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에 꼭 가봐야할 마감임박 전시 4
안녕. 언제나 글 쓰려고 마음먹으면 몸살이 나는 객원 필자 전종현이야. 이번에도 어김없이 온몸이 자꾸만 졸려와서 혼났어. 봄이 오고 있는 걸까. 난 기온 차 때문에 아직도 썰렁하더라고. 봄이 되면 황사 걱정도 들지만, 그래도 바깥을 거니는 산책이 최고인 것 같아. 꽃놀이도 좋지만 갤러리 투어는 어때?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는 미술관과 갤러리가 참 많거든. 근데 미술관에서는 보통 대형 전시를 하니까 미술에 미치지 않는 한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을 때가 있어 그래서 창덕궁 쪽부터 삼청동까지 봄 길을 따라 걸으며 들릴 만한 흥미로운 갤러리 네 곳을 추천해 보려 해. 체력은 걱정하지 마. 내가 정말 알아주는 저질 체력인데 얼마 전에 직접 한바퀴 돌았거든. 느릿느릿 보는 나도 반나절이면 충분하더라고. 그러니까 평일이든, 주말이든 날씨 좋을 때 휘뚜루마뚜루 마실을 시도해 봐. 아! 참고로 갤러리 오픈 요일과 시간대는 조금씩 다르니까 미리 확인하고 가는 게 좋아.
[1]
노상호 개인전 <홀리 HOLY>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지하철 3호선 안국역 3번 출구로 나와서 조금만 걸어가면 현대건설 본사가 나와. 그리고 그 바로 옆에는 건물 세 채로 이루어진 일명 ‘아라리오 타운’이 있어. 아라리오는 우리나라의 유력 갤러리 중 하나야. 특히 여기 원서동 지역에는 건축가 김수근이 지은 걸작으로 유명한 옛 공간그룹 사옥을 뮤지엄으로 용도 변경한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가 명물이야. 옆에는 공간그룹의 또 다른 사옥을 활용해서 각종 다이닝 공간으로 쓰고 있어. 그리고 작년 2월에는 오피스로 쓰이던 건물을 일본의 유명 건축사무소인 스키마타 건축이 리모델링해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이 재개관했지. 원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바로 옆에 있었는데, 이쪽으로 이사 오니까 공간이 넓어져서 좋더라고. 뺄셈의 건축, 기존의 장소성을 반영하는 건축으로 워낙 유명한 스키마타 건축의 작업이라 건물 경험하는 맛도 있고, 아라리오 타운이 주는 그윽한 멋도 있으니, 나중에 시간이 되면 집중적으로 파봐도 좋아.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는 지금 노상호 작가의 개인전 가 열리고 있어. 지난 2월 29일부터 시작했는데, 늦장을 피우다가 이번 북촌 끝내기 투어 때 겨우 가봤어. 결론은 완전 추천. 예전에 노상호 작가를 인터뷰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보다 작업이 훨씬 흥미롭더라고. 이번 전시는 노상호 작가의 기존 작업을 알아도 재밌고, 몰라도 재밌어. 그만큼 시각적으로 유희성이 있으면서, 전시 구성에서도 완결성이 높다는 뜻이야.
노상호 작가는 회사원처럼 일하는 작가로 유명해. 매일매일 온라인 세상에서 부유하는 이미지를 종이에 옮겨서 그리는데, 정확히 말하면 인스타그램 피드에 뜨는 여러 이미지 중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서 프린팅한 후 실루엣을 먹지로 따서 종이에 그려내는 작업이 스타일이야.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규칙적으로 일하면서 아무리 바빠도 하루에 한 장은 그리는 게 철칙이고. (요즘도 그러겠지?) 특히 그의 시그니처 작품 ‘The Great Chapbook’은 마치 상상을 이어 붙이듯 하루에 조금씩 이미지를 그려 넣는 근면성실함이 돋보여.
근데 이번 전시에 선보인 작업은 기존과는 다른 맛이 있더라고. 노상호 작가는 자기 시야에 포착되는 동시대적 이미지에 굉장히 예민한 사람이야. 그래서 몇 년 전부터 범람한 3D 이미지 때문에 아예 3D 프로그램을 배워서 자기가 모델링하고 각도를 바꾼 장면을 큰 캔버스에 옮기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 큰 화면을 붓으로 칠하면 시간이 너무 걸리니까 도구도 에어브러시로 바꿨고. 이런 특성이 시대적인 이슈와 만나서 아주 흥미롭게 진화했더라고. 요즘 유행하는 AI 생성 이미지가 그 주인공이야.
