거죠."

-권인숙, 부천서 성고문 사건 피해자

그렇게 열심히 수사하던 검찰이, 왜 경로를 바꿨을까? '보이지 않는 손'이 있었던 거야. 수사결과 발표 직전에 회의가 열렸어. 이른바, '관계기관 대책회의'. 청와대, 안기부, 검찰 경찰 수뇌부들이 다 모인 회의야. 여기서 사건을 덮자는 의견이 나왔어. 결국 전두환 대통령에게까지 보고가 올라갔고, 기소유예로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어. 그렇게 대통령의 결정대로 검찰은 수사결과를 발표한 거야.

검찰 뿐만이 아니야. 수사결과가 발표되던 날의 뉴스 헤드라인을 보면, 이 사건에 대해 '성적모욕'이라고 표현했어. '성고문'이나 '성추행'이라는 단어 대신에. 이것도 역시, '보이지 않는 손'이 한 짓이야. 위에서 '보도지침'이 내려왔거든. 검찰이 발표한 조사결과 내용만 보도할 것, 사회면에서 취급할 것, 검찰 발표 전문은 꼭 실어줄 것, 자료 중 사건의 성격에서 제목을 뽑아 줄 것, 이 사건의 명칭을 '성추행'이라고 하지 말고 '성모욕행위'로 할 것 등, 정부에서 보도를 이렇게 하라고 지침을 내려 준거야.

"당시 보도지침을 내릴 때 '홍보 조종실'이라고 정부에서 근무하면서 그 사람들이 각 신문사 편집국이나 방송사 보도국에 상주했어요. 정권 차원에서 볼 때 자기들한테 유리한 기사는 크게 키우라고 하고. 자기들한테 불리한 기사는 아예 쓰지 못하게 하고. 그런 거였어요. 그 당시에 보도지침 이행률을 비교해보니까 보통 평균 70~80%가 정부 의견대로 다 집행이 됐고, 그리고 일부 신문의 경우에는 90% 이상이 보도지침대로 다 이행된 걸로 나와 있습니다."

-김주언, 당시 한국일보 편집부 기자

"(사건이) 세상에 드러나면 이것도 또 다른 폭발성 있는 사건일 수 밖에 없으니까, 부천서 사건을 철저히 막으려고 했고. 막는 정도가 나중에는 사건 조작까지 한 거죠."

-황호택, 당시 동아일보 기자

이런 보도 지침은 인숙 씨가 고발한 그날부터 한달간 매일같이 내려왔어. 언론사들은 그걸 충실히 지켰어. 신문을 읽은 일반 대중들은 '권 양이 거짓말을 하고 있나보다, 정말 성고문이 없었나보다'라고 생각하고 이 사건의 진상을 알 길이 없어. 검찰은 스스로 수사 결과를 뒤집었고, 언론은 침묵했어.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 조영래 변호사가 사건의 진상을 직접 알리고자 나섰어.

▲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글

검찰에 제출한 변호인단의 고발장이야. 사건의 진상을 정확히 알리는 고발장으로, 조영래 변호사가 직접 썼어. 읽기만 해도 '나쁜놈들'이란 말이 절로 나오게, 굉장히 설득력 있게 썼어. 조 변호사는 이 고발장을 복사해서 뿌렸어.

"워낙 이건 진실로 믿을 수 밖에 없도록, 그것도 굉장히 설득력 있게 딱 한 장에 읽을 수 있게. 10만부를 인쇄해서 전국적으로 배포했죠."

-박석운, 당시 조영래 변호사 사무실에서 근무

효과는 바로 나타났어. 고발장을 읽고 분노한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메웠어. 그렇게 고발장은 복사에 재복사를 해서 전국으로 퍼져 나갔어. 시민들은 "문 경장을 구속하라!", "성고문 자행하는 전두환 정권 타도하자!"라고 외쳤고, 부천경찰서로 몰려가서 항의하고 검찰청에 시너를 들고 가서 불도 질렀어. 조 변호사가 쓴, 글의 힘 덕분이야. 조 변호사는 이 소식을 감옥에 있는 인숙 씨에게도 전했어. 인숙 씨의 용기가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걸 알려준 거야.

"저로서는 어려운 결정을 한 건데. 그래도 이 사건이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는데 역할을 하고 있구나, 라는 건 저로서는 의미 있게 받아들여지죠."

-권인숙, 부천서 성고문 사건 피해자

1986년 11월 21일 새벽, 몇시간 후면 인숙 씨의 공문서 사문서 위조죄에 대한 결심 공판이 열려. 조 변호사의 책상 위에는 자료가 어질러져 있고 재떨이에는 꽁초가 수북해. 변론서를 쓰는 중이야. 이게 바로 조 변호사가 쓴 변론서야.

