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흥민도 혹평한 ‘논두렁 잔디’, 진짜 범인은 누구인가?
(1)‘축구장 잔디 괴사 사건’ 조사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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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10일: 고발인, 손흥민
“오만의 잔디 상태가 홈(상암 월드컵경기장)보다 훌륭하네요. 팀 내 기술이 좋은 선수가 많은데 잔디 때문에 좋은 경기력을 보이지 못해 아쉽습니다.”
한국의 ‘논두렁 잔디’를 향한 국가대표 축구팀 주장 손흥민(32) 선수의 일침은 국내 축구팬들을 단결시켰다. “월드컵까지 개최했는데 잔디 상태가 중동·아프리카 국가보다 안 좋다는 건 나라 망신이다”, “손흥민, 김민재, 황희찬 등 선수는 월드클래스인데 축구 인프라는 후진국을 못 벗어났다”는 등의 비판이 들끓었다.
여론의 화살은 구장 시설관리자, 축구단, 지방자치단체를 향했다. 지자체 예산과 구단 투자·관리 등이 부실해 잔디가 괴사했다는 것이다.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질타가 이어졌다. 사안의 중대성을 고려해 한겨레 지구환경부는 첫번째 ‘전지적 기후변화 시점’ 조사 주제로 ‘축구장 잔디 괴사 사건’을 선정했다.
#10월7일: 용의자 1, 잔디 관리사
“9월 중순까지 힘겹게 버티던 잔디가 추석 열대야를 겪고 모두 죽었습니다.”
지난 7일, 국내 한 프로축구팀 연습 구장에서 만난 이강군 왕산그린 대표는 누렇게 녹아내린 잔디를 열심히 파내고 있었다. 1만㎡ 규모 경기장의 잔디 절반 이상이 괴사해 흙바닥이 드러나 있었다. 그는 인천, 광주, 대전, 수원, 성남 등 프로구단 10여곳의 잔디 구장을 돌보는 잔디 관리 전문가다.
이 대표는 “잔디 관리 20년 경력 중 올여름이 최악”이라고 했다. “축구장에 심는 ‘한지형’ 잔디는 폭염에 취약한데 올해 6월부터 9월까지 무더위·열대야 기간이 길어져 잔디가 뿌리 내리기 힘들었다”고 진술했다.
그의 증언을 종합하면, 한국 프로축구 경기장의 잔디 품종은 유럽에서 온 ‘켄터키 블루그래스’다. 주로 봄가을과 같이 조금 서늘한 15~25도(밤과 낮 사이 온도)에서 잘 자라는 한지형 잔디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계기로 국내에 보급된 해당 품종은 잎이 억센 ‘난지형’ 잔디(25~35도에서 잘 자라는 일명 한국형 ‘성묘 잔디’)보다 잎이 얇고 부드러워 선수 부상을 줄일 수 있다.
이 대표는 일부 살아남은 잔디 뿌리를 보여주며 잔디 괴사 사건이 ‘올여름 이상기후’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저녁 날씨가 쌀쌀한 추석 이후엔 잔디 뿌리 길이가 5~10㎝ 이상 자라는데 현재 약 2㎝로 여름철 생육을 멈출 때 수준이에요. 올여름 밤 열대야 일수가 36일(대전 기준)로 작년보다 5배 늘었고요. 추석까지 폭염과 열대야가 이어져 잔디가 버틸 수 없었던 겁니다.”
조사 중에도 그의 전화통엔 불이 났다. 광주, 인천 등 곳곳에서 ‘죽어가는 잔디를 살려달라’는 독촉이 쏟아졌다. 그는 “잔디가 약한 여름에도 선수들은 경기를 해야 하니 잔디를 밟을 수밖에 없고, 따로 연습할 장소가 부족해 손상된 잔디가 혹사당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고 했다. 이 대표는 “경기장을 소유한 지자체 관리 예산이 한정돼 있고, 구단의 잔디 보수 예산도 제한돼 있다”고 했다. ‘논두렁 잔디’ 책임이 축구단과 지자체에도 있다는 뜻이다.
#9월23일: 용의자 2, 프로축구단 경영본부장
“싸이와 폭염 때문입니다.”
이아무개 ㄱ프로축구단 경영본부장은 지난달 23일 이뤄진 전화조사에서 잔디 괴사 사건 책임자로 가수 싸이와 이상 기후를 지목했다. 주로 한여름 가수 싸이 등이 축구 경기장을 빌려 공연 하면 하나같이 잔디 괴사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유독 긴 폭염이 잔디 생육을 방해했다는 진술은 앞서 잔디 관리자의 진술과 일치했다.
