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시리즈 중계방송 후기 - 우승콜 작성기

"5차전에 뵙겠습니다."

잠실에서의 2차전 중계방송을 마치고 관성으로 튀어나온 클로징 멘트였습니다.
SBS는 한국시리즈 2차전과 5차전이 생방송으로 잡혀있었거든요.
하고 나니 뭔가 찜찜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엇? 이러면 LG팬들이 싫어하겠는데.'
끝나고 PD들도 제가 악플을 받을까 걱정하더라고요.
다행히 저 클로징 멘트에 악의를 가지고 저를 대하시는 LG팬들은 없었습니다.
저도 한마디 한마디에 조금 더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만일 5차전에 가게 된다면'이라고 한 마디만 전제를 달았더라도 끝나고 혼자 전전긍긍을 하지는 않았을 텐데 아쉽더라고요.
하루 쉬고 이어진 3차전에서 한화가 승리하고 나서는 PD들이 저를 놀렸습니다.
"선배 멘트 때문에 5차전에 갔다고 원망하는 거 아니에요?"
당연하게 그런 원망도 듣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여유롭게 저 이야기를 들어주신 LG 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2차전에서 선발투수 류현진을 상대로 결정적인 홈런을 치고 농구 세리머니를 하며 홈을 밟는 LG 박동원 <사진 OSEN>

이후 저는 4차전을 스튜디오에서 열린 중계방송(AKA 입중계)의 형식으로 중계했습니다.
9회에 돌입할 때까지 이 시리즈는 2승 2패로 5차전을 맞이하게 될 것이 거의 확실해 보였습니다.
승리확률(winning probability)로 보더라도 한화가 석점을 앞선 상태로 9회초를 돌입할 때 LG 트윈스의 승리확률은 4.3%에 불과했습니다.
무사에 박동원 선수에게 투런홈런을 허용했을 때만 해도 LG의 승리확률은 18.5%.
한화의 입장에서는 불안하기는 했어도 여전히 유리했습니다. 그리고 김서현이 8번타자 천성호를 아웃카운트 처리하면서 한화의 승리확률은 89.7%로 다시 높아졌습니다.

2023년에 이어 경기 후반 홈런으로 4차전 승리의 발판을 만든 LG 트윈스의 미스터 옥토버 박동원 <사진 OSEN>

신민재 선수가 두 번째 아웃카운트로 기록될 때만 해도 여전히 한화의 승리확률은 80%를 상회했습니다. 이 경기에서는 김현수의 2사 역전타가 가장 큰 승리확률의 플러스 폭을 나타낸 순간이었습니다. LG 트윈스의 승리확률을 무려 59%를 끌어올리면서 78.8%로 높였으니까요. 이닝을 끝낼 때는 트윈스의 석점 리드로 승리확률이 무려 94.6%까지 높아졌습니다. LG 트윈스의 승리로 경기가 끝나고, 5차전 생중계가 결정이 됐습니다. 동료들이 다들 지나가면서 한 마디씩을 툭툭 던졌습니다.
"우승콜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내일 우승 나오겠네. 나오면 우리 우승콜 생방송이 11년만 아닌가?"

4차전 결승타의 주인공 LG 김현수 <사진 OSEN>

집에 돌아와 보니 카카오톡에 지인들의 톡이 수두룩하게 도착해 있었습니다.
주로 주변의 LG 트윈스 팬들이었습니다.
"내일 우승콜 기대해요!"
"LG 우승콜 가자!"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시즌 초반부터 LG가 연승으로 1위를 치고 나갈 때,
또 잠시 빼앗겼던 1위를 연이어서 3연전 우세를 점하면서 5경기 반 차를 뒤집을 때부터 그려 놓았던 이미지는 있었습니다.
'무적 시대의 선언'

우승감독 염경엽 감독 <사진 OSEN>

여기에는 시즌 중 LG 트윈스 중계방송을 하면서 염경엽 감독과 경기 전 미팅을 가질 때마다 염감독이 강조했던 이야기가 포함이 되어있었습니다.
"우리 팀은 올해보다 내년이 진짜야. 전력에 가세할 선수들을 보면 올해보다는 내년이 더 강해질 거라고."
이 시점에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만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LG가 강팀으로 앞으로도 꽤 오래갈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만약에 우승을 하면 LG 트윈스만이 쓰고 있는 응원구호 '무적'을 우승콜에 꼭 넣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게다가 2020년대 들어와서 2회 우승팀이 없는 가운데서 최초로 2회 우승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무적 시대'는 매우 어울리는 단어의 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잠들기 전, 기승전-'무적시대의 선언'으로 우승콜을 두 개 작성해 두고 잠을 청했습니다.

5차전 LG 트윈스의 선발 톨허스트 <사진 OSEN>

그런데 새벽 5시 반에 눈이 자동을 떠지더라고요.
'이게 맞나?'
일어나서 써둔 글들을 다시 읽어 보는데 '무적시대의 선언'까지 가는데 너무 오래 걸렸습니다.

'만약에 우승을 하면 이걸 앞에서 치자. 미괄식보다는 두괄식이 낫지.'

이렇게 생각하고 다시 잠을 청했습니다. 머리가 복잡하고 어지러워서 그런지 금방 눈이 또 떠지더라고요.
한바탕 유산소 운동을 하고 대전행 기차를 탔습니다.