AI 생성 이미지의 특징 중 하나가 매우 사실적인데, 동시에 초현실적이라는 거잖아. 초현실이라는 말은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뜻이지. 원래 그림이란 게 작가의 상상이니까. 초현실적인 면모는 당연한 걸 수도 있어. 하지만 마치 사진처럼 쨍하게 나와서 현실에 있음 직한 착각을 줄 정도로 초현실을 현실적으로 묘사하는 이미지는 보는 이에게 당혹감을 안겨줘. 상상이 현실이 된 모습이 매우 기묘하달까? 예를 들어서 불타는 눈사람이 놓인 풍경을 보면, ‘왜 눈사람이 불탈까?’ 생각하기 전에, ‘눈사람이 불탄다고?’ 반문부터 하는 것처럼 말야.
노상호 작가는 AI가 생성하는 이미지가 지닌 한계를 재미있게 역이용했어. 혹시 AI로 이미지 만들어봤어? 나는 마이크로소프트 검색엔진 빙에서 몇 번 써봤거든. 뭔가 기똥차게 나오는 것 같은데, 세밀하게 보면 이런 바보가 없어. 올 초 새해를 맞이해 동양 신화 속 용을 그리라고 몇 번을 말하는데 멀쩡한 용왕님 등에 자꾸 서양 게임에 나오는 박쥐 날개를 붙여서 완전 빡친 적이 있거든. 이런 간단한 실수가 의외로 자주 발생해. 동물을 그리라고 했는데, 머리가 두 개라든지, 다리 개수가 안 맞는다든지, 사람 눈을 4개로 그리고, 손가락은 6개, 7개로 그린다든지 등등.
노상호 작가는 이런 미숙한 AI 이미지를 두고 기적이 일어났다고 말해.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구현된 모습이 신화적이고 종교적으로 성스러운 징조라는 거지. 이번 전시 제목이 ‘홀리(Holy)’인 이유야. 그래서 작품을 보다 보면 계속 웃음이 나와. 홀리한 부분이 어디인지 숨은그림찾기가 돼버리거든. 어떨 때는 상황 자체가 말이 안 돼서 홀리하고, 어떨 때는 자세히 살펴봐야만 홀리한 구석을 알아챌 수 있어. 이건 작품을 직접 봐야 재밌으니까 따로 설명하진 않을게.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작품 실물에서 홀리함을 강화하는 방법이었어. 이번 전시에는 분홍색 사슴이 자주 나오는데, 사실 뭔가 신기하긴 하지만 그 존재만으로 홀리하다고 말하기엔 꽤나 평범하잖아. 근데 보면 볼수록 존재감이 남달라서 이리저리 관찰하니까 반짝이는 안료로 마무리했더라고. 사슴이 고요한 풍경에서 핑크빛으로 은은하게 빛나니까, 오, 꽤나 홀리홀리하면서 갖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 인스타그램 피드에서는 느낄 수 없는 맛이었어.
<더 그레이트 챕북3>
전시는 1층, 2층, 4층에서 열리는데, 4층은 이번 주제를 붓으로 그린 버전들이 있어. 예전 생각이 나면서 아래층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더라고. 더불어 화면을 조각낸 후 차례차례 그리면서 큰 그림을 완성하는 작업과 노상호 작가의 시그니처 작업인 ‘The Great Chapbook’을 배치해서 올드팬을 위한 서비스도 잊지 않았어. 노상호라는 작가를 꾸준히 봐온 사람에겐 반가움과 새로움이 교차하는 전시고,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충분히 흥미로운 인상을 줄 수 있는 똑똑한 전시야. 부담 없이 볼 수 있어서 봄나들이용으로 추천!
- 2024. 2. 29 – 4. 20
- 11시~18시(일, 월 정기 휴무)
- 서울 종로구 율곡로 85 아라리오갤러리
[2]
김윤신 개인전
국제갤러리
아. 어쩜 좋지. 노상호 개인전 설명을 너무 많이 했네. 지금 설명할 전시는 다른 면에서 엄청 재미있어서 말이 길어질 것 같은데… 최대한 압축해서 써야겠어. 경복궁 동십자각부터 시작해 저 멀리 청와대 코앞까지는 갤러리가 가득해. 중간에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까지 자리 잡아서 그 지위가 더욱더 공고해졌지. 이 많은 갤러리 중 딱 하나만 가야 한다면 너무 고르기 힘들지만, 지금은 꼭 들러야 할 곳이 있어. 바로 국제갤러리야. 국제갤러리야 워낙 유명하고, 주변에서 가장 건물이 많은 곳이기도 해. 전시장 건물만 4곳에 이르니까 매번 갈 때마다 다양한 전시를 볼 수 있는 게 장점이야.
