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긴자의 호랑이"와 사라진 이자 290억 엔... 유신정권 최대 금융 스캔들의 민낯
대한민국 경제 개발의 이면에 감춰진 어두운 그림자. 1970년대, "긴자의 호랑이"로 불리던 야쿠자 출신 사업가와 한국 정부, 그리고 외환은행 사이에서 벌어진 천문학적 부실 대출 사건의 전말을 팩트체크와 함께 재구성했다.
>> 야쿠자 대부와 유신 정권의 '위험한 동행'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한국 정부는 일본 내 자금과 인맥이 절실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인물이 바로 '동성회(토세이카이)'의 보스이자 재일교포 사업가인 정건영(일본명 마치이 히사유키)이었다. "긴자의 호랑이"라 불리며 일본 밤의 세계를 주름잡던 그는 한일 국교 정상화 과정 막후에서 모종의 역할을 수행하며 박정희 정권의 실세들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특히 그는 당시 정권의 2인자였던 박종규 대통령 경호실장과 막역한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을 등에 업고 정건영은 1968년부터 외환은행 도쿄지점의 문턱을 제집 드나들듯 넘나들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 금융사에서 가장 뼈아픈 부실 대출 사건의 서막이었다.

>> 브레이크 없는 질주, 150억 엔의 거대 부실
정건영이 이끄는 '동아상호기업'과 그가 추진한 부관훼리 사업 등에 외환은행 도쿄지점의 자금이 봇물 터지듯 흘러들어갔다. 당시 외환은행 도쿄지점은 본점의 자본금 규모를 위협할 정도의 거액을 특정 개인에게 몰아주었다.
금융권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대출이었지만, "청와대의 뜻"이라는 암묵적인 압박 앞에 은행의 심사 기능은 마비되었다. 당시 대출은 정건영이 소유한 일본 내 부동산 등을 담보로 잡았으나, 감정가는 터무니없이 부풀려져 있었고 사업 계획의 실현 가능성은 불투명했다. 1968년부터 1977년까지 9년간 이어진 대출의 원금만 무려 150억 엔에 달했다.
이는 당시 환율(100엔당 약 130~160원)로 환산하면 약 200억~250억 원 규모였다. 일각에서 "1천억 원대 대출"로 알려진 것은 사건이 종결되던 1990년대 후반의 고환율(100엔당 800원대)을 적용한 착시 현상이다. 하지만 1970년대 당시의 200억 원은 현재 가치로 수천억 원을 상회하는 천문학적 액수임이 분명하다.
>> 거품 붕괴와 드러난 '상처뿐인 승리'
파국은 예고된 수순이었다. 1970년대 중반 오일쇼크가 덮치면서 일본 경기가 급속도로 냉각되자 정건영의 사업은 직격탄을 맞았다. 그가 담보로 내놓은 골프장과 부동산의 가치는 폭락했고, 외환은행은 원금 회수는커녕 이자조차 받지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
외환은행은 1977년 지원을 중단하고 긴 법적 분쟁에 돌입했다. 지루한 공방 끝에 1997년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승소 판결을 받아냈으나, 이는 '상처뿐인 승리'였다. 판결 당시 확정된 채권액은 원금 150억 엔에 연체 이자 290억 엔을 합쳐 총 440억 엔에 달했다.
그러나 일본 거품 경제 붕괴로 인해 담보물의 가치는 처참하게 하락해 있었다. 결국 외환은행이 경매 등을 통해 실제로 회수할 수 있었던 금액은 원금 수준인 약 150억 엔에 불과했다. 3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발생한 290억 엔(당시 환율 기준 약 2천억 원)의 이자 수익은 허공으로 사라진 셈이다.

>> 남겨진 교훈
이 사건은 한국 금융이 정치 권력에 휘둘릴 때 어떤 재앙이 초래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적나라한 사례로 남았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이 사건의 최종 처리는 부실 채권 정리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긴 시간이 걸리는지를 우리 사회에 경고하는 듯했다. 30년 묵은 빚을 청산하며 외환은행은 "앓던 이가 빠졌다"고 안도했으나, 그 대가는 너무나도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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