최선의 변론을 위해 고민한 흔적들. 지우고 다시 추가하고, 단어를 고르고 골라 신중히 써 내려간 글. 기필코 이겨야겠다는 비장함까지 느껴져. 조 변호사는 꼬박 밤을 새워가며 변론서를 고치고 또 고쳤어. 조 변호사는 그렇게 완성된 원고를 들고 법정으로 향했어. 인숙 씨는 호송차를 타고 법원으로 왔어. 호송차에서 내리자 플래시가 터져. 재판을 보러 온 방청객도 엄청 많아.

"사람들도 언론도 너무 많고 전경들도 많이 와 있고. 어마어마한 행사였어요. 이 사건이 커지길 바랐지만 한 개인이 감당한다는 게 그 때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역사가 너무 무겁다, 내가 감당하기에 너무 무겁다. 힘들고 불편하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권인숙, 부천서 성고문 사건 피해자

인숙 씨가 법정에 들어섰어. 방청석에 앉아있는 부모님이 보여. 몇 달 사이 머리가 하얗게 새셨어. 인숙 씨가 피고인석에 앉았고, 그 옆에 변호인석에는 조영래 변호사가 앉았어.

검사는 "피고인은 본 사건과 관련 없는 수사 과정상의 일을 계획적으로 울먹이며 과장된 진술을 하는 등의 태도를 보이는 등, 정상참작의 여지가 없습니다"라며 인숙 씨에게 무거운 형량을 내려달라 요구했어. 변호인 측도 최후변론을 하라는 이야기에, 조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섰어.

"변호인들은 먼저 이 법정의 피고인석에 서있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권 양,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기를 삼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이 사람은 누구인가. 온 국민이 그 이름은 모르는 채 그 성만으로 알고 있는 이름 없는 유명 인사. 얼굴 없는 우상이 되어버린 이 처녀는 누구인가. 국가가 사회가 우리들이 그녀에게 무엇을 하였으며 지금까지도 하고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눈물 없이는 상기할 수 없는 권 양의 투쟁, 어떤 오욕과 탄압으로도 끝내 꺾을 수 없었던 그 불굴의 용기와 진실을 위한 눈물겨운 헌신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이런 조 변호사의 변론은 굉장히 독특해. 대부분 '피고는 이러저러해서 무죄다', '뉘우치고 있으니 선처해달라', 이렇게 말하는 게 보통인데, 조 변호사는 인숙 씨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어. 인숙 씨가 어떻게 자라왔고 왜 사회에 분노했으며, 왜 신분을 숨기면서까지 공장 노동자가 되려고 했는지를 말해. 어떤 글은 보이지 않는 손이 시키는 대로 인숙 씨가 성까지 도구로 삼는다며 짓밟는데, 조 변호사의 글은 인숙 씨를 인정하고 살려내려 애쓰고 있어. 이런 조 변호사의 변론을 들으며 인숙 씨는 눈물을 흘렸어. 처음으로 위로받는 느낌이었대. 인숙 씨 뿐만이 아니야. 방청객들도 훌쩍이고, 변론서를 읽는 조 변호사도 눈물을 흘렸어.

"그 때 조 변호사님이 읽다가 막 우시더라고요. 그 분한테는 이게… 온 마음을 다 바쳤던 사건이었고. 너무너무 잘 쓰셨잖아요. 변론서를 너무 잘 써 주셨고, 저에 대한 깊은 책임감, 애정, 이런 것들이 담겨있었던 것 같고요. 그 변론은, 굉장히 위로가 되는 변론이었죠."

-권인숙, 부천서 성고문 사건 피해자

변론서의 뒷부분은 이래.

"이 재판은 거꾸로 된 재판입니다. 여기에 묶여 서서 재판 받아야 할 것은 이 연약하고 순결무구한 처녀가 아니라 바로 이 처녀에게 인간의 탈을 쓰고서 차마 상상할 수 없는 추악한 만행을 저지른 문 경장, 아울러 문 경장의 범행을 교사, 방조하였던 모든 사람들, 문 경장을 비호하고 그 범행을 은폐하려고 들었던 모든 사람들이 여기에 서서 재판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재판부는 공문서 사문서 위조죄로 인숙 씨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어.

"1심 선고를 실형을 때리더라고요. 기가 막힐 일이에요. 저도 충격을 받았고 조 변호사님은 오죽하겠습니까.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느냐. 진실에 눈 감겠다는 작심만 안 하면 뭐가 진실인지 뻔히 아는 그런 상황인데. 실형을 선고한 걸 보고 그러시더라고요."

