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극기 휘날리며' 동생 진석(원빈)은 임시완이 어떨까 싶어요. 그렇다면, 형은... 조정석이 어떨까 생각도 드네요."
강제규 감독이 밝힌 #AI영화 혁명 #블록버스터의 소멸
백발의 노년 관객이 마이크를 잡았다.
20년 전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보고 받은 감동을 여전히 가슴으로 기억하는 관객은 강제규 감독에게 물었다. 한국전쟁의 비극을 다룬 영화를 연출하던 당시 어떤 심정이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국민들에게" 어떤 좋은 영화를 보여줄지 계획을 궁금해했다.

영화는 관객의 가슴에서 영원하다. 5일 오후 5시30분 부천시청 앞 야외광장에서 열린 'BIFAN 스트리트: 팬터뷰'의 첫날 무대의 주인공인 강제규 감독과 그의 대표작인 '태극기 휘날리며'가 관객의 가슴에 살아 숨쉬는 작품의 가치를 증명했다.
'BIFAN 스트리트: 팬터뷰'는 제2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집행위원장 신철)와 맥스무비가 공동 기획해 올해 처음 선보이는 토크 이벤트다. 'K-무비, Now & Future'의 주제 아래 한국영화의 변화를 이끌면서 동시대 관객을 사로잡은 주역들이 무대에 올라 영화제를 찾은 관객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다.

첫날의 주인공은 한국영화 블록버스터의 시대를 연 강제규 감독. 'K-무비 열다!'라는 주제로 현장을 찾은 관객들과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감독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노년의 관객이 '태극기 휘날리며'를 "국민에게 감동을 안긴 영화"라고 말하는 모습은, 영화의 가치를 새삼 일깨우는 장면이기도 했다.
이에 화답하듯 감독은 "세월이 지나서 '태극기 휘날리며'가 스무 살의 어른이 됐고 철들 나이가 됐다"며 "관객들과 함께 (영화가)환갑이 되고 100살이 되는 순간이 올 것 같다. 세월이 지나도 영화는 살아있으니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감독은 '태극기 휘날리며'의 성공 이후 할리우드의 문을 두드렸던 과정은 물론 AI(인공지능) 기술이 영화 산업에 빠르게 흡수되는 현재 그리고 앞으로 닥칠 미래를 바라보는 시선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이야기를 천천히 풀어냈다. 어디서도 말한 적 없는 배우들에 얽힌 이야기도 꺼냈다.