그중 오늘의 추천은 바로 김윤신 작가의 개인전이야. 김윤신 작가는 요즘 한국 미술계에서 가장 ‘떡상’한 스타야. 극적인 이야기와 더불어서 그 존재만으로도 매력이 넘치거든. 내가 요즘 가장 주의 깊게 바라보는 작가이기도 해. 김윤신 작가는 올해로 89세인데, 우리가 아는 그런 할머니가 아니셔. 전기톱 들고 통나무를 자르면서 조각하는 걸크러시 어르신이야. 올해 초 국제갤러리와 리만 머핀 두 곳과 전속 계약을 맺고, 베네치아 비엔날레 본전시에도 초대받으면서 인생의 황금기를 보내고 계셔. 진짜 실제로 만나 뵙고 싶은데, 그 이유 중 하나는 기 받고 싶어서… 이렇게 정정한 분이랑 악수하면 내 저질 체력이 극복될 것 같은 아주 사적인 욕망 아래 어르신을 조우할 날을 손꼽아 고대하고 있어. 좋아하는 아이돌이랑 악수한 후 부정탈까 봐 손 안 씻는 사람 이야기는 인터넷에서나 봤는데, 내가 지금 그런 상태야.
김윤신 작가는 조각과 회화를 주로 하셔. 정확히 말하면 조각을 주된 종목으로 삼지만 회화도 병행하는 중이지. 요즘에는 조각에다 회화를 접목하는 데 재미를 느끼신 것 같아. 낯선 사람일수록 배경 설명을 좀 해야겠지? 작가는 해방 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났는데, 당시 오빠는 만주에서 독립운동하던 거물이었어. 그래서 어머니는 새벽마다 장독대 옆에 물을 떠 놓고 아들의 안부를 기원하는 기도를 드렸대. 작가가 돌을 주워다 쌓으면 초를 세워두고 두 손을 모아 비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염원이 가진 힘을 느끼고 예술로 풀어내는 게 그의 초기작이 됐어.
이러면 뭔가 향토적인 느낌이 나는데, 이분 아주 신여성이야. 6.25 전쟁 이후인 1955년 홍익대학교에서 조소를 전공하고, 1964년에는 프랑스 파리로 넘어가서 조각이랑 대리석 판화를 전공했어. 5년 동안 파리에서 지내면서 당시 파리로 유학 온 한국 작가들과 활발히 교류했고, 이후 한국에 돌아가서는 한국 1세대 여성 조각가로 맹렬하게 활동하며 상명대학교 교수로 임용됐어. 여기까지는 되게 엘리트 코스인데, 1980년 아르헨티나에 사는 조카 집에 놀러 갔다가 인생이 휙 뒤바뀌었어.
나무를 주재료 삼아서 조각하던 사람이 아르헨티나에 가보니까 고국에서는 생전 보지 못한 단단하고 우렁찬 나무들이 지천으로 널려있는 거야. 현지에서 나무를 구해 작품을 만들어서 전시했는데 완전 인기가 좋아서 3년 치 전시 스케줄이 다 찼대. 그래서 3년간 머물면서 이를 다 소화하니까 운명의 시간이 왔어. 귀국하느냐, 아니면 아르헨티나에 눌러사느냐, 결정해야만 했지. 그의 선택은 교수보다 예술가로 살다 죽으련다. 대학교에 사표를 낸 후 40년 간의 아르헨티나 생활이 시작됐지.
김윤신 작가의 대표작은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 分一)’이야. 동일한 제목으로 계속 연작을 내왔는데 ‘두 개체가 하나로 만나며, 다시 둘로 나누어진다는 뜻이야. 작가의 핵심 철학이자 삶의 태도인데, 엄청 어려운 말 같지만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생각하면 이해가 빨라. 눈앞의 나무를 오랜 시간 바라보면서 대화를 나누다가 느낌이 올 때 전기톱으로 통나무의 속살을 거침없이 자르기 시작하는데, 이때 나무와 작가가 만나면서 하나가 되고, 단면을 쪼개고 또 쪼갠 후 작업과 작가가 분리되면서 결국 완성작 하나가 남는다는 말이거든. 그래서 ‘합이합일 분이분일’ 시리즈에서는 나무의 생명력과 자유로움이 요동치듯 느껴져. 기 떨어지는 사람 집에 토템으로 놔두면 정말 도움이 될 것 같은 느낌이었어.
