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핑크, 영국 유명 음악 축제서 K팝 가수 최초 헤드라이너 공연
걸그룹 ‘블랙핑크’가 지난 2일(현지시간) K팝 가수로는 최초로 영국 유명 음악 축제 ‘하이드 파크 브리티시 서머 타임 페스티벌’에서 헤드라이너(간판 출연자)로 나서며 새 역사를 썼다.
런던 ‘하이드 파크’에 모인 6만5000명이 이들의 공연에 열광한 가운데 해당 공연을 보기 위해 지구 반 바퀴를 날아왔다는 팬들도 있었다.
블랙핑크의 팬 장길 파군산은 “이번 공연을 작년부터 기다렸다”면서 필리핀서 영국까지 왔다고 밝혔다.
“그 어떤 단어로도 지금 느끼는 기쁨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정말 미친 밤입니다.”
파군산의 친구 릭 매 바포로소 또한 “블랙핑크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면서 “모든 게 멋지다”고 덧붙였다.
좋은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새벽 6시에 잉글랜드 노팅엄에서 출발했다는 에이드리언 찬과 제스 찬 또한 “블랙핑크의 노래들은 다 멋지다. 성격도 좋고, 내게 힘을 주는 가수들”이라며 동의했다.
미셸과 야즈민 글래킨 모녀는 원래 북아일랜드에서 이른 아침 비행기를 타고 오려 했으나, 취소돼 힘들게 이곳까지 왔다고 전했다. 오후 3시 30분경 비행기의 남은 2자리를 얻게 된 이들은 공연을 조금도 놓치지 않고자 짐도 풀지 못하고 콘서트장으로 바로 왔다.
딸 야즈민은 블랙핑크에 “완전히 매료됐다”고 밝혔으며, 어머니 미셸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딸이 공연 내내 내 어깨 위에 있었기 때문”이라면서도 “정말 힘든 하루였지만 가치가 있었다. 또 하라면 할 수 있다”고 전했다.
이렇듯 블랙핑크는 이제 그저 전 세계에서 가장 팬이 많은 '케이팝 그룹'이 아니다. 이들은 전 세계에서 가장 팬이 많은 '그룹'이 됐다.
블랙핑크는 6년간의 혹독한 연습 끝에 탄생한 걸그룹으로, 태국 출생의 리사(26세, 본명 라리사 마노반), 뉴질랜드 출생으로 호주에서 자란 로제(26세, 박채영), 서울 태생의 제니(27세), 군포 태생의 지수(28세) 등 멤버 4명으로 구성됐다.
블랙핑크는 지난 2016년 데뷔곡 ‘휘파람’을 발표한 이후 유튜브에서 팔로워 수가 가장 많은 가수로 이름을 올렸으며, K팝 걸그룹으로는 최초로 앨범 100만 장 판매에 성공했다.
가장 최근에 발매한 앨범 ‘본 핑크(2022)’는 영국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멤버 4명의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를 모두 합하면 3억5600만명에 이른다.
악틱 몽키즈, 킬러스, 스트록스 등 안전하고 이미 여러 차례 검증된 헤드라이너들이 주를 이루는 ‘하이드 파크 페스티벌’에서 블랙핑크의 존재는 다소 결이 맞지 않아 보일 수도 있으나, 좀 더 과감한 라인업을 위한 현명한 선택이었다.
현재 블랙핑크는 월드 투어를 진행 중으로, 가는 곳마다 화려하고 자신감 넘치는 곡과 또 그 곡과 어울리는 멋진 안무가 정교하게 결합한 무대로 관객들을 사로잡고 있다.
한편 블랙핑크의 이번 공연은 히트곡 ‘핑크 베놈’과 ‘하우 유 라이크 댓’과 함께 시작했다. 공연장이 핑크빛으로 물드는 한편 멤버들 뒤편 스크린엔 날카로운 검은 가시가 덮인 벽이 재생됐다.
검은색을 뜻하는 ‘블랙’과 분홍색을 뜻하는 ‘핑크’가 결합된 이들의 이름에서부터 이들이 이룬 음악적 성과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이분법적인 요소들은 블랙핑크의 정체성을 나타낸다.
이들의 노래 또한 감미로운 멜로디와 귀에 쏙쏙 박히는 훅이 함께 나오거나, 무언가 불길한 듯한 느낌의 EDF 리프와 정신없이 쏟아지는 랩이 혼재돼 있기도 하며, 군가 같은 구호와 함께 끝이 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요소가 완벽히 어우러져 일요일 밤 공연장에 모인 관객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블랙핑크는 이후로도 곡 ‘프리티 새비지’를 부르며 무대를 뛰어다니고, 재즈에서 영감을 받은 듯한 의자 안무를 펼치는 등 초반 20분간 관객들을 광적으로 몰아갔다.
공연 중간 멤버 로제는 “런던 여러분, 여긴 바람이 좋다”면서 감사 인사를 전했다.
한편 공연이 중간 정도 지났을 땐 멤버들 각자의 솔로곡 무대가 펼쳐지며 멤버들만의 개성이 조금 더 드러났다.