“더운 여름에 가수들이 많은 양의 물을 뿌리는 공연(‘워터밤’)을 하면 물에 잠긴 잔디가 햇빛에 익어요. 관객들이 물을 맞으며 잔디 위에서 뛰는 건 잔디를 ‘확인 사살’하는 것이고요.”
구장을 소유한 지자체는 구장 관리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공연장 대여가 불가피하단 입장이다. 상암 월드컵경기장 기준 한해 관리비가 20억원 이상 들어가는데 스포츠 관중 수익만으론 충당이 어렵다. 유명 가수의 공연장 대관료가 10억원 안팎이라 운영비를 벌기 위해 잔디를 희생시키게 된다.
물론 이 본부장은 구단 쪽 부실 관리 책임도 인정했다. “구단 입장에선 좋은 성적을 내려 연습을 늘릴 수밖에 없습니다. 잔디 때문에 연습 시간을 줄이면 선수들은 연습을 방해한다고 항의해요. 또 경기력 향상과 부상 방지를 위해 물을 뿌려달라고 하는데, 한여름에 물을 뿌리면 잔디가 죽을 수 있어 중간에서 죽을 맛입니다.”
그는 “많은 운영 자금과 연습 구장을 보유해 잔디 혹사를 막는 유럽 축구단이 부럽다”며 “재정 문제 때문에 구장을 공연장으로 대여하고, 성적을 내기 위해 잔디 구장을 혹사하게 되는 구단 입장을 이해해 달라”고 말했다.
#9월12일: 참고인, 잔디연구소장
“기후변화가 심해질수록 초록 잔디에서 운동하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김경덕 삼성물산 잔디연구소장은 지난달 12일 경기 용인시 글로렌스골프장에서 진행한 대면조사에서 “공연장 대여로 잔디가 죽는 문제는 얼마든지 시정할 수 있지만 폭염 같은 이상기후는 사람 힘으로 막을 수 없다”며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강조했다. 그는 1993년 설립된 국내 첫 잔디 전문 연구소 수장이다.
“잔디도 사람과 비슷하게 여름·겨울에 움츠렸다가 봄가을 본격적인 활동을 하는데, 지금처럼 여름과 겨울이 길어지면 잔디의 체력과 면역력이 약해져 전염병이 발생합니다. 최근 동전마름병, 엽고병, 탄저병 등이 번져서 국내 축구장·골프장 등 잔디 피해가 극심했고요.”
김 소장은 잔디 괴사의 재발을 막기 위해 “한지형 잔디 대신 개량한 난지형 잔디를 심거나, 한지형 잔디 사이 인조잔디를 심어 내구성을 키우는 하이브리드 잔디(상암 경기장) 등의 실험도 진행된다”고 설명했다. 다만 “난지형 잔디는 여름철 생명력이 강하지만 서늘한 바람이 부는 가을부터 잎이 누렇게 변해 외관상 좋지 않다. 하이브리드 잔디 역시 올여름 최악의 폭염 때문에 한지형 잔디가 모두 죽어 빛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김 소장은 조사 말미에 “더위에 민감한 잔디를 관리하며 집중강우와 열대야, 폭염, 혹한이 더 심해지는 걸 체감한다. 잔디뿐 아니라 모든 동식물이 기후변화로 위기를 겪을 수 있단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잔디가 생존할 수 없는 환경이면 사람도 살기 힘겨워진다. 이대로면 모두가 피해자가 될 것이라는 걸 알려준, ‘축구장 잔디 괴사 사건’의 전모다.
대전 용인/글·사진 옥기원 기자 ok@hani.co.kr
한겨레 지구환경부가 ‘전지적 기후변화 시점’ 연재를 시작합니다. 기후변화를 우선에 두고 우리 일상 속 변화와 피해 사례들을 기록하기 위한 시도입니다. 역대급 열대야, 태풍·홍수 피해, 식품가격 폭등 등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는 크고 작은 기후변화 피해를 겪고 있습니다. 기상, 환경, 에너지, 동식물, 과학 분야 등을 취재하는 기자들이 함께 일상 속 기후변화 사례를 속속들이 파헤치려 합니다. 의식주부터 직업, 취미 생활까지 우리 삶의 모든 범위를 주제로 다루겠습니다. 독자분들이 경험한 숨겨진 기후변화 사례 제보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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