한국의 오방색과 남미 특유의 색이 어우러진 회화 작품도 정말 좋더라고. 개인적으로 ‘내 영혼의 노래’ 시리즈가 정말 환상적이었어. 캔버스를 가까이서 보면 엄청 다양한 요소들이 느껴지는데, 멀찍이 떨어지면 기의 흐름이 보인달까? 순수한 정신이 맹렬하게 움직이는 느낌이 한 마디로 보약 같았어. 뭔가 작품에 대한 간증이 자꾸 건강 쪽으로 빠지는데, 그만큼 사진으로 보면 이런 맛이 안 나. 직접 조각과 그림 앞에 서서 작품에 응축된 생명력을 느껴봐야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거야.
감상법이 너무 즉물적이라 그런지, 순간의 인상에 굉장히 집중해서인지, 아르헨티나에서 작업한 작품과 한국에서 작업한 작품 간의 차이가 좀 있더라고. 나무 원목의 차이인지, 표현 방식의 차이인지는 확정할 수 없지만 말야. 요즘 시도하는 재활용 나무를 구조적으로 덧붙이고 그 위에 회화적인 처리를 하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라서 아쉬웠어. 아무래도 박력에 반해서 그런가 봐.
이 자리를 빌려서 국제갤러리 측에 컴플레인하고 싶은 게 있어. 이번 김윤신 작가의 개인전은 크게 세 곳의 공간에서 열리는데, 맨 처음 공간은 너무 비좁아서 회화 작업을 제대로 즐길 수가 없었어. 아주 적절했던 두 번째 공간, 넓어서 회화를 앞뒤로 움직이며 감상하기 좋았던 세 번째 공간에 비해 작품의 매력도를 떨어지게 하더라고. 그리고 예전과는 달리 공간마다 사람들을 배치해 뒀던데, 그들의 역할을 모르겠더라. 갤러리에는 사람을 세우는 경우가 드물거든. 그래서 당연히 도슨트인가 생각했는데, 작품에 대한 물성과 기법을 물어봐도 전혀 모르더라고. 그들이 하는 일은 작품에 손상이 갈까 봐 손대지 말라고, 접근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뿐이었어.
갤러리라는 공간은 기본적으로 작품을 진열한 후 판매로 이어지는 게 핵심인데, 이렇게 하면 진짜 컬렉터 혹은 잠정적인 컬렉터들이 불쾌할 것 같았어. 제대로 응대도 못 하고 경고음만 날리는 사람들을 세워놓는 이유가 무엇일지 의문이 들면서, 마치 명품 매장에서 박대받는 느낌이었거든. 그림 바로 옆에 서있는 사람에게 작품 캡션에 쓰여 있는 ‘Mixed Media’의 구성이 무엇인지 물어보고도 “잘 모르겠는데요?”라는 말이 나오면 큰 문제 아닐까. 게다가 사람들을 우르르 끌고 와서 작품 해설하는 외부인(딱 봐도 돈 받고 투어 도는 사람)이 참 시끄럽더라. 게다가 설명까지 엉망이라 안 듣고 싶은데, 귀에 헛소리가 자동으로 박혀서 곤욕이었어. 앞으로 이런 일이 많이 생길 것 같아서 진심으로 대처 방향이 필요해 보여. 국제갤러리 측에 아는 사람 있으면 소식 좀 전해주길 바라. 평소 내가 기억하던 국제갤러리의 전시치고는 소프트웨어 측면에서의 격이 떨어져서 유감이었어.
국제갤러리 한옥에서는 김용익 작가 개인전, K3에서는 강서경 작가 개인전도 하니까 시간이 충분하면 두루두루 살펴보길 권해.
