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난다…관객 울리고 웃긴 고 이순재 한국 영화 3편

고 이순재 영화 굿모닝 프레지던트. / CJ 엔터테인먼트

연기로 생을 살아낸 배우 이순재는 마지막 순간까지 무대 위에 서 있었다. 연극, 영화, 드라마를 넘나들며 7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연기를 이어온 그는 작품을 고를 때 흥행보다 내용을 우선으로 삼았다. 자신의 역할이 주연인지 조연인지, 규모가 큰 영화인지 아닌지보다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느냐’를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여겼다. 무대는 약속이라 말했고, 관객은 존재 이유라고 말했다.

“배우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현장을 지켜야 한다.” 생전 그가 남긴 이 말은 단지 직업윤리를 넘어서, 연기를 어떻게 살아냈는지를 보여주는 문장이었다. 오랜 세월을 버텨온 이순재의 연기는 결국 한국 영화의 한 축이 됐다. 그의 작품들은 지금 다시 조명받고 있다. 그중에서도 세 편의 영화는 관객에게 깊은 여운을 남겼고, 배우 이순재의 신념과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1. 덕구(2018)

영화 ‘덕구’ 한 장면. / 메가박스 플러스엠

이순재가 가족을 연기로 다시 정의한 순간

2018년 개봉한 영화 ‘덕구’는 이순재가 남긴 대표적인 가족영화다. 일흔의 나이에 손주 둘을 키우는 노인의 이야기로, 시골에서 살아가는 아이들과 할아버지 사이에 존재하는 애증과 사랑, 그리고 이별을 다룬 작품이다.

이순재가 연기한 ‘덕구 할배’는 자신의 며느리에게 배신당한 뒤 손자들을 홀로 키우는 인물이다. 마을 허드렛일을 도맡으며 생계를 이어가고, 말보다는 행동으로 아이들을 가르친다. 하지만 손자 ‘덕구’의 눈에 할아버지는 고집스럽고, 잔소리만 많은 사람일 뿐이다. 하고 싶지 않은 웅변을 시키고, 대통령이 되라는 말도 한다. 로봇 장난감을 사주지 못하고, 구멍 난 양말을 신은 채 등굣길을 함께 걷는다.

아이의 시선에서 할아버지는 답답하고, 세상과 단절된 존재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이 모든 오해와 갈등을 거쳐 진짜 마음이 무엇이었는지를 서서히 드러낸다. 결국 할아버지는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아이들을 위한 마지막 준비를 시작한다.

‘덕구’는 가족이라는 주제를 무겁게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평범한 일상의 장면들을 통해 관객의 감정을 천천히 자극한다. 슬프고도 따뜻한 시선으로 아이와 노인의 관계를 풀어낸 이 영화는 이순재의 섬세한 감정 연기가 없었다면 완성되기 어려운 작품이었다. 누적 관객수는 31만 명에 불과했지만, 관람객 평점은 9.3점을 기록하며 입소문을 탔다. 상업적 성공보다 작품의 진정성으로 남은 영화였다.

2. 그대를 사랑합니다(2011)

고 이순재와 김수미 배우. /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네 명의 노인이 남긴 마지막 사랑 이야기

2011년 개봉한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강풀 작가의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흔치 않게 노년의 사랑을 다룬 작품이었고, 주인공 네 명 모두 실제 노인이었다. 김수미, 송재호, 윤소정, 그리고 이순재. 현재는 이 네 배우 모두 세상을 떠나면서, 영화는 시간 속에 멈춰진 마지막 작품이 됐다.

이순재는 귀가 잘 들리지 않고 투박하지만 마음만은 따뜻한 김만석 역을 맡았다. 골목길을 오가는 폐품 할머니 조순이를 사랑하게 되지만,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이 서툴다. 김수미는 그 조순이로, 현실의 노인 여성들이 겪는 쓸쓸함과 외로움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 영화는 인물의 삶이 담긴 골목, 오래된 동네,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연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낡은 벤치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폐지를 줍는 일상 속에서도 웃음을 만들어낸다. 말없이 서로를 챙기고, 잊힌 이들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마음은 뜨겁다.

흥행 성적은 164만 관객으로, 당시로서는 노년 로맨스라는 장르의 벽을 넘은 기록이었다. 특히 관객들에게 위로가 되는 작품으로 오랫동안 회자됐다. 이순재는 한 인터뷰에서 “어떤 역할이든 삶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 말처럼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인생 후반부의 사랑도, 설렘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말없이 보여줬다.

3. 굿모닝 프레지던트(2009)

로또에 당첨된 대통령으로 출연한 고 이순재. / CJ 엔터테인먼트

244억 앞에 고민하는 대통령, 이순재의 현실 연기

2009년 개봉한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장진 감독 특유의 상상력과 유머가 가득 담긴 작품이었다. 세 명의 대통령이 각자의 갈등을 겪는 이야기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풀어낸다. 그중 이순재는 퇴임을 앞둔 노년의 대통령 김정호 역을 맡았다.

평생 소탈하게 살아온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기 직전 244억 로또에 당첨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과거에 “로또에 당첨되면 국민을 위해 쓰겠다”고 했던 그는 실제로 당첨된 뒤 이 약속을 지켜야 할지 고민에 빠진다. 정치적인 수단으로 삼기에는 너무 거창하고, 개인적으로 쓰기엔 양심에 찔리는 돈. 혼자 속앓이하며 고뇌하는 장면은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묘한 씁쓸함을 남긴다.

이순재가 연기한 김정호는 전형적인 ‘대쪽 같은 어른’의 이미지다. 하지만 영화는 그 이면의 인간적인 갈등을 보여준다. 집무실 안에서는 국가를 위한 결정을 내리는 대통령이지만, 부엌에서는 라면을 끓이며 고민하는 한 명의 노인일 뿐이다. 영화는 이 대비를 통해 정치도 결국 사람이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장동건은 젊은 싱글 대통령 차지욱 역으로 출연했고, 고두심은 대한민국 최초 여성 대통령 한경자 역으로 분했다. 이 세 인물이 각자의 선택 앞에서 고민하는 과정은 한국 사회의 다양한 단면을 보여주는 풍자극으로 읽힌다.

영화는 255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도 성공했고, 제14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순재는 이 작품에서 코미디와 드라마를 넘나들며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연기에 대한 철학을 관객이 가장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풀어낸 작품이었다.

그의 모든 출연작은 단지 연기가 아니라, 어떤 메시지를 품은 시간이자 기억으로 남는다. “배우는 연기를 통해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가 생전에 했던 말처럼, 이순재는 연기로 삶을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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