● '태극기 휘날리며'를 다시 만든다면? 임시완 주목
지난 2004년 2월 개봉한 '태극기 휘날리며'는 한국전쟁의 한복판에 들어선 두 형제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민족에 닥친 비극을 그렸다. 한국영화로는 '실미도'와 더불어 1000만 관객 시대를 연 작품으로 올해 개봉 20주년을 맞았다. 감독은 그 이전 분단 국가의 비극을 녹여낸 첩보액션 '쉬리'(1999년)로 블록버스터의 시대를 열었고, 데뷔작 '은행나무 침대'(1996년)부터 이미 흥행 연출자로 출발했다.
연출작의 잇단 흥행은 그에게 어떤 의미 남겼을까. 감독은 "뼈아픈 경험"이라는 말부터 꺼냈다.
"'은행나무 침대'와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를 연달아 하면서 희망하고 실현하고자 했던 대부분이 이뤄졌어요. 그래서 욕심이 많아지기도 했습니다. 그땐 전산망(극장의 관객 수를 집계하는 공식 통계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부터 한국의 매니지먼트 시스템, 영화 산업의 인프라가 견고하지 않았아요. 제가 해봐야겠다고 생각해 여러 도모를 했지만, 거의 다 이뤄지지 않았아요. 뼈아픈 경험이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것 마저도 값진 경험입니다."
물론 긍정적인 일들이 더 많았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내용 안에 저와 저의 형제들, 아버님의 삶의 과정과 흔적들을 곳곳에 담았어요. '쉬리'가 (한국영화에)터닝포인트를 만들었다면, 무궁무진하게 뻗어 나가는 동력은 '태극기 휘날리며'의 1000만이라는 외형적인 가치가 있지 않았나 싶어요."
당시 감독은 마음에 품은 신념이 있었다.
"할리우드 전쟁 영화도 가치있고 좋지만, 그런 작품을 통해 저는 전쟁은 게임이 아니고 전쟁영화는 영웅이 탄생하는 히어로 무비가 결코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어요. 전쟁은 잔혹하고 무섭고 인간에게 두 번 다시 재현되어선 안 되는 가장 큰 아픔이라는 걸 절실하게 느낍니다. 그래서 '태극기 휘날리며'는 할리우드 영화처럼 권선징악과 히어로의 탄생이 아닌, 모두가 아파하고 가족을 그리워하고 우리 형제끼리 의미없는 이데올로기에 경도됐지만 그게 얼마나 허상이었는지를 보이고 싶었습니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20주년을 맞아 지난달 재개봉해 관객과 다시 만났다. 영화의 주인공인 진태, 진석 형제를 그린 장동건과 원빈의 활약도 다시 주목받았다. 이에 관객들은 영화를 다시 만든다면 어떨지, 형제 역을 맡을 배우로는 누가 어울릴지 상상하고 있다.
이와 관련한 질문에 감독은 잠시 생각을 고르더니 말을 이었다.
"그 당시에 진짜 할 만큼 해봤어요. 140억원의 제작비를 쓸 수 있는 사람이 없었는데 아마도 저는 '쉬리'의 성공으로 가능했겠죠. 지금 영화를 다시 봐도 제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웃음) 그래서 다시 만든다면 어떨까 크게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현재의 CG 기술이 탁월하고 특수 장비들도 당시와 비교가 안되니까...그런 부분을 영화에 접목한다면 굉장히 화려하고 스케일을 확장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하지만 감독은 지난달 재개봉 때 극장에서 영화를 보면서 새삼 "다시는 못할 짓"이라고 생각했다고 털어놨다. "모르니까 할 수 있었다"며 "알고는 두 번 다시 할 수 없는 일"이라고도 했다. 그 불가능한 작업을 가능케 한 것은 "장동건과 원빈이라는 두 배우가 그 시대에 존재했다는 사실"이었다.
"장동건과 원빈 덕분에 오랫동안 사랑받는 작품이 될 수 있었어요. 지금 다시 한다면? 누가 있을까요... '1947 보스톤'(감독의 2023년 연출작) 때 배우 임시완과 작업을 같이 했어요. 동생 진석은 임시완이 어떨까 싶어요. 그렇다면, 형은... 조정석 배우가 어떨까 생각도 드네요."
강제규 감독은 그동안 여러 영화에서 함께 작업한 배우들에 대한 생각도 이야기했다. 특히 감독이 주목한 배우는 박은빈.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했다. 박은빈은 지난해 강제규 감독이 연출한 영화 '1947 보스톤'에서 하정우, 임시완과 호흡을 맞췄다.
"저의 작품은 착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물의)다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작품이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다"고 짚은 감독은 "'1947 보스톤'에 출연한 박은빈 배우를 돌이켜보면 그에게 미안하기도 하다"고 털어놨다. 영화 촬영을 마치고 박은빈이 주연한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보면서 느낀 미안함이었다.
"드라마에서의 모습은 제가 생각한 박은빈이라는 배우와 전혀 달랐어요. '이게 바로 배우이구나' 싶었습니다. 제가 생각한 이미지의 박은빈은 우영우로도 변할 수 있구나. 저에겐 충격이었어요. 다시 한번 배우를 바라보는 경외의 시선을 갖게 된, 감탄한 경우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비극을 다룬 블록버스터 '마이웨이', 단편 '민우씨 오는 날'과 이를 확장한 따뜻한 가족 이야기 '장수상회'까지, 지금껏 연출한 영화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캐릭터를 꼽아달라는 질문도 나왔다.
감독은 '은행나무 침대'에서 배우 신현준이 연기한 '황장군'을 꼽았다. 당시 다른 주인공들에 비해 황장군 역할을 밀도 있게 표현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면서 지금 돌이키면 "가장 마음이 간다"고 애정을 보였다.

