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가사관리사, 글로벌 돌봄 체인의 비극 [똑똑! 한국사회]
이주희 |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2차 세계대전 후 자본주의의 황금기에 가사노동자는 선진 복지국가에서 거의 사라졌다. 생활 수준의 향상으로 가난한 여성이 공장 노동 등의 대안을 찾거나 전업주부로 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21세기에 들어 가사노동자가 다시 증가한 것일까?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에 못 미치는 남성의 가사노동 분담, 복지국가에 대한 공격과 민영화 등이 선진국의 유인 요인이었다면, 전세계적인 금융위기들로 극심한 긴축과 공공지출 감소를 겪으며 빈곤 노동자를 양산한 것이 저개발국의 배출 요인이었다.
미국의 사회학자 혹실드는 저개발국에서 금, 상아, 고무 등을 빼앗았던 19세기 제국주의가 이제는 돌봄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자원을 착취하는 변화에 주목했다. 경력 개발을 원하는 적극적인 선진국 여성과 유급 일자리를 찾던 저개발국의 진취적인 여성이 성평등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가진 자매로서가 아니라 사용자와 노동자, 주인과 하녀로 글로벌 돌봄 체인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튀르키예에서 필리핀 보모는 신분 상승을 추구하는 중산층의 지위 상징이다. 이들 가구는 교육 수준이 낮고 덜 문명화되었다고 여기는 자국의 농촌 출신 여성보다 외국인 가사노동자를 더 선호한다. 물론 이 위계의 최상층은 영국인 보모가 차지하지만, 취학 전 영어교육에 대한 열망을 반영하여 최근 필리핀 보모의 취업도 급격히 늘고 있다. 완벽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것은 튀르키예어로 자신의 역사와 문학을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엘리트 교육의 핵심이다. 필리핀 보모는 이제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가치 있는 소비로 여겨진다.
스웨덴의 ‘가정부 논쟁’(pigdebatt)은 공공 돌봄서비스와 성평등한 휴직제도가 있는 복지국가가 과잉 육아에 기반한 부모의 선택할 자유라는 신자유주의적 현상과 충돌하면서 발생했다. 가사노동자 사용에 대한 세제혜택(RUT)이 결국 특정 계급을 위한 제도이며 성 불평등을 악화시킬 것이란 사회민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007년 중도우파 정부는 이 제도를 강행했다. 가사노동자는 이제 중간계급 가정의 젠더 갈등을 가장 싸게 해소할 수 있는 전략으로 부상했다. 남편의 참여를 요구하다 지친 스웨덴의 맞벌이 부인은 평화를 얻었지만, 남편은 할 수 있던 가사로부터 더 멀어지며 성평등은 이제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계급에만 허락된 일종의 특권으로 축소되었다.
글로벌 돌봄 체인의 주된 희생자는 송출국에 남겨진 외국인 보모의 어린 자녀이다. 하지만 수신국의 아이는 과연 승자일까? 스웨덴의 ‘오페어’(au pair) 외국인 보모는 장기간 근무가 불가능하다. 돌봄은 진정으로 깊은 관계가 맺어질 때 발생하는데, 잦은 보모의 교체로 상처받을 것을 우려해 아이가 자신을 스스로 고립시키거나 그런 돌봄이 가능하지 않은 상황의 보모를 만날 때, 아이는 타인을 자신의 필요를 위해 존재하는 단순한 수단으로 여기며 비민주적인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학자들은 경고한다.
또한 이런 세제 혜택도 본래의 의도와 달리 불법체류 가사노동자를 전혀 줄이지 못했다. 외국인 가사노동자 보호를 위해 덴마크 노동조합이 고용주 가정에 여행 비용과 보험 제공 등 의무를 강화하였을 때도 비싼 비용을 피하고자 상당수 외국인 가사노동자에 대한 수요가 비공식 시장으로 몰렸다. 비공식 시장에서의 오페어는 보호받지 못한다.
유튜브에는 어린 두 자녀와 ‘올바른’ 노동윤리를 가진 고학력 여성임을 홍보하며 초저임금과 학대 등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해외의 가사 일자리를 찾는 여성들이 넘쳐난다. 젠더와 인종, 계급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평등이 증폭되는 비극적인 상황이다. 필리핀 가사관리사에게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임금을 줄 자유, 아무 일이나 시킬 자유를 달라 지치지도 않고 주야장천 외치는 정치가와 그 주변에 말하고 싶다. 다른 나라가 한다고, 제발 모두 따라 하지는 말자. 판도라의 상자가 완전히 열리기 전에, 이 일은 시작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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