- 2024. 3. 19 – 4. 28
- 10시~18시, 일 10시~17시
- 서울 종로구 삼청로 54
[3]
프랏차야 핀통 개인전 <내일을 돌보는 오늘>
바라캇 컨템포러리
(앞) <운명의 기관(집합>, (뒤) <내일을 돌보는 오늘>
국제갤러리 바로 옆에 심상치 않은 기운을 내뿜는 공간이 있어. 바로 고미술품을 전문으로 다루는 바라캇 갤러리야. 뮤지엄급 컬렉션을 자랑하는 국제적인 갤러리의 서울 지점인데, 현대미술 전시를 다루는 공간인 바라캇 컨템포러리도 바로 옆에 함께 운영해. 이솝 삼청점 바로 뒤에 위치해서 길가에서 전체 풍광을 보면 운치가 남달라. 앞서 소개한 곳들에 비해서는 작은 규모지만, 바라캇 갤러리 본관은 유리창 너머로만 봐도 신비한 세계라서 마치 외국의 뮤지엄으로 순간 이동한 느낌이 들고, 바라캇 컨템포러리는 한국에 잘 소개하지 않는 외국 작가들을 적극적으로 소개하는 곳이라서 뜻깊어. 예전에 청와대 바로 옆에 있었을 때 층고가 높아서 정말 좋았는데, 거기는 이제 김해김 플래그십 스토어로 바뀌었더라고.
지금은 태국 방콕에서 활동하는 프랏차야 핀통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어. 되게 낯선 작가라서 사전 정보 없이 별 기대하지 않고 갔는데, 결과적으로는 정말 보석 같은 전시였어. 작품 수는 많지 않아. 눈에 바로 띄는 스타일도 아니라서 약간 밍밍하기도 해. 이런 점에서 바라캇 컨템포러리를 칭찬하고 싶은 부분이 있어. 보통 갤러리들은 전시를 열 때 개괄적인 설명과 작가 소개, 그리고 작품에 대한 간단한 캡션 정보만 제공하거든. 근데 바라캇 컨템포러리는 작품마다 깨알처럼 설명을 제공하더라. 이 설명을 보는 거랑 안 보는 거랑 하늘과 땅 차이야. 그냥 눈으로만 둘러보면 ‘뭐지?’ 했던 작품이 설명을 읽은 후로는 ‘우와’하고 찐감탄이 나오면서 작가가 정말 똑똑하고, 작품이 정말 좋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어.
<숟가락[원반]>
밤하늘의 별 무리를 찍은 것처럼 보이는 사진들이 사실 태국 길거리에서 복권을 꽂아 팔고 난 후 그 흔적이 남은 골판지 판에 햇살이 비친 모습이라는 사실을 알면 아름다움과 탄식, 씁쓸함과 슬픔, 그러면서 일말의 희망이 복합적으로 밀려와. 이게 뭔가 싶은 금속 덩어리(마치 떡을 만들다 만 것처럼 생겼어)가 알고 보면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이 보급선을 끊기 위해 바로 옆 나라인 라오스에 아무런 공지 없이 투하한 수많은 폭탄 중 아직 땅속에서 발견되는 불발탄을 녹인 결과물이라는 사실은 충격적이야. 베트남 전쟁 동안 라오스에 투하된 폭탄의 양이 제2차 세계대전 내내 독일과 일본에 투하된 양을 합친 것보다 많다는 사실은 국가 기밀로 분류됐다가 불과 10년 전에야 세상에 공개됐대. 불발탄을 녹여 식기와 기념품을 만들어 파는 주민들에게 작가가 받은 작품 제작비를 전달하고 무엇인가 주조해달라고 부탁한 과정의 결과물이 바로 벽에 걸린 요상한 금속이라는 걸 알면, 이 작은 물체에 담긴 엄청난 역사의 파고에 전율을 느끼게 돼. 아는 만큼 보이는 상황에서 꼼꼼한 작품 소개는 그야말로 목마른 이에게 필요한 샘물 같아.
<모든 것의 일부와 아무 것도 아닌 것>(철원과 사랑)
지하 바닥에 설치한 거울처럼 매끈한 금속 구조물의 맥락, 평범한 영상처럼 보이는 비디오에 담긴 내력, 그리고 두루미의 알을 그린 회화 작품 이면에 흐르는 슬픈 사랑 이야기는 현대 미술이 지니는 내러티브의 힘을 제대로 보여주는 느낌이야. 쭉 돌아보면서 겉으로만 평가하던 나에 대해 반성을 많이 했어. 사물에 숨겨진 이야기를 제대로 알 때 새로운 눈이 떠지는 걸 체감했는데, 이런 경험을 함께 나누고 싶어. 추천이야!