5차전에서 'KBO 역사상 가장 많이 회자될 파울 타구'를 만드는 LG 3루수 구본혁 <사진 OSEN>

원래 올해 작고하신 고 이광환 감독님의 이야기는 우승콜을 다 마치고 클로징 멘트를 들어가기 전에 짧게 언급하려고 했습니다. 최근 또 고 이광환 감독께서 창립에 깊게 관여하셨던 여자야구의 아시안컵도 다큐멘터리를 위해서 중계중이었거든요.
대전으로 가는 열차 안에서 시간 배분을 위해서 지상파 PD에게 문의를 하니 끝나고 뉴스가 바로 이어져야 해서 마지막 아웃 카운트가 잡히고 클로징까지 여유 시간이 2분 정도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계산 밖의 상황이 펼쳐진 겁니다.
감독님의 이야기를 우승콜에 넣기로 했습니다.

특별한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고 이광환 감독께서는 올시즌 LG 트윈스의 개막전 시구를 하셨는데, 그의 시구로 시작한 시즌이 LG의 우승으로 끝나게 되는 거잖아요.

2025년 3월 22일, 잠실에서 LG의 개막전 시구를 맡았던 1994년 LG 트윈스의 이광환 전 감독은 올해 7월 2일 제주도에서 영면하셨습니다. <사진 OSEN>

처음 우승 결정이 되자마자
'무적시대의 선언'을 강하게 때리고
이후 두 가지 버전을 생각했습니다.
강하게 때리는 버전 하나.
그리고 낮게 깔고 가는 버전 하나.

우승 직후 LG 트윈스 <사진 OSEN>

강하게 때리는 멘트로 생각한 것은
'당신이 뿌린 자율의 씨가 이렇게 컸습니다.
지금!
함께 하고 계십니까!'

였습니다.

우승 꽃가루 <사진 OSEN>

톤을 낮게 가는 버전은
'함께 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애타게 무적을 외친 당신의 마음과
사랑한다 밤새워 노래한 당신의 마음이
그리고 이 땅에 자율의 씨를 뿌리고 떠난
당신의 마음도
지금 이 순간 하나됨을 믿습니다.'

우승 시상식 <사진 OSEN>

열차 안에서 여기까지 작성해 두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경기 생중계에 들어갔죠.
5회를 마치고 클리닝 타임.
이제는 결정을 해야 했습니다.
물론 한화도 계속 기회를 잡고 있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결정을 해두는 것이 낫겠다 생각을 했고, 패드를 열어 두 멘트를 비교를 해봤습니다.
그런데 강하게 때리는 버전은 왠지 2011년 삼성 라이온즈의 통합우승 당시 한명재 캐스터의 전설적인 우승콜
'보고 계십니까! 들리십니까! 당신이 꿈꿔왔던 그 순간!'
을 너무 따라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낮게 가기로 했습니다.

제 목소리를 믿고, 마이크를 믿고, 또 낮은 목소리가 더 큰 울림을 줄 수 있다는 선배들의 가르침을 믿었습니다.

한국 시리즈 종료 직후 안타까운 표정의 와이스(좌), 폰세(중), 손아섭(우) <사진 OSEN>

그리고 11년 만에 생방송에서 우승콜을 담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오랜 LG 팬분들은 좋아하시더라고요.
그 전날 우승콜 기대한다는 연락보다 더 많은 연락을 받았습니다.
반면 좀 텐션 높은 콜을 기대했던 분들이나 고 이광환 감독에 대해 모르는 분들은 심심하다는 생각도 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실 분들을 위해서 앞의 '무적 시대의 선언'을 최대한 강하게 했던 건데요. 확실히 계산과 실제는 다르게 들렸을 수도 있으니까요.

아무튼 제 진솔한 마음을 전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습니다.

시상식이 끝나고 꽃가루만 남은 한화생명이글스파크 <사진 본인>

저도 서울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주변에 청룡에서 트윈스로 이어지는 팬들이 참 많았습니다.
특히 90년대 들어와서 LG 트윈스를 좋아한다는 것은 그 특유의 세련된 핀 스트라이프 유니폼과 함께 마치 X 세대를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또 94년 제 동갑내기인 김재현(현 SSG 단장) 선수가 바로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프로에서 맹활약을 펼치는 모습을 보면서는 놀라움과 부러움이 가득했습니다.
고졸 신인이 마음대로 그라운드를 누릴 수 있었던 데에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고 이광환 감독의 자율야구가 있었고, 그 자율은 팀 LG의 전통이 됐습니다.

저는 30년 전에 뿌려진 '자율'과 지금 '무적'을 외치면서 LG를 사랑하는 팬들을 하나로 연결시켜보려 했습니다.
의도는 이랬지만 받아들이는 분들은 시청자 여러분이고요. 최선을 다했으니 잘 들어주셨기를 바랄 뿐입니다.

LG 트윈스 시절의 '캐넌' 김재현 현 SSG 랜더스 단장 <사진 OSEN>

한 시즌 부족한 중계방송 들어주시고, 또 부족한 글 읽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스토브리그 기간 동안 제가 1년 동안 중계하면서 궁금했던 점과 또 보고 싶었던 선수들 만나면서 또 글 올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SBS스포츠 정우영 캐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