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 구함: 파란 눈, 검정머리, 대졸자 우대"...우생학은 멀리 있지 않다
현재환 외 7명, '우리 안의 우생학'
키, 몸무게, 혈액형, 민족, 머리카락과 눈 색깔, 아기 때 사진, 질병의 가족력, 취미, 성격, 학력.
유럽의 한 정자은행이 확인할 수 있다고 안내하는 정자 기증자의 정보다. 이 정자은행은 한 가지를 더 제공한다. 어린 시절 사진만 제공하는 다른 정자은행들과 달리 어른이 된 기증자의 사진을 바탕으로 그린 초상화까지 보여준다. 기증자의 정보를 최대한 많이 제공해 정자 구매자의 선택권을 넓히려는 취지다. 유전적으로 뛰어난 정자일수록 당연히 비싸다.
미국과 유럽 등에선 자발적 비혼자나 성소수자의 정자 기증을 통한 임신이 급증하면서 양질의 정자 쟁탈전이 치열하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코로나19 유행이 한창이던 2021년 2월 "시애틀 정자은행에서 '파란 눈, 검정 머리, 잘생긴 대졸자' 광고를 올렸더니 3시간 만에 30명의 예약분이 완판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해외에서는 결혼을 하지 않고 이처럼 정자은행 등을 통해 아이를 낳거나 입양해 키우는 여성을 '초이스 맘(choice mom, single mother by choice)'이라고 부른다.
내면화된 우생학
한국인에게 우생학은 낯선 주제다.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처럼 다른 나라, 다른 시대 이야기로 여기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학살과 같은 거대 악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더라도, 정자은행처럼 아직은 사회의 일부에 국한됐더라도, 우생학적 행동 기제는 한국인의 일상에 뿌리 깊게 스며들어 있다고 책 '우리 안의 우생학'은 이야기한다.
부산대 교양교육원 현재환 교수를 비롯한 8명의 한국 학자는 책에서 일제강점기부터 최근까지 한국 우생학의 역사를 추적한다. 국문학, 사회학, 여성학, 의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전공자가 우생학을 주제로 쓴 8편의 글로 구성돼 있다. 저자들은 머리말에서 "(책을 쓴) 의도는 낙인찍고 비난하는 데 있지 않다"며 "우생학이 어떻게 사회적 약자를 부적격자로 구분하는지, 그로 인한 차별을 어떻게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드는지,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보건, 복지, 교육 등 여러 분야에 녹아들어 한국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차별의 한 양태를 밝히고 문제 삼으려는 것이 목적"이라고 말한다.
차별기제로 작동하는 우생학
우생학은 태생부터 유전과 생식을 통제하는 과학이었을 뿐 아니라 '어떤 것이 적격하고 우월한 몸과 정신인지'의 기준을 정립하고 '열등한 이들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차별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사회적 차별 문제에서 우생학의 관점을 분리할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1973년 제정된 모자보건법에 명시됐던 '장애인 강제 불임 수술 규정'이 1999년 폐기되기까지 수많은 시설 장애인이 불임 수술을 받았다. 한센인 남성들 역시 결혼을 하려면 반드시 정관 수술을 하는 게 관행이었다. 이 같은 생식 개입뿐 아니라 장애인, 한센인, 빈민 등 사회 부적격자로 분류된 계층을 "치료와 돌봄을 표방하며 시설에 수용하는 행위 자체가 우생학적(김재형 한국방송통신대 문화교양학과 교수)"이다.
각종 차별 발언의 뿌리도 우생학적 사고다. 오태원 부산 북구청장이 올 초 "(발달장애인 부모에게) 죄가 있다면 안 낳아야 되는데 왜 낳았노"라고 한 것이나 2010년 국회 이민정책 토론회에 참여한 유전학자가 "우생학적으로 잡종이 우수"하다며 "유전적으로 건강한 다문화 사람들을 선별해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발언한 것은 "한국은 여전히 우생사회임을 잘 보여주는 단면들(현재환)"이다.
"우생학적 사고 경계해야"
초이스맘은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여성의 몸과 재생산에 대한 권리가 확대됐다는 상징이다. 성소수자의 재생산권과도 연결돼 있다. 그러나 "철저히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계획되고 선택된 최상의 결과물"을 내려는 과정에서 "우생학적 선택기제가 개입되고 있다"(이영아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는 사실도 짚어봐야 한다. 이 교수는 "이들(초이스맘)을 옹호하는 과정에서 우리도 모르게 가질 위험이 있는 좋은·나쁜 유전자, 신체, 인종의 구별과 차별을 경계하려는 태도 또한 견지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건강하고, 똑똑하고, 외모가 뛰어난 완벽한 자손 번식을 추구하는 개인의 열망을 비난할 수 없다. 저자들은 다만 이 과정에서 "지향하는 이상적인 사회가 특정한 몸과 집단을 배제할 수 있다는 경각심, 비판, 성찰"이 필요하다고 당부한다. 유전자 조작으로 '맞춤형 아기'가 태어났다는 뉴스가 세계 곳곳에서 들리는 시대에 새겨들어야 할 이야기이다.
송옥진 기자 clic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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