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수약 공급망 비상…퇴장방지약 62%가 제약사 1곳 의존

허정연 2026. 5. 30.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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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수의약품 공급망 위기


[사진 AI 생성이미지]
“응급 환자의 생명과 직결되는 필수의약품이 없어서 제때 치료를 못하게 될까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최근 의료계 현장에 비상이 걸렸다. 응급 상황에 주로 쓰이는 필수의약품 공급이 잇따라 중단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경련이 멈추지 않는 응급 소아 환자에게 투여되는 로라제팜 성분의 아티반주사 생산이 중단된 게 대표적이다. 이에 더해 리도카인 등 기본 주사제와 항생제·마취제·항암제까지 의료 현장에서 매일 사용되는 필수의약품의 공급 불안이 가시화되면서 불안감이 날로 증폭되고 있는 모습이다. 의료계에서는 “‘제2의 아티반 사태’가 언제든 재발할 수 있는 급박한 상황”이란 우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정부는 2000년 퇴장방지의약품(퇴방약) 제도를 도입해 운영 중이다. 의료 현장에 꼭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필수의약품을 지정해 생산과 공급을 유지하려는 취지다. 문제는 상당수의 퇴방약이 단일 제조사에 공급을 전적으로 의존하다 보니 제조사가 수익성 등을 이유로 생산을 중단할 경우 공급 중단 사태를 피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실제로 중앙SUNDAY가 동일 성분·제형의 374개 퇴방약을 전수조사한 결과 231개 품목(61.8%)의 제조사가 한 곳뿐인 것으로 나타났다. 필수의약품 10개 중 6개 이상이 언제든 공급이 중단될 수 있는 취약한 상황에 노출돼 있는 셈이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복제약 건보 약가 쥐꼬리, 필수약 생산 포기 속출…“전쟁터서 총알 떨어진 격”


단일 제조사의 구조적 문제는 일부 의약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공급 불안 우려가 제기되는 품목 중에는 응급실과 중환자실·수술실에서 매일 사용하는 필수 약제도 적잖다. 당장 아티반주사를 비롯해 대한생리식염주사액 30㎖, 제일에페드린염산염주사액4%, 휴리온스주 등이 손에 꼽힌다. 심정지·쇼크 환자 치료에 사용하는 염산에피네프린주사액과 국소 마취제인 리도카인 주사제, 중증 감염 치료 항생제 등 병원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사용하는 상당수 필수의약품도 극소수 업체에 생산을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이형민 한림대성심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퇴방약이 부족하면 응급실이란 전쟁터에서 총알이 떨어지는 격”이라며 “필수의약품 공급망이 흔들리면 개별 병원이나 응급실 차원을 넘어 의료 현장 전체가 크게 위협받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 교수는 이어 “전신마취제인 에토미데이트 부족 사태 때도 다른 비슷한 종류의 약을 써야만 했는데, 약은 종류에 따라 작용 기전도 다르고 방식도 다르다”며 “식도보다 과도로 사과를 깎는 게 훨씬 편하듯 촌각을 다투는 응급실에서는 그 미세한 차이가 죽고 사는 문제와 직결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홍기정 서울대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도 “대체 약이 있다 해도 결국엔 조금은 부족한 약을 쓰는 것으로, 모두가 자율주행차를 모는데 구형 자동차를 타는 셈”이라며 “특히 아티반·리도카인·생리식염수, 이 세 가지 필수의약품이 없으면 응급실은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아티반주사 공급 중단 논란은 이런 구조적 문제를 드러낸 대표적인 사례다. 기존의 유일한 생산 업체였던 일동제약은 지난해 1월 수익성 저하와 노후 설비 등을 이유로 생산 중단 계획을 밝혔다. 하지만 이후 1년 넘게 뚜렷한 대책이 마련되지 못하면서 의료 현장의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공급 중단 위기가 커지자 해당 약물을 많이 사용하는 대형 병원을 중심으로 사재기 현상까지 벌어졌다”고 전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최근 삼진제약을 새로운 생산 업체로 지정했지만 실제 공급이 이뤄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원가 올라도 26년간 11원에 묶인 약도
이처럼 취약한 공급망이 고착화된 배경에는 장기간 이어진 저약가 구조가 자리하고 있다는 게 의료계의 중론이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김선민 의원실 자료에 따르면 퇴방약의 약 30%는 5년 이상 상한 금액이 동결됐고 20년 넘게 약값이 한 차례도 오르지 않은 품목도 57개에 달했다. 알파아세트아미노펜정은 감기·발열·통증 등에 사용하는 필수의약품이지만 2000년 퇴방약 지정 이후 26년간 상한금액이 11원에 묶여 있다. 정부가 지급하는 사용장려금도 1원에 불과하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하지만 퇴방약은 대부분 의료 현장 의존도가 높은 데 비해 생산 수익성이 낮은 게 현실이다. 특히 특허가 만료된 제네릭(복제약)은 건강보험 약가 인하가 반복되면서 장기간 가격이 정체된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런 가운데 원료비·인건비·물류비와 의약품 제조·품질 관리 기준(GMP) 유지 비용 등이 지속적으로 상승하면서 생산 여건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 관계자는 “오래된 제네릭은 약가 인하가 누적되면서 초저가 구조가 고착됐다”며 “비용은 계속 오르는데 제품 가격은 오랜 기간 그대로인 경우가 많다 보니 수익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 중소 제약사 대표는 “대형 제약사는 다른 약에서 나는 수익으로 버틸 수 있지만 중소 제약사는 수익이 나지 않는 퇴방약 생산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공급 불안 문제는 퇴방약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신생아·소아 중환자실에서 사용하는 필수 주사제도 예외가 아니다. 식약처는 지난 15일 스테로이드 계열 주사제인 코티소루주 생산 업체가 오는 7월부터 공급을 중단한다고 밝혔다. 코티소루주는 쇼크 상태의 신생아와 소아 중환자의 혈압 유지에 사용되는 필수의약품이다.

김한석 대한소아청소년과학회 이사장은 “초미숙아에게 반드시 필요한 이 약이 없으면 사망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장윤실 대한신생아학회장은 “신생아는 여러 특성상 성인 약으로 대체하기 어렵다”며 “생산·수입 중단 위기가 반복돼 현장의 불안감이 증폭되고 있는 만큼 정부 차원의 대응이 시급하다”고 호소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해열제·항생제·기관지확장제와 장염 치료제 등 일선 소아청소년과에서 사용되는 필수약 품절 현상도 끊이지 않고 있다. 이홍준 대한소아청소년병원협회 부회장은 “아이들에게 400원, 700원짜리 필수약 하나 안정적으로 공급하지 못하는 게 말이 되느냐”며 “국가 시스템 차원에서 해결책을 강구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개별 제약사 선의에 국민건강 맡겨서야
정부도 대응에 나섰다. 보건복지부는 최근 퇴방약 약가 기준을 최대 10% 인상하고 퇴방약 직권 지정 근거와 정책 가산 제도 등을 도입해 생산 중단 위험 품목 관리 체계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공급 중단 우려 품목을 생산하는 기업에 생산시설·장비 구축 비용을 지원하는 예산도 지난해보다 네 배 늘어난 36억원 규모로 책정했다.

이에 대해 의료계와 제약업계에선 단기적 약가 인상과 일회성 지원만으론 오랫동안 누적된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워낙 낮게 책정된 약값에 비해 인상액이 충분하지 않은 데다 원료 의약품 상당수를 중국과 인도에 의존하는 공급망 구조도 여전히 취약하기 때문이다. 한 제약기업 임원은 “수급 안정 선도기업 지정 기준도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채 높게 책정돼 대부분의 업체가 실질적인 혜택을 보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전했다.

홍 교수도 “필수의약품 공급 문제는 오래전부터 예견됐던 위기”라고 짚었다. 홍 교수는 “교과서에 명시된 약조차도 현장에 투입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게 현실”이라며 “행정의 속도가 현장을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 건강보험 적자 문제에 가려 현장의 목소리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난감해하는 분위기다. 필수의약품 약가를 인상하면 건강보험 재정과 환자 본인 부담이 증가할 가능성이 커진다. 반대로 낮은 약가 구조를 유지할 경우 지금처럼 생산 중단과 공급 부족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이에 대해 의료계에선 필수의약품 공급을 개별 제약사의 경영 판단에만 맡길 게 아니라 국가 차원의 공급망 관리 체계로 접근해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이 교수는 “수가와 약가를 낮게 유지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게 현장의 위기와 상관없이 꼭 달성해야 할 목표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라며 “필수의약품은 경제적 관점이 아니라 생명의 관점이 우선시돼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병원약사회 관계자는 “공급 불안이 예상될 경우 정부와 제조사·의료기관이 함께 대응할 수 있는 상시 관리 체계 구축이 시급하다”며 “유럽연합(EU)이 최근 필수의약품 공급 문제에 회원국 정부 차원에서 공동 대응하기로 한 것도 참고할 만하다”고 제언했다.

허정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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