● AI의 시대..."5년 안에 블록버스터 사라질지도"
강제규 감독은 이번 행사에서 '블록버스터의 미래'에 대한 성찰도 풀어냈다. 블록버스터의 시대를 열었고, 그 성공을 먼저 경험했고, 이후 20년 넘도록 한국영화 성장과 확장의 중심에 있던 감독이기에 그의 이야기는 무게감을 더했다.
특히 "5년 뒤쯤 블록버스터가 사라질 수도 있다"고 말한 감독의 진단은 현장에 모은 영화 팬들은 물론 영화계 관계자들의 시선을 단번에 붙잡았다.
과감한 진단을 내린 근거는 "AI를 응용한 영화들의 시작"에 있다.
"AI를 활용한 영화가 5년 내에 꽃을 피울 거라고 생각해요. 혁명이 일어날 것 같아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스튜디오 시스템, 전체적인 영화 시스템이 대변혁을 맞을 거라고 봐요. 창작 유통 인프라의 과정이 코로나19를 겪으면서 넷플릭스 같은 새로운 플랫폼으로 변화를 이끌어왔듯이 지금은 그보다 10배, 20배의 강도로 '영화는 재탄생의 순간'에 와 있어요. 엄청난 변화 속에 블록버스터라는 단어를 쓸 수 없지 않을까 해요."
AI가 몰고 올 '대변혁' 앞에서 영화 감독들의 일자리 등 역할의 변화도 불가피하다.
이와 관련해 감독은 "밥 먹고 살기 힘들어질지 모른다"며 "AI의 학습은 기성 감독들의 스타일에 맞춰져 있고 감독들이 추구하는 샷, 영화적인 상상까지 모든 걸 습득해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때문에 "이런 시대에 감독은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을 관리하고 가꿔 나가야 밥을 먹고 살 수 있다"며 "이런 엄청난 딜레마 속에서 후배들은 더욱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살아야 할텐데 기회일 수도, 저를 포함한 모든 감독에게 고통의 시작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 환경과 재난, 기후위기에 관심 두고 차기작 준비
강제규 감독은 '태극기 휘날리며'로 대대적인 성공을 거둔 직후 미국 에이전시 CAA와 계약을 맺고 할리우드로 건너 갔다. 지금은 한국영화 감독이나 배우들의 할리우드 진출은 '흔한' 일이지만, 20년 전은 상황이 다르다. 글로벌 진출의 출발인 셈이다.
4년 동안 할리우드에 머물면서 스튜디오로부터 연출 제안을 받은 작품만 40여편에 이른다고 했다. 하지만 단 한편도 연출하지 않았다. 당시 "반드시 연출하고 싶었던", 직접 시나리오를 쓴 SF 장르의 영화 '요나'를 고집했기 때문이다.
"스튜디오들은 한국영화 감독이 할리우드에 와서 처음 연출하는 작품으로 예산이 큰 '요나'가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어요. 그런데도 저는 4년동안 미련을 버리지 못했어요. 결국 할리우드 작품은 못하고 워너브라더스의 회장이 '마이웨이' 시나리오를 보고 그걸 하자고 했죠."
"4년의 공백 동안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버리지 않으면 제가 뭔가 새로운 걸 할 수 없어요. 그래서 저는 잘 내려놓습니다. 2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쓴 시나리오도, 5년동안 붙잡았던 시나리오도, 누군가에게 채택되지 않으면 바로 잊어버려요."
감독은 현재 차기작 구상에 집중하고 있다. 아직 구체적으로 밝힐 단계는 아니지만 "요즘 지구의 환경과 재난, 열대야와 기후 위기 등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설명. 이와 관련한 영화를 준비 중이다.

● "변화에 게을러졌을 때" 망가지는 구나...
강제규 감독은 1990년대 초반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 '게임의 법칙' 등 작품의 각본가로 영화 작업을 시작했다. '은행나무 침대'부터 '1947 보스톤'까지 30년 넘도록 연출자로 영화 현장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를 움직이게 하는 힘, 어디서 나올까 궁금했지만 정작 감독은 "버티는 게 쉽지 않다"고 고백했다.
"스스로에게 질문하곤 해요. 지금까지 버티고 있지만 저의 동력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동력의 끝은 어디일까. 항상 고민이죠. 언제 잘릴까? 그런 고민도 당연히 생겨요. 해를 거듭하고 작품을 하며 좌절과 실패를 할수록 느끼는 건 '변화에 게을러졌을 때' '도전과 새로운 시도에 게을러졌을 때' 그 때 망가지는구나.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한 길을 가려고 할 때 제 영화는 좌초하는 구나. 하면 할수록 느낍니다."
그래서 감독은 "자신을 믿고 그 변화 속에서 끊임없이 채찍질하면서 자신을 신뢰하고 초심의 감정을 가지고 끝까지 노력해야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강제규 감독은 장편으로 데뷔하기 전인 1983년 연출한 단편영화 '땅밑 하늘공원'을 상영한다. 흥행 감독 이전, 신인 강제규 감독의 시선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감독은 "치부를 보여드리는 것 같다"며 멎쩍어 했다.
"만들 때는 분명히 굉장히 뜨거운 열정을 갖고 작업했지만 지금 보면 낯뜨거워요. 치기와 객기가 묻어 있구나, 겸손하지 않았고, 식견도 짧으면서 누군가를 흉내내고, 또 누군가를 닮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 앞섰구나 싶고요."
"그래서 많은 분들이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