- 2024. 3. 28 – 2024. 5. 26
- 10시~18시(월 정기 휴무)
- 서울 종로구 삼청로 58-4
[4]
토마스 루프 개인전
PKM 갤러리
아. 드디어 마지막이다. PKM 갤러리는 청와대 춘추관 입구 바로 옆에 있어. 정확히 말하면 청와대 춘추관 앞까지 진격하면 왼쪽에서 세 번째 자리지. 첫 번째는 공근혜 갤러리, 두 번째는 김해김 플래그십 스토어(옛 바라캇 컨템포러리 자리야), 그리고 PKM 갤러리야. 여기도 갤러리 공간이 여러 군데로 나뉘어 있어서 동시에 다양한 전시를 진행하는데, 내가 방문한 곳은 본관이었어. 사진작가로 유명한 토마스 루프의 개인전 <d.o.pe.>가 열리고 있거든.
토마스 루프는 독일 쿤스트 아카데미 뒤셀도르프에서 베허 부부에게 사진을 배운 후 1980년대부터 뒤셀도르프 사진학파의 주요 멤버로 활동한 작가야.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토마스 스트루스, 칸디다 회퍼 등이 대표적인 멤버들이지. 다른 멤버들은 유형학적 측면을 강조하는 다큐멘터리 사진에 몰두했는데, 토마스 루프는 굉장히 다양한 실험을 끊임없이 해온 작가로 유명해. 회화 같기도, 컴퓨터 그래픽 같기도, 추상적인 흔적 같기도 한 그의 사진을 보면 사진 예술의 영역이 어디까지인지 실험하는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떠올라.
이번 전시는 더욱더 실험적이야. 자연에서 발견되는 유사한 구조의 반복인 프랙탈 구조를 사이키델릭한 형태로 평면에 투사하는데, 그 대상이 인화지가 아니라 무려 카펫이야. 최대 2m 90cm에 달하는 거대한 카펫에 몽환적인 이미지를 프린팅했대. 예전부터 하고 싶었는데 기술이 따라주지 못하다가, 요즈음에 가능해져서 2022년부터 진행 중인 ‘d.o.pe.’ 연작이야. 실제 관람할 때의 느낌이 굉장히 짜릿해. 보통 초대형 사진의 경우, 그에 맞는 액자를 짜고, 빛을 반사하지 않는 투명한 물성으로 작품을 보호해야 하거든. 그래서 평면적인 맛이 날 수밖에 없고, 눈으로 볼 때는 괜찮아도 사진만 찍으려고 들면 귀신처럼 조명을 반사해서 스마트폰에 제대로 담는 게 쉽지 않아. 근데 이건 카펫이잖아. 그래서 그냥 벽에 걸어놨어. 바로 코앞까지 가서 봐도 괜찮을 정도야. (물론 너무 가까이 가면 갤러리 측에서 조심해달라고 말하는데, 나는 정말 10cm 수준까지 코를 박아서 제지당했으니 내 잘못이야.)
게다가 은은하게 빛나는 융단은 결에 따라서 색감이 묘하게 다르더라? 정면과 측면에서 볼 때 다르니까 이 넓은 카펫 작업 하나도 계속 유심히 쳐다보게 돼. 공상 세계를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초현실적인 풍경은 빠져들 것처럼 매력적이고. 이건 멀리서 제대로 볼 때의 감흥보다 거리를 서서히 좁혀가면서 전체를 조망하는 눈이 흐릿해지고 요소에 집중하기 시작하며 펼쳐지는 다양한 감상법이 좋더라고. 물론 다른 사람은 조용히 봤고, 나 혼자만 좀 유난스럽게 마임 퍼포먼스하듯 보긴 했어. 용기가 있는 사람에게 추천할게. 여기서 꿀팁 하나. 나는 사진보다 동영상으로 찍으니까, 작품에 대한 기억이 더 강렬하게 났어. 이게 보통 큰 작품이 아니라서 사진 몇 컷으로는 담기 힘든데, 동영상 모드로 촬영하면서 이곳저곳 기록하니까 아주 좋더라고. 덕분에 거대한 이미지를 재미있게 기록할 수 있어서 좋았어. 여기는 다른 전시보다 마감일이 빠른 편이라, 답사를 계획할 때 참고하면 좋겠어.
- 2024. 2. 21 – 4. 13
- 10시~18시(일, 월 정기 휴무)
- 서울 종로구 삼청로7길 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