-박석운, 당시 조영래 변호사 사무실에서 근무

인숙 씨는 차가운 감옥에 갇혔어. 정말 화가 나는 건, 간간이 들려오는 문 경장의 소식이야. 개인사업을 하면서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와. 이대로,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는 걸까? 조 변호사는 법원에 집요하게 요청했어. 검찰의 기소유예 결정은 잘못됐다, 가해자를 법정에 세워달라고. 이 재정신청서에 무려 166명의 변호사가 이름을 올렸어. 이건 우리 사법사상 처음 있는 일이야. 인숙 씨의 용기와 조 변호사의 노력으로, 단단하던 5공 정권도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했어.

▲ 드디어 재판장에 세운 가해자

성고문 사건을 계기로 보도지침이 폭로됐고, 다음해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벌어지면서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졌어. 민주화의 열망이 들불처럼 번졌어. 1년 후, 1988년 4월 9일 이런 뉴스가 나왔어.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담당 재판부인 인청지방법원은 오늘 문귀동 피고인을 직권으로 구속했습니다."

사건발생 1년 10개월만에 인숙 씨와 변호인단의 요청이 받아들여진 거야. 이제 문 경장의 죄를 물을 수 있게 됐어.

한달 후, 성고문 사건 첫 공판이 열렸어. 아침부터 법원에는 방청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어. 그리고 드디어, 수의를 입은 문 경장이 호송차에 내렸어. 인숙 씨는 사복을 입고 재판에 참석했어. 인숙 씨와 문 경장의 상황이 뒤바뀌었어. 문 경장, 성고문 사실 인정했을까.

"지금 민주화 시대 외치니까 저도 이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겁을 준 것도 없고. 성고문이라는 말 자체가, 나는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성고문한 사실도 없고, 일절 손 하나 댄 사실도 없습니다."

-문귀동, 성고문 사건 가해자

문 경장은 뻔뻔하게 성고문은 커녕, 몸에 손 한 번 댄 적도 없다고 혐의를 부인했어. 심지어 '가슴부위를 쥐어 박았다'는 검찰 발표마저 부인해.

"그건 위에서 치안본부장하고 다 그렇게 조용히 끝내기 위해서 서 너대 때렸다고 그래라, 그러니까 제 자의가 아닙니다. 전부 다."

-문귀동, 성고문 사건 가해자

죄의식도 없고 위축된 기색도 전혀 없어. 심지어 자신은 상관의 지시로 죄를 뒤집어 쓴 '속죄양'이래. 재판이 끝나고 문 씨를 태운 차가 법원을 빠져나가려는 그 순간, 흥분한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차 앞을 가로 막고 유리창을 부수면서 분노를 쏟아냈어. 국민의 분노는 들끓고 문 경장을 처벌하라는 목소리는 높아졌어.

결국 문 경장에게는 징역 5년이 선고됐어. 형량에 대해 아쉽다는 의견도 있는데, 인숙 씨는 그저 진실을 인정받은 것만으로 기뻤대.

"그 소식 많이 반가웠죠. (사회에) 나왔을 때 나를 불신하는 눈이 제일 힘들거든요. 그런 거를 완벽하게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결정들이 갖는 의미는 정말 커요. 한편으로는 마음에 안도감이 생기죠."

-권인숙, 부천서 성고문 사건 피해자

처음 피해 사실을 털어놓은 그날부터, 문 경장을 법정에 세울 때까지. 인숙 씨 곁에는 늘 조 변호사가 있었어.

"(수감되어 있을 때) 최소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오셨던 것 같은데요. 늘 오셨고, 오시면 한 3~4시간 있다가 가시고. 제가 이걸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려고 하고 책임감을 가지면서 보살펴주신 것 같습니다."

-권인숙, 부천서 성고문 사건 피해자

▲ 전태일 평전을 쓴 변호사

조 변호사는 그런 사람이었어. 상대가 불편하지 않게 조용히 챙겨주는 사람. 10년 전에 순애 씨 기억나지? 그 때도 그랬대. 딱 한 번 조 변호사가 약속 장소를 바꾼 적이 있어. 묘 앞이 아니라, 시내 빵집에서 보자고 한 거야. 순애 씨가 그 빵집에 갔더니, 조 변호사가 웬 낯선 여자와 같이 앉아있었대. 여자는 순애 씨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먼저 나가버렸어.

