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창의 Next Paradigm <7>] 기술로 중국에 추월당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김우창 한국과학기술원(KAIST) 산업 및 시스템공학과 교수 2024. 10. 21.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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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창 한국과학기술원(KAIST) 산업 및 시스템공학과 교수서울대 산업공학, 미 프린스턴대 경영과학 및 금융공학 박사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직전까지는 중국에 꽤 자주 방문했다. 국경이 닫히기 직전 마지막으로 다녀온 곳도 중국 베이징이다. 2015년 무렵 중국의 자본시장은 유아기에 머물러 있었고, 중국 정부는 급속도로 성장한 경제력에 걸맞은 금융 시스템을 원했다. 당시 중국은 금융 산업을 기술 산업으로 만들 복안을 가지고 있었다. 금융 산업 내에서 기술 표준을 선정하는 작업이 본격화되는 시점,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와 무제한에 가까운 기업의 자본력을 바탕으로 칭화대 등 일류 대학에서 새로운 금융기술 개발을 본격화했다. 중국 시장의 특성상 한국처럼 영업점 위주의 오프라인 사업은 큰 성장을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이기도 하고, 시장이 성숙한 이후에 정부의 금융 부문에 대한 강한 통제력 역시 필수적이었기에 기술 기반의 온라인 금융 시스템, 즉 현금 없는 사회로의 변혁은 필연에 가까웠다.

필자가 베이징의 금융 업체와 칭화대의 동료 학자에게 금융 공학 분야의 전문가 자격으로, 본격적으로 초청받았던 건 2015년 무렵이다. 당시 한중 관계도 상당히 돈독했고, 많은 이가 중국을 기회의 땅이라 여겼던 시절이기도 했다.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는 대가로 새로운 학문적 협력 기회를 탐색하는 것이 충분히 가치 있다고 여겨, 기꺼이 중국 동료 학자의 초청에 응했다. 훨씬 선진화된 자본시장을 갖춘 우리 기준으로 당시 중국의 금융 시스템은 상당히 후진적이었다. 그때는 중국 정부의 청사진이 완성되는 건 최소 10년, 현실적으로 20~30년은 걸리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2017년 무렵부터 문득 두려운 감정이 들기 시작했다. 한한령(限韓令·한류 금지령)이나 미·중 간의 본격화된 갈등 때문이 아니었다. 중국의 기술 발전 속도가 빨라도 너무 빨랐기 때문이다. 최초엔 필자가 가르쳐주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불과 2~3년 사이, 필자와 중국의 동료 학자 사이의 관계가 역전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필자는 배우는 입장이 되었다. 전통적인 레거시 시스템이 전무한 중국의 금융 시스템의 특성상 새로운 시도가 쉬운 것도 한몫했겠으나, 본질적인 이유는 집착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의 기술을 향한 사회적 열망과 그에 걸맞은 투자 때문이었다.

2023년 기준, 국내에서 수능을 치른 학생은 45만 명가량이다. 같은 해, 중국의 수능인 가오카오(高考)에는 1300만 명이 넘는 학생이 응시했다. 우리의 30배가량이다. 이 중 최상위 성적을 받은 학생은 대부분 칭화대 등 일류 대학의 이공계 학과를 선택한다.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중국의 기술 인력은 우리보다 압도적이다.

중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R&D) 투자 비율도 매우 가파르게 성장했다. 2012년, GDP 1.9% 수준인 1조위안(약 189조5600억원)이었던 연구개발비는 매년 두 자릿수 증가율을 유지하여 2023년 3조3000억위안(약 625조5480억원)까지 성장했다. 같은 해, 우리 정부 예산 총액이 638조원이었다. 중국의 기술 굴기는 단순한 구호가 아닌, 국가의 명운을 건 총력전이었다.

최초 중국에 초청되었을 당시, 현지 기업과 학자로부터 상당한 환대를 받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환대는 줄어들었다. 그리고 어느 시점부터는 자청해 중국에 방문해야만 했다. 딱히 부르지도 않는데 자청해서 찾아가는 것이 기분 좋을 리 없었지만, 중국의 기술 발전을 직접 옆에서 살펴보지 않으면 도저히 경쟁할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 때문이었다. 한국 학자 한 명이 중국 학자 30명의 성과를 내야 경쟁이 된다는 건데,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최소한의 경쟁을 위해서는 어떤 분야의 기술에 중국이 많은 투자하고 있는지 알아야만 했다. 그러려면 고개를 숙이더라도 그들이 하는 것을 살펴보고 싶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직전,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이 베이징이었던 것도 이런 이유다.

2019년 겨울 마지막 베이징 방문 때, 세미나가 끝난 후 저녁 술자리에서 칭화대의 박사과정 연구원과 한 대화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미·중 갈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돌아온 것은 놀랍게도 “미국은 중국의 가장 큰 적이지만, 동시