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가 앗아간 당신과 함께…오늘, 가족 사진을 찍었습니다
참사 희생자 가족사진 촬영 프로젝트
<한겨레>는 5·18민주화운동, 성수대교·삼풍백화점 붕괴, 용산·세월호 등 참사 희생자의 사진과 유가족의 사진을 합성해 만든 ‘가족사진’을 소개합니다. 참사 희생자들의 삶을 복원해 유가족에게는 위로를 전하고, 독자에게는 참사의 비극을 되새길 수 있도록 하려고 합니다. 이번 작업은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지원과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에이아이(AI)·로봇연구소(소장 김익재)와의 협업을 통해 이뤄졌습니다. 한국인의 연령별 평균 주름양과 얼굴색 등의 데이터베이스 정보를 이용한 3D 나이변환 기술을 통해 참사 희생자의 현재 얼굴을 구현했습니다. <한겨레>는 12월19일 인터랙티브 페이지를 통해 더 많은 참사 희생자 가족의 모습과 사연을 소개합니다. 참사 희생자 가족분 중 촬영을 희망하는 분들은 사진부 전자우편(photo@hani.co.kr)으로 12월9일까지 사연을 보내주십시오.
박수현 세월호참사 희생자(1996-2014)
그날 이후 박종대씨 가족사진엔 아들 수현씨가 없다. 2014년 4월16일. 인천과 제주를 오가는 여객선 세월호가 전남 진도 앞바다 맹골수도에서 침몰해 수현씨를 비롯해 단원고 학생 등 304명의 귀중한 생명을 앗아간 대형 참사가 발생했다.
친구들과 함께 세월호를 타고 수학여행을 갔던 단원고 2학년 수현씨도 짧은 생의 마지막 긴 여행을 떠나고 말았다. 아버지는 엿새가 지난 4월22일 밤에야 차가운 주검으로 돌아온 아들을 안아볼 수 있었다.
아버지의 마음속에 수현씨는 늘 교복 입은 고2 모습으로 머물러 있다. 대학수학능력시험 준비에 애태우는 고3의 한숨도, 선후배들과 모꼬지를 다니고 캠퍼스를 누비는 대학생의 웃음도 보지 못했다. 어쩌면 첫 월급을 받은 아들은 좀 멋쩍은 표정으로 빨간색 내복을 건넸을지도 모른다.
“기억 저편에 간직한 아들과의 소중한 추억을 꺼내 보는 것이 삶의 전부가 되어버렸다”는 아버지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아들을 보고 싶다는 간절한 소원을 품고 ‘가족사진’ 촬영에 용기를 냈다. 아버지는 ‘완성체’가 된 가족사진을 보면서 “상상만 하던 아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니 반갑기도 하고 착잡하기도 하다”고 말했다.
양회성 용산참사 희생자(1951-2009)
양회성씨는 두 아들과 함께 식당을 운영하는 것을 꿈꾸며 2004년 서울 용산4지구에 삼호복집을 차렸다. 하지만 용산지구 재개발 사업이 2년 만에 재개돼 3개월분의 휴업보상비와 4개월분의 주거이전비만 받고 내쫓길 처지에 놓이게 된다.
2009년 1월19일 양씨와 철거민들은 용산 남일당 옥상에 망루를 짓고 농성에 들어갔다. 망루 농성 시작 25시간 뒤 김석기 서울지방경찰청장(현 국민의힘 국회의원) 등 지휘부는 경찰특공대를 투입해 강제진압 하기로 결정한다.
경찰특공대는 크레인에 매달린 컨테이너를 타고 옥상에 설치돼 있던 망루에 진입하려다, 박스가 망루와 충돌해 망루 내부가 무너지면서 망루 안에 즐비했던 시너 등 인화성 물질이 흘러내리거나 유증기로 변해 화재가 발생했다. 양회성씨를 비롯한 6명(철거민 5명, 경찰 1명)이 사망하고, 23명이 부상했다.