"나중에 알았는데, 의사 선생님이 나를 눈으로 일단 진찰을 한 거예요. 그래서 (의사 선생님이) 조 변호사님한테 엑스레이를 찍어봐야겠다고 답을 주셨나 봐요. 엑스레이 찍으니까 결핵이더라고요."

-신순애, 당시 평화시장 여공

당시 평화시장 여공들 중에는 결핵을 앓는 사람이 많았어. 열악한 환경에서 못 먹고 못 쉬면서 일하니까. 치료는 물론이고, 검진도 엄두를 못 내. 조 변호사는 알아챈 거야. 순애 씨가 아픈대도 병원에 못 간다는 걸.

"그 당시 저희 월급이 3~4천원 정도 했을 것 같은데 엑스레이 한 번 찍는데 제 기억으로 7천원이었던 것 같아요. 의료보험이 안되니까. 돈을 제가 한 푼도 안 냈어요. 조 변호사님 덕분에 6개월 매일 점심시간 가서 주사 맞고 완치해서 지금도 이렇게 살고 있으니까… 너무 그런 게 감사하죠."

-신순애, 당시 평화시장 여공

순애 씨의 자존심이 안 상하게 하려고, 의사 선생님인 것도 안 밝히고 조용히 와서 체크만 하고 가게 한 배려. 사실 이런 행동은 조 변호사에게도 쉽지 않은 거였어. 당시 조 변호사는 수배 중이라 쫓기는 몸이었잖아.

그럼 조 변호사가 검거 위험을 무릅쓰고 순애 씨를 만난 이유는 뭘까? 바로 이 사람 때문이야.

전태일 열사. 열악한 노동 현실을 알리려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인 평화시장의 노동자. 조 변호사와 전태일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던 모르는 사이야. 한 사람은 서울대 법대생이고, 한 사람은 초등학교도 못 나온 노동자니까 만날 일이 없지. 전태일이 분신했을 때 조 변호사는 산속에 있는 암자에서 사법고시를 준비 중이었어. 그런데 청계천에서 한 노동자가 근로기준법 책을 안고 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책을 덮고 빈소로 달려갔대. 거기서 조 변호사는 충격적인 말을 듣게 돼.

전태일은 생전에 근로기준법 책을 읽으려고 밤새 씨름하다가 이런 말을 했대. "어머니, 대학생 친구가 한 명만 있었으면 정말 원이 없겠어요"라고. 근로기준법 책이 내용도 어렵고 한자로 되어 있어 읽기 힘드니까, 대학생 친구가 한명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야. 그 때부터야. 조 변호사는 늦었지만 그제라도 전태일의 친구가 되기로 마음 먹었어. 그리고 글을 쓰기 시작했어. 전태일이 남긴 일기와 수기를 읽고 또 읽고, 수배 중에 위험을 무릅쓰고 전태일의 어머니와 여동생을 만났어. 그리고 평화시장의 여공 순애 씨를 만난 거야.

"내가 맨날 이거 써서 뭐하느냐고 하면, 다 쓸 데가 있으니까 쓰지 않느냐고. 태일이 생각이 어떠냐고. 너무너무 사랑이 많고, 없는 사람 불쌍히 여기고, 죽기까지 한 그 사실을. 우리 학생들이 알아야 해서 그런다고…"

-생전 이소선 여사, 전태일 어머니

조 변호사는 그렇게 3년이 걸려 전태일의 삶을 그려낸 평전 원고를 완성했어. 하지만 어렵게 완성한 원고를 책으로 출판할 수가 없었어. 이 원고가 완성된 1976년은 완전 군부독재 시대야. 이런 책의 출간은 절대 꿈도 못 꿔. 책은 바다 건너 일본에서 일본어로 출간됐어. 저자의 이름도 가명을 썼어. 한국에서 출간된 건 그 5년 후인 1983년. 이때도 저자의 이름을 밝히지 못했어. 책은 나오자마자 판매금지, 금서가 됐어. 하지만 다들 몰래몰래 집에서 읽었어. 출판사에는 독자들의 전화와 편지가 끊이지 않았대. 밤새 눈물을 흘리며 읽었다며, 도대체 이 책을 쓴 저자가 누구냐고 다들 궁금해 했어. 이 책이 금서에서 해제된 건 1987년이야. 조 변호사는 이제 자신이 저자라고 밝혔을까?

"조 변호사님은 자기의 성취와 관련해서는 아무 얘기도 안 하시는 분이세요. 전태일 평전을 본인이 쓰셨는데 그 얘기는 절대 하지 않으셨어요. 몰랐었어요."