우선 지수는 달콤한 사랑 노래인 ‘꽃’을 부르며 크고 아름다운 눈을 뽐냈으며, 블랙핑크에서도 작사 능력이 탁월한 로제는 ‘곤’과 ‘온 더 그라운드’를 연달아 부르며 노래 실력을 드러냈다.
최근 미 HBO 드라마 ‘디 아이돌’에서 공동 주연을 맡은 멤버 제니는 곡 ‘솔로’를 각색해 선보였으며, 멤버 중에서도 가장 솔직하고 대담한 태도를 잘 보여주는 리사는 힙합곡 ‘머니’를 통해 멋진 랩 실력과 보깅 댄스를 선보였다.
한편 로제의 솔로 무대 중 공기 대포로 공중에 쏘아 올려진 색테이프 수천 개가 무대로 떨어지는 대신 바람 때문에 무대 뒤편으로 날아가 공연 내내 조명 장비에 매달려 있었다는 점이 유일하게 살짝 아쉬웠다.
날카로운 가사
이러한 작은 무대 사고쯤엔 끄떡없이 각자의 솔로 무대 이후 멤버들은 다시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안무가 인상적인 곡 ‘러브식 걸즈’와 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 2번(프란츠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에 등장하는 주제 선율을 샘플링한 멜로디가 귀에 계속 맴도는 곡 ‘셧다운’ 등을 열창하며 런던의 여름밤을 더욱 뜨겁게 달궜다.
하지만 하이라이트는 단연 ‘텔리’라는 곡이었다. “누가 일일이 기록하는 것도 아닌데, 난 그냥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하고 싶은 걸 한다”는 가사는 극도로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K팝 세계에서 성적 해방을 이야기하는 충격적이고도 이례적인 모습이었다.
로제는 ‘텔리’에 대해 “멤버들에게 매우 특별한 곡”이라고 소개했으며, 멤버들은 욕설이 섞인 가사에 맞춰 마치 예전 ‘스파이스 걸스’의 ‘2 Become 1’ 안무처럼 나란히 서서 안무를 펼쳤다.
블랙핑크는 오는 8월 말 지난 7년간의 계약이 종료될 예정으로, 과연 멤버들이 재계약에 응할지 추측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무대와 음악을 향한 멤버들의 숨김없는 애정을 통해 블랙핑크의 여전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만약 이후 멤버들의 발언권이 더 강해진다면 ‘텔리’의 날카로운 가사 내용은 이들이 다음엔 어디로 향하고 싶은지 보여주는 이정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한편 곡 ‘뚜두뚜두’와 ‘포에버 영’과 함께 공연이 폭발적인 피날레를 향해 달려가면서 팬들은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 정신없이 소리를 지르며 심지어는 한국어 단어들을 외치면서 환호했다.
로제는 팬들에게 손을 흔들며 “여러분의 에너지가 이렇게 넘칠지 몰랐다”는 인사를 전했으며, 제니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지만, 오늘 와주신 모든 분께 정말 감사하다”고 언급했다.
한편 이번 ‘하이트 파크 페스티벌’ 무대는 블랙핑크가 현재 진행 중인 월드 투어에서 사용하는 곡 리스트를 재사용하지 않고 완전히 개편했으며, 새로운 무대 세트와 안무 등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남달랐다.
지난 4월 코첼라에서의 셋리스트를 다시 사용하긴 했지만, 멤버들은 지난주 호주 투어를 도는 와중에 모든 변경 사항을 다시 숙지해야 했다. 게다가 사운드 체크와 함께 최종 리허설이 진행됐던 2일 아침은 멤버들이 한국에서 영국으로 날아온 지 겨우 24시간밖에 되지 않았을 때였다.
하지만 시차로 인한 피곤함에 허덕이는 대신 에너지 넘치는 모습으로 완벽한 호흡을 자랑했으며, 마치 실제 무대인 것처럼 열정적으로 리허설에 임했다는 후문이다.
미국의 글로벌 스포츠 및 음악 엔터테인먼트 대기업 ‘AEG’ 소속으로 유럽 페스티벌 담당자인 짐 킹은 “어떤 수준이든, 누구와 비교하든 정말 멋진 쇼였다”고 설명했다.
“하이드 파크나 코첼라에 선다는 건 아티스트, 특히 대중음악 아티스트에겐 매우 힘든 일입니다. 그리고 무대의 모든 세부 사항과 한 번뿐인 무대에서 보여주는 일회성 요소 등을 통해 이들의 전문성과 재능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이드 파크 공연 라인업에 블랙핑크를 포함시킨 킹은 블랙핑크가 영국 축제의 헤드라이너가 된 최초의 케이팝 그룹이지만 이번 무대가 케이팝 그룹의 마지막 무대가 되진 않을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이러한 음악 장르는 앞으로 더 커질 것”이라는 킹은 “오늘 우리는 이를 목격했다. 이러한 페스티벌에 나선 적 없는 그룹들이 많았지만 우리는 대단한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고 언급했다.
“저는 블랙핑크가 이전에 존재했을 수도 있는 어떤 종류의 저항도 날려버렸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동시대의 많은 이들에게 기회를 열어준 셈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