손경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희생자(1976–1995)
1995년 6월29일 아침 손경아씨는 늘 하던 “엄마,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인사와 함께 서울 서초구 삼풍백화점으로 출근했다. 그 모습이 손씨의 어머니 김덕화씨가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이 됐다. 삼풍백화점 1층 잡화부 직원이었던 손경아씨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당시 식당을 운영했던 손영수·김덕화 부부는 뉴스에서 나온 속보를 보고 허둥지둥 현장으로 달려갔다. 대규모 참사가 일어났지만 제대로 된 구조 작업은 이뤄지지 않았다. 유가족들이 잔해가 버려진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을 뒤져서 142구의 주검을 추가로 수습했다. 손씨 부부도 6개월여 만에 딸의 시신 일부를 확인했다.
피해자와 유가족들은 참사를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는 의미로 참사 현장에 위령비를 세울 것을 요구했지만, 서울시는 현장에서 4㎞ 떨어진 양재동 시민의숲에 삼풍참사 위령탑을 참사 2년 뒤 세웠다. 삼풍백화점 자리에는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섰다.
김중식 성수대교 붕괴 사고 희생자(1963-1994)
김학윤씨에게 형 중식은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한 집의 기둥이었다. 오랜 시간 호텔에 서서 근무하느라 허리디스크를 얻은 형은 아픈 몸을 이끌고 쉬는 날이면 이삿짐센터에서 일했다. 학윤씨는 동네 나무 아래에 앉아 형과 소주잔을 기울이며 “더는 내려갈 곳이 없으니 이제는 올라갈 일밖에 없다”라며 서로를 응원했다. 학윤씨는 그렇게 소중했던 형을 성수대교 붕괴 사고로 잃었다.
1994년 10월21일 아침 7시38분 서울 성동구 성수동과 강남구 압구정동을 잇는 성수대교가 무너져 49명이 한강으로 추락해 32명이 숨졌고 17명이 다쳤다. 당시 서른한살이었던 김중식씨는 16번 버스를 타고 출근하다 사고를 당했다.
김학윤씨는 “그때의 그 아픔과 같지는 않지만 10월만 되면 불안함과 슬픔이 공존한다”며 “사고의 아픔을 가진 사람들끼리 추모식에 참석해 안부도 묻고 서로 의지하게 돼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한다.
문송면 산재 사망 희생자(1971-1988)
문송면은 넉넉지 못한 농가에서 태어났지만, 영등포공고 야간반에 진학하기 위해 1987년 12월 큰형 근면이 있는 서울로 향했다. 송면은 고등학교도 들어가기도 전에 온도계 제작 회사인 ‘협성계공’에 입사해 온도계에 수은을 주입하는 일을 맡게 됐다.
입사 뒤 불면증과 두통, 식욕 감퇴 등의 증세로 병원을 찾았지만 의사는 감기라는 진단만 내렸다. 진단과 달리 허리 통증까지 더해지자 문송면은 1988년 2월 휴직계를 내고 고향으로 갔다. 송면은 가족 앞에서 발작을 일으켜 쓰러졌고, 서울대병원에서 수은 중독 및 유기용제 중독증이라는 진단을 받게 된다.
회사는 산재 처리를 미뤘고, 이런 상황을 감독해야 할 노동부는 손을 놓았다. 시민단체의 도움으로 소식이 세상에 알려졌고, 직업병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문송면의 병세는 악화했고, 1988년 7월2일 형 근면에게 “병 다 나으면 무서운 서울 떠나 농사지으며 엄마랑 살자”라는 말을 남긴 채 17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심동선 5·18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1950-1980)
3남 5녀 중 장남이었던 심동선씨는 이른 나이에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1980년 광주 동구 대의동 진다방 지배인으로 일했다. 계엄군이 광주를 점령해 영업이 어려워져 직원들은 출근하지 않았지만, 심씨는 매일 출근해 가게를 지켰다.
5월21일 아침, 광주 금남로로 모여든 수십만명의 시민들은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었고, 곧 무차별 총격이 시작됐다. 총성에 놀란 심씨는 건물 옥상으로 향했고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이 심씨의 머리에 박혔다.
원양어선을 탔던 동생 심월용씨는 1983년 귀국해, 형의 억울한 죽음에 분노하며 술에 의지하다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막냇동생 심경화씨는 말한다. “오빠의 빈자리가 우리 가족에게는 영원한 슬픔입니다. 현재 오빠의 모습을 우리 가족들은 그리워합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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