-권인숙, 부천서 성고문 사건 피해자

▲ 자신이 쓴 좋은 글처럼, 삶을 대했던 사람

1990년 12월. 평소처럼 라디오를 틀어놓고 일하던 순애 씨는 미싱을 돌리던 손을 멈췄어. 라디오에서 이런 뉴스가 흘러나온 거야.

"인권변호사인 조영래 변호사가 오늘 새벽 0시 10분쯤 향년 43세로 지병인 폐암으로 사망했습니다."

"미싱하고 있는데 라디오 방송에서 돌아가셨다고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아는 그 조 변호사가 아니기를 기도하면서 갔는데 그 분이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많이 울었죠. 너무 죄송해서. 저 아픈 건 챙겨주셨는데, 마지막 아프실 때 제가 기도한 번 못 해드린게 지금도 너무 미안하죠."

-신순애, 당시 평화시장 여공

1990년 12월 14일, 조 변호사의 영결실이 진행됐어.

"변호사님을 만나면 만날수록 저는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조 변호사님이 제가 당한 성고문 사건을 얼마나 깊게 아파하셨는지 그리고 더럽혀질 대로 더럽혀진 이 사회에 얼마나 크게 분노하고 통탄하고 계셨는지 알 수 있었고 그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진실로 제 사건을 조금이라도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하여 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변호사님 차지입니다."

-권인숙, 故 조영래 영결식에서

부도덕한 권력에 결코 굴하지 않고 늘 약자의 편에 섰던 조영래 변호사. 타인을 먼저 생각하고 다정했던 따뜻한 문장가. 그가 마흔 셋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어.

조 변호사가 떠나고 한 달 후, 이 책이 세상에 나왔어. 조영래 라는 저자 이름이 쓰인 전태일 평전이야. 순애 씨는 깜짝 놀랐어. 조 변호사가 이 전태일 평전의 저자라는 사실도, 과거 자신을 만난 이유도 이제야 알게 된 거야. 더 놀라운 건, 조 변호사는 순애 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 번도 메모를 한 적이 없다는 거야. 순애 씨가 불편해 할 까봐 메모를 하지 않았는데, 그런데도 순애 씨가 한 말이 마치 녹음한 것처럼 책에 담겨 있다는 거야.

"'미싱사의 손가락 끝은 살갗이 닳고 닳아서 지문이 없다. 자크를 달 때에는 둘째와 셋째 손가락이 끝이 빨개져서 누르면 피가 솟아나올 정도다' 이런 건 제가 한 이야기인데, 그걸 실제로 썼죠. 토시 하나 안 틀리고."

-신순애, 당시 평화시장 여공

평전에는 전태일의 짧지만 치열했던 삶, 그리고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잘 드러나 있어. 그건 조영래 변호사의 삶이기도 해. 이건 조 변호사가 사법연수원 시절에 검사시보를 할 때 쓴 글이야.

"내가 하려고 하는 제일보는 피의자 또는 참고인, 가족들에게 친절히 대하는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라도 친절한 자세를 흩뜨리지 않도록, 어떤 경우에도 조금이라도 권력을 가진 자의 우월함을 나타내거나 상대방을 위축시키거나 비굴하게 만드는 일이 없도록, 다른 것은 다 못하더라도 이것만 해낼 수 있다면 더 이상 좋을 수가 없겠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아도 좋다고 한다면 인간성에 거는 우리의 모든 신뢰와 희망은 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오늘 소개한 조영래 변호사에 대한 이야기는 빙산의 일각이야. 조 변호사가 변호사 생활을 한 건 7년 정도인데, 이 분이 한 일이 너무 많아. 그 일들이 세상을 조금 더 나은 모습으로 바꿨어. 좋은 글은 쓸 수 있어. 그런데 본인이 쓴 좋은 글처럼 행동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 그렇기에 자신이 쓴 좋은 글을 행동으로 옮긴 조 변호사는 우리에게 더 귀하고 애틋한 존재야.

마지막으로 조변이 아들에게 쓴 엽서를 소개할게.

"아들에게. 앞의 사진은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다. 아빠가 어렸을 때는 이 건물이 세계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었다. 아빠는 네가 이 건물처럼 높아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세상에서 제일 돈 많은 사람이 되거나 제일 유명한 사람, 높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작으면서도 아름답고 평범하면서도 위대한 건물이 얼마든지 있듯이 인생도 그런 것이다. 건강하게 성실하게 즐겁게 하루하루 기쁨을 느끼고 또 남에게도 기쁨을 주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실은 그것이야말로, 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처럼 높은 소망인지도 모르겠지만…"

-1990.1.18. 아빠가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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