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대통령만 역사를 진전시키는 것은 아니다
이주희 |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신념을 가진 사람이 가장 무섭다. 신념을 가진 사람은 진실을 알고자 하지 않는다”. 니체의 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연상된다. 이태원 참사가 2주기를 맞이하도록 유가족의 간절한 청원에는 눈을 감고 국민의 절대다수가 원하는 부인의 비리 의혹 규명에는 귀를 막으며, 오히려 국민의 합당한 요구를 ‘돌 던지는 일’쯤으로 폄하하고 있다.
평범한 국민이라면 이런 나라에서 행복하기 어렵다. 유엔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가 발간한 ‘2024년 세계행복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는 경제 수준에 비해 행복도가 낮은 나라로, 52위였다. 이번 보고서는 세대 간 행복도 격차에 주목했다. 대통령이 좋아하는 밀턴 프리드먼이 태어난 신자유주의 원조 국가 미국은 이번 해 처음으로 20위권 밖으로 밀려났는데, 청년층의 행복도가 노인층보다 현저히 낮아졌기 때문이었다. 반면, 핀란드는 부동의 1위 국가로, 노르딕 국가는 모두 10위 안에 들었고 세대 간 격차도 크지 않았다. 유럽을 제외한 세계 모든 지역에서 행복 불평등과 양극화가 증가하고 있었다.
북유럽 국가의 국민이 행복한 것은 평등주의에 기반해 부자와 빈자 모두 혜택받는 관대한 복지제도, 진보적인 조세, 노동시장에 대한 규제,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를 자율적으로 선택할 자유, 경쟁이 아닌 숙달 목표만을 추구하는 보편적 무상 교육 등이 존재해서만은 아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양질의 정부를 갖고 있기에 행복하다. 정부의 질은 얼마나 민주적인가와 얼마나 효율적으로 부패 없이 정책을 집행하는가, 이 두가지 기준으로 측정된다. 부패를 최소화하고 완전한 언론 자유를 보장하며, 시민 참여를 극대화할 때 양질의 정부를 보유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윤석열 정부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자질들이다.
그런데, 유능한 대통령만 역사를 진전시키는 것은 아니다. 현 정권의 거친 정치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검찰이 이 정도로 편파적일 줄은, 합리적 보수를 내세우는 젊은 정치인이 이 정도로 기회주의적일 줄은, 국민이 피를 흘려 세운 민주주의가 이 정도로 취약해질 줄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변화에 대한 국민의 열망과 추동력을 제대로 담아낼 수만 있다면, 역설적이지만, 이 정권의 파행은 장기적으로 진보에 가장 큰 혜택을 줄지도 모른다.
보수 여당이 잊은 듯한데, “윤석열이를 좀 올려갖고 한 2% 앞서게 해주이소”에도 불구하고, 지난 대선에서 다수의 표를 얻은 것은 진보였다. 당시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48.56%를 득표해 47.83%를 얻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간신히 이겼지만, 더불어민주당, 정의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노동당 후보의 표를 모두 합하면 50.38%로 절반을 넘겼다.
따라서 실질적인 승패와 무관하게 지난 20대 대선은 진보 세력에 의미가 큰 선거였다. 우리 사회에서 진보가 과반을 이룬 첫 선거였기 때문이다. 대선에서 진보 후보는 보수 여당에 합류하거나(김영삼), 보수 후보와의 연합을 통해 지역 기반을 확장하거나(김대중), 보수 성향의 정치인과 단일화하려는(노무현) 노력을 해야만 대선에서 이길 수 있었다. 진보 진영이 보수와 연합 없이 이긴 적은 탄핵과 같은 거대한 사건이 있었을 때뿐이며, 이때조차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는 41.08%의 득표에 머물렀다. 이 대선에서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 민중연합당 후보는 47.33%를 얻었었다.
그런데, 이번 보궐선거에서는 보수화된 서울조차 진보 교육감을 선택했다. 국민의힘이 이 선거에서 비겼다고 정신 승리할 때가 아니다. 대통령이 눈과 귀를 막고 잘못된 신념을 불태울수록, 여당이 그런 대통령을 계속 싸고돌수록, 앞으로 진보는 더 크게, 더 오래 이길 것이다. 다 국민의 행복을 짓밟는 대통령 덕분이다. 그리고, 그런 대통령을 짓밟고, 역사는 계속 전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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