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개의 심장' 해버지 박지성의 epl 정복기

대한민국 선수 최초 맨유에서 활약한 박지성의 축구 이야기를 하려면, 2002년 월드컵 얘기부터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사실 지금은 ‘언성히어로’, ‘해버지’ 소리를 듣지만, 2002년 월드컵 직전만 해도 그의 이름 앞에는 늘 “논란”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어요.

왜냐고요? 그때 박지성은 나이도 어리고, 일본 J리그 교토에서 갓 자리 잡은 수준이었거든요.

대표팀 내에서도 그렇게 유명하거나 인정받는 선수는 아니었습니다.

일부 언론과 축구계에선 “어린 선수가 왜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뽑히냐”라며 대놓고 고개를 갸웃거렸죠.

당사자인 박지성 본인도 이 논란을 모를 리 없었습니다.

나중에 방송에서 “자격 논란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고 솔직하게 말했어요.

그런데도 그는 “마음이 상하거나 불안하진 않았다. 오히려 내가 뽑힐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뭔가 심리적으로 아주 단단한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될 놈은 된다’의 상징이랄까요.

그렇게 시작된 2002 한일 월드컵.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놀라운 이야기였고, 박지성은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포르투갈전에서 결승골 넣고, 히딩크 감독 품에 안겨 펄쩍펄쩍 뛰던 모습.

그때 “저 선수는 뭔가 다르다”고 느낀 사람이 저뿐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이 월드컵 활약으로 그는 단숨에 대한민국 최고의 유망주로 떠올랐습니다.

그다음 행선지가 바로 일본 J리그 교토 퍼플상가에서 네덜란드 PSV 에인트호번이었습니다.

히딩크 감독이 PSV로 돌아가면서 “얘 데리고 오겠다”고 꽂은 거죠.

그리고 여기서 박지성은 또 하나의 도약을 합니다.

처음엔 유럽 축구의 스피드와 피지컬에 적응하기 어려워 벤치 신세를 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특유의 성실함으로 빠르게 자기 자리를 찾아갔어요.

특히 2004–05시즌 챔피언스리그 4강에서 AC밀란을 상대로 넣은 선제골은 아직도 회자됩니다.

그게 아마 박지성의 유럽 커리어를 상징하는 장면 중 하나일 거예요.

PSV에서의 활약은 더 이상 “아시아 마케팅” 같은 소리를 못 꺼내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실력으로 증명했고, PSV 팬들에게도 진심으로 사랑받는 선수가 되었죠.

그리고 2005년 여름.

드디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이적이 발표됩니다.

솔직히 이건 진짜 충격이었어요.

한국인 선수가 맨유라니, 축구팬들 사이에서 “이건 게임에서나 가능한 일 아니냐?”는 농담이 돌아다녔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영국 현지에선 여전히 색안경이 있었어요.

일부 언론은 “아시아 시장 겨냥 마케팅용”이라고 비꼬았습니다.

“그냥 유니폼 판매나 늘리겠다는 거다”라는 이야기도 흘러나왔죠. 지금 보면 좀 어이없죠?

박지성 본인은 어떻게 했냐고요?

특유의 무표정과 담백한 어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실력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이제부터가 진짜 이야기입니다.

맨유에 합류하자마자 퍼거슨 감독은 그를 신뢰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주전이었던 건 아니었어요.

하지만 박지성은 언제나 기회가 올 때마다 철저히 준비했고, 경기장에서 그걸 증명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강점은 뭐니 뭐니 해도 왕성한 활동량.

일명 ‘세 개의 심장’을 가진 사나이였죠.

박지성이 있으면 팀의 수비와 압박이 달라진다고 할 만큼, 그는 빅매치에서 늘 퍼거슨의 ‘비밀병기’로 활용됐습니다.

가끔은 “박지성 왜 저렇게까지 뛰냐”는 농담도 나왔어요.

어떤 팬은 “맨유에 박지성 두 명 있었으면 경기는 그냥 끝났다”고도 했습니다.

동료들의 평가도 극찬 일색이었습니다.

루니는 “박지성은 호날두만큼 중요한 선수였다”고 했고, 리오 퍼디난드는 “감독이 시키면 뭐든지 해냈다”고 했어요.

퍼거슨 감독은 더 나아가 “내가 지도한 선수 중 가장 과소평가된 선수”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성공에도 아쉬운 순간은 있었습니다.

2008년 챔피언스리그 첼시와의 결승전.

박지성은 4강에서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선발로 뛰며 승리에 기여했지만, 결승 엔트리에 들지 못했습니다.

이건 정말 가슴 아픈 일화죠.

나중에 퍼거슨 감독은 이걸 “내 커리어에서 가장 후회되는 결정”이라고 했습니다.

박지성도 “그때 정말 마음이 무너졌다”고 했지만, 끝까지 팀 우승을 축하했고, 퍼거슨 감독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 박지성을 대신해 출전한 오언 하그리브스는 유리몸으로 유명하더니 일찍 은퇴하고 말았죠..

그리고 이듬해, 박지성은 아시아 선수 최초로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선발 명단에 오릅니다.

2009년 바르셀로나전이었죠.

결과는 아쉬웠지만, 이 장면은 박지성이 얼마나 강인한 정신력을 가졌는지를 상징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자꾸 “마케팅 선수”라 비웃었을 때, 박지성은 묵묵히 뛰며 스스로를 증명했습니다.

205경기, 27골, 프리미어리그 4회 우승, 챔피언스리그 우승.

숫자만 봐도 대단하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걸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박지성은 축구를 숫자가 아니라 태도로 증명한 선수였다.”

그래서 맨유 팬들에게 그는 영원히 숨은 MVP이자, 퍼거슨의 ‘비밀 병기’로 기억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아시아 축구가 편견을 깨고 어떻게 세계 정상급 무대에 올라설 수 있는지를 보여준 최고의 롤모델이었습니다.

이제 와서 돌아보면, 박지성 이야기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될 놈은 된다. 다만 될 놈이 되기 위해선 남들이 못 버티는 걸 끝까지 버텨야 한다.

박지성은 그걸 몸으로 보여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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