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타트업 창업과 투자의 세계에서 가장 흔한 말은 “사람을 본다”였다. 그러나 이제 투자자들은 사람보다 먼저 ‘데이터’를 본다. 인공지능(AI) 시대 기업의 모든 활동이 디지털로 기록되는 가운데 이력보다 숫자, 직관보다 지표가 더 빠르게 기업의 성장 가능성을 설명하고 있다. 이젠 투자와 창업 모두 정량적 근거와 데이터 흐름 속에서 전략이 나온다.
AI, 기업 성장 가능성 먼저 발견
지난 24일 서울 팁스타운 명우빌딩 유니온스퀘어에서 열린 ‘AC의 미래! AI와 벤처스튜디오?’ 세미나에서는 이 같은 변화가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 접근이 제시됐다. AI와 데이터 분석 기술이 실제 투자 실무에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기존의 ‘사람 중심’ 투자 관행이 어떤 한계에 부딪혔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공유됐다.
발표자로 나선 홍경표 마크앤컴퍼니 대표는 “성장이라는 건 과거와 현재가 달라졌다는 뜻”이라며 “그 변화가 데이터에 명확히 드러나 있어야 성장하는 기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기업의 경영 활동 전반이 데이터로 기록되는 시대인 만큼, 투자자는 그 변화의 흔적을 수치로 먼저 읽어낸다는 설명이다.
홍 대표는 이러한 분석이 단지 이론에 머무는 것이 아닌 실제 투자 실무에 적용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실제 마크앤컴퍼니는 ‘혁신의 숲’이라는 스타트업 데이터 분석 플랫폼을 운영하며 사용자 수 변화와 고용 증가, 매출 흐름 등 다양한 정량 지표를 통해 기업의 성장을 추적하고 있다.
마크앤컴퍼니는 ‘혁신의 숲’이라는 스타트업 데이터 분석 플랫폼을 운영한다. 매일 수천 개의 기업 정보를 수집하고 정량화된 지표로 기업의 성장 가능성을 판단한다. 홍 대표는 “매일 수백 개의 기업이 탄생하고 사라지지만, 우리가 이 모든 기업을 다 인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이런 현실에서 데이터와 AI를 활용한 투자 방식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같은 데이터 기반 시스템은 단순한 기술 도구가 아니라 투자 전략 자체를 바꾸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홍 대표는 투자 접근 방식이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고 설명했다. 기업별 성장 지표를 분석하는 ‘바텀업(bottom-up)’과 산업 흐름과 글로벌 자본 동향을 기반으로 유망 분야를 식별하는 ‘탑다운(top-down)’ 전략이다.
바텀업 전략은 사용자 수, 매출, 고용 등 기업의 실제 성과 지표를 기반으로 성장 가능성을 분석하는 방식이다. IT 서비스, 커머스, 소비재, 플랫폼 기업 등 경영활동이 비교적 명확히 드러나는 분야에서 주로 활용된다. 반면 탑다운 전략은 기술·산업 트렌드와 해외 벤처캐피탈의 투자 흐름을 미리 분석해 유사한 국내 기업을 선제적으로 발굴하는 접근이다.
홍 대표는 “딥테크 영역은 미국에서 먼저 기술 투자가 일어나고 국내까지 영향을 미치는 데 3~5년이 걸린다”며 “글로벌 VC의 초기 투자 데이터를 추적하면 다음 흐름에 올라탈 수 있는 국내 기업을 미리 찾아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투자 실무도 '디지털 전환'
투자 기준이 정량 분석으로 이동하고 있다면 투자 실행과 관리 방식도 동시에 디지털화되고 있다. 보고서 작성, 실사, 성과 관리 등 이른바 ‘백오피스’ 영역에 자동화 도입이 가속화되는 추세다.
이어진 발표에서 함세희 팩트시트 대표는 AI를 활용한 투자 백오피스 자동화 시스템을 소개했다. 함세희 팩트시트 대표는 “기존에는 사람이 엑셀로 하던 것을 시스템이 대신할 수 있다”며 “표준화된 데이터를 기준으로 투자 이후 필요한 모든 문서를 자동 생성하도록 설계돼 있다”고 언급했다.
팩트시트는 포트폴리오 관리 시스템과 유한책임출자자(LP) 관리 시스템을 동시에 제공하는 플랫폼이다. 투자사의 IR 요청, 재무지표 관리, 월별 보고 등의 업무를 정형화된 구조로 처리하며, 한국벤처투자(KVIC)의 벤처투자정보시스템(VITIS)과 연동해 보고서 자동 제출도 가능하다. 현재 51개 투자사가 해당 시스템을 도입해 사용 중이다.

함 대표는 시스템의 효율성에 대해 “주니어 투자 담당자가 한 개 기업에 보고서를 쓸 때 보통 8시간이 걸리지만, AI 데이터를 활용하면 12분 만에 기초 보고서를 만들 수 있다”며 “보고서를 생산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걸 어떻게 실행단에 넘기고 데이터로 전환하느냐가 핵심”이라고 덧붙였다.
‘좋은 사람’보다 ‘좋은 아이템’… 벤처스튜디오 주목받는 이유
이에 창업 방식에 대한 접근도 달라지고 있다. 기존처럼 창업자가 아이디어를 들고 팀을 꾸리는 방식이 아니라, 투자자가 먼저 문제를 정의하고 사업 아이템을 설계한 뒤 그에 맞는 인력과 자본을 결합해 창업을 실행하는 방식이 언급된다. 김진영 더인벤션랩 대표는 이날 세미나에서 이 같은 방식의 사례로 ‘벤처스튜디오’ 모델을 소개했다.
김 대표에 따르면 벤처스튜디오 모델은 ‘좋은 사람’에 집중하지 않는다. 초기부터 투자자가 주도해 아이템을 발굴하고, 팀 구성과 사업화까지 직접 설계하는 창업 방식이다.
그는 “벤처스튜디오는 처음부터 투자자가 공동 창업자처럼 참여해 시장을 데이터로 분석하고, 유망한 아이템을 자체 발굴해 팀 구성부터 사업화까지 전 과정을 설계·운영하는 형태”라며 “창업자가 아이디어를 발굴하고, 고객 검증부터 팀 구성까지 모든 과정을 혼자 감당하는 전통적인 방식과 완전히 다르다”고 강조했다.

벤처스튜디오는 데이터 기반 투자 환경에 특화된 창업 모델이기도 하다. 모든 경영 활동이 정량화되고 산업과 시장의 변화를 지표로 포착할 수 있는 만큼, 창업 단계부터 투자자가 데이터로 접근하는 방식이 불확실성을 줄이거나 실행 속도를 높이는 데 유리하다는 설명이다.
다만 김 대표는 이 모델이 잘 작동하려면 창업 이후의 회수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뒷받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벤처스튜디오는 대부분 끝까지 보유하는 방식이 아니라, 3년 안에 기업가치 200억~300억원 수준에서 회수하는 모델”이라며 “미국, 일본과 같이 인수합병(M&A) 시장이 활성화된 나라일수록 이 모델이 안정적으로 돌아간다”고 말했다.
박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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