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락 간' 대통령직…명태균·김대남 사태 진짜 문제는?
윤석열 대통령은 통치 불능 상태에 가까워지고 있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권력은 정당성에서 나온다. 대통령에게 정당성이 있다는 믿음 자체가 중요하다. 대통령의 실제 힘이나 능력과는 상관없다. 공직자가 공직에 복무할 수 있는 동인 역시 그 무형의 권위에서 나온다. 막스 베버는 전통적인 권위와 합법적인 권위를 분리했지만, 현대 민주주의 체제에서도 합법적 권위가 작동하기 위해선 통치자의 '카리스마'가 일정 부분 필요하다.
지금 한국 정치에서 대통령이 '비선'에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다는 것보다 더 문제인 건, 대통령의 권위가 땅바닥에 내팽개쳐졌다는 점이다. 대통령의 영(令)은 신뢰에서 나온다. 신뢰를 잃으면 영이 서지 않는다. 영이 서지 않으면 대통령직은 무용하다.
'명태균 스캔들'이라는 스토리가 어떻게 끝날 지는 알 수 없다. 선거 기술자의 탈법적 마키아벨리즘과, 법망을 뚫는 비선 실세의 활보, 리더를 우습게 아는 공직자들이 얽히고 설킨 이 이야기는 법정 드라마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그 과정에서 한 쪽에선 '다소 부적절하지만 법적으로 문제 없다'고 할 것이고, 다른 편에선 '탄핵 사유가 차고 넘친다'고 맞설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싸움은 부질없다. 대통령의 신뢰자본이 파산했으니까. 사람들은 이제 어떤 게 대통령의 진짜 모습인지 의심하고 있다.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이 명태균을 두 번 만났다고 해명했으나 거짓으로 드러났다. 최소 네번을 만났다. 거짓말보다 더 중요한 건 이 스토리에 등장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대중들이 상상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명태균은 서초동 아크로비스타 자택을 "셀 수도 없이 방문했다"고 주장한다. 대통령이 명태균을 '명 박사'로 호칭한다는 말도 이준석에 따르면 거짓이 아니다. 김종인에 의하면 김건희가 명태균의 전화기로 자기 남편을 만나달라 말했다고 한다. 이 증언들에서 상상되는 건, 부인이 주선한 정체 불명의 선거 브로커 앞에 두 손 공손히 모으고 앉아서 '선거 기술'에 대해 경청하고 있는 초라하고 심약한 초보 정치인의 모습이다.
"(나를) 잡아넣을 건지 말 건지, 한 달이면 하야하고 탄핵일 텐데 감당되겠나“라고 대통령을 향한 협박이 백주대낮에 버젓이 방송을 탄다. 그러나 대통령은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는다. 명태균의 사설 업체가 3억7000만 원어치 여론조사를 했다는 의혹이 사실이라면 정치자금법 위반이 될 수 있다. 여기에서 상상되는 건, 웬 선거꾼에게 멋 모르는 대통령이 구질구질하게 인질로 잡혀 있는 형상이다.
"제가 집사람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중앙일보> 강찬호 9월26일자 칼럼)라고 말했다는 대통령의 모습은 심하게 얘기하면 부두술사에게 사로잡힌 인형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수석들이 있는 자리에서 김 여사가 대통령에게 민망한 언행을 하는 장면을 여러 번 목격했다"(<중앙일보> 이하경 10월7일자 칼럼)는 전언에서 상상되는 건 수석들 앞에서 영부인에게 면박 당하는 대통령의 어리바리한 모습이다.
“지금은 저게 지금 꼴통 맞아. 본인이 뭘 잘못했냐고 계속 그러고 있대"(김대남 전 대통령실 행정관)란 증언에서는 널리고 널린 직장 내 욕받이 상사의 모습이 연상된다. 김대남이 전한 용산의 풍경은 "십상시 같은 몇 사람이" 있는데 "김 건희 여사와 네트워킹이 돼가지고… (대통령실을) 쥐었다 폈다" 하는 곳이다. 청와대를 박차고 들어간 용산은 간신이 드글거리는 구중궁궐이다.
선거꾼에게 휘둘리는 허약한 대통령, 부하들이 우습게 보는 대통령, 최소한의 권위마저 땅바닥에 떨어진, 위엄과 신망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민낯들이다. 이런 단편적 이미지 조각들이 기워낸 누더기같은 대통령의 'PI'는 온갖 비선들의 복마전 위에 선 채, 선거 요행이나 바라는 세상물정 모르는 노년의 한 남성이다. 자신의 운명조차 개척할 힘이 없어 보이는 이런 대통령을 받아들여야 할 유권자들의 심경은 어떻겠는가. 참으로 민망하다.
'바이든 날리면' 사태에서 MBC를 향해 으르렁대며 방통위원장을 세번이나 탄핵으로 몰아넣은 그 집요한 카리스마는 어디로 갔나. 채상병 사건을 수사한 박정훈을 '항명 수괴'로 몰던 대통령의 기개, '공산 전체주의'에 일갈하던 근원불명의 신념들은, 노조를 '건폭'으로 몰던 자신감은 모두 어디로 갔나. 명태균과 김건희, 김대남 앞에선 왜 그 기개를 보여주지 못하나.
대통령이 권위를 잃은 순간 정치 생명은 끝이 났다. 영이 서지 않는 대통령을 따를 공직자는 없다. 스스로 위신을 팽개친 대통령을 존경할 사람은 없다.
어느날 에메랄드 시티에 오스카 조로아스터라는 사람이 열기구를 타고 불시착한다.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줄여서 '오즈'라고 불렀다. 그는 서커스단에서 배운 복화술과 여러 조악한 기구들를 이용해 오즈의 사람들을 속이고 스스로 '대마법사'가 돼 에메랄드 시티를 통치한다. 도로시에게 서쪽 마녀를 없애면 '마법'을 사용해 집에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허풍을 치지만 그의 조악한 속임수는 곧 탄로나고 만다. 우린 지금껏 서커스단원 오사카 조로아스터를 오즈의 마법사로 모시고 살고 있었던 것인가.
[박세열 기자(ilys123@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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