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링은 점수판만 보면 싱겁게 끝난 경기처럼 보일 때가 있다. 9-3, 그것도 두 엔드를 남기고 상대가 악수를 청했다면 더 그렇다. 하지만 이번 영국전은 “한국이 잘했다”라는 말로는 다 설명이 안 된다. 경기도청 ‘팀 5G’가 왜 8년 만의 메달 도전에 ‘순항’이라는 평가를 받는지, 그 이유가 경기 속에 촘촘히 들어 있었다.

우선 흐름부터 짚어보자. 스킵 김은지, 서드 김민지, 세컨드 김수지, 리드 설예은, 핍스 설예지. 이 다섯 명은 이름만 나열해도 역할이 선명한 팀이다. 컬링은 ‘샷을 잘하는 팀’이 우승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샷을 선택하는 팀이 우승한다. 그리고 그 선택을 가능하게 해주는 게 결국 멤버 간의 신뢰와 리듬이다.

초반 1엔드는 블랭크로 끝났다. 겉으로는 ‘득점 실패’ 같지만, 이건 탐색이자 계산이다. 상대 스톤 상태, 아이스 스피드, 스위핑 감각을 한 번에 확인하는 과정이고, 후공을 유지하는 선택이기도 하다. 컬링에서 강팀은 초반에 무리하지 않는다. 강팀은 ‘내가 이길 판’을 만들고 들어간다.

2엔드에서 한국이 2점을 먼저 뽑았고, 3엔드에 영국이 2점을 받아 2-2가 됐다. 여기서 흔들리는 팀은 “분위기 뺏겼다”는 생각에 급해진다. 하지만 팀 5G는 4엔드에 1점을 다시 챙기고, 5엔드에 1점을 내주면서도 표정이 크게 바뀌지 않는다. 3-3 동점이 ‘위기’가 아니라 ‘정상적인 과정’처럼 보였다는 게 포인트다.

승부는 6엔드에서 갈렸다. 영국이 더블 테이크아웃을 시도하다 실수했고, 한국은 그 틈을 한 번에 벌점으로 바꿨다. 컬링에서 상대 실수는 자주 나온다. 진짜 실력은 그 실수가 나왔을 때 “받아먹는 속도”에서 갈린다. 망설이면 한 엔드가 날아가고, 한 엔드가 날아가면 라운드로빈에선 순위가 밀린다. 한국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3점을 쓸어 담으면서 6-3으로 확 벌렸다. 6엔드는 ‘기술’도 중요하지만, 결국 ‘판단’이 만든 점수였다.

7엔드 1점 스틸, 8엔드 2점 스틸. 이 두 장면에서 팀 5G의 냄새가 더 진하게 난다. 스틸은 단순히 상대 실수를 바라는 게 아니다. 상대가 실수하도록 구도 자체를 어렵게 깔아두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하우스 앞을 좁혀 놓고, 상대가 원하는 길을 막고, 마지막 샷의 각도를 강제로 빡빡하게 만든다. 그러면 강팀도 흔들린다. 영국이 “느슨했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도 결국 그 느슨함을 끌어낸 한국의 설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승리에서 특히 눈에 띄는 건 ‘누가 한 방을 쳤다’보다 역할이 흔들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스킵 김은지가 마지막 샷에서 팀의 표정을 결정하고, 서드 김민지가 중반 교통정리를 해주고, 세컨드 김수지가 한 번씩 분위기를 가져오는 테이크아웃을 꽂아준다. 리드 설예은과 핍스 설예지는 스톤을 단단히 ‘자리에’ 눕혀서 스킵이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늘려준다. 이게 강팀의 공통점이다. 스타 한 명보다 다섯 명의 기능이 동시에 돌아간다.

그리고 별명 이야기, ‘5G’가 그냥 웃고 넘길 소재로만 보이면 손해다. 컬링은 장시간 집중과 대화가 전부인 종목이다. 팀이 스스로 즐겁고 편안해야, 긴 경기에서 말이 짧아지지 않는다. “돼지라서 5G” 같은 농담이 살아 있는 팀은 보통 코트 안에서도 서로 눈치를 덜 본다. 눈치를 덜 보면, 판단이 빨라지고, 판단이 빨라지면 샷이 정확해진다. 이런 팀 컬러는 큰 경기에서 생각보다 강하게 작동한다.

물론 아직 갈 길이 멀다. 라운드로빈은 ‘순간 폼’보다 승패 관리가 중요하다. 초반 미국전 패배가 오히려 약이 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 번 맞아본 팀은 이후에 경기 운영이 더 차분해진다. 이탈리아를 잡고, 영국을 완파한 흐름은 ‘한 경기 반짝’이 아니라, 패턴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신호다.

다음 상대인 덴마크전에서도 핵심은 똑같다. 득점 욕심보다 엔드 운영, 그리고 상대가 급해지는 구도를 먼저 만들 것. 팀 5G는 지금 그걸 할 줄 아는 팀처럼 보인다. 2018년 ‘팀 킴’이 메달을 딴 뒤 한국 컬링이 오래 기다렸던 건, 사실 또 한 번의 ‘기적’이 아니었다. 기적처럼 보이지만 계산으로 이기는 팀. 지금의 팀 5G 딱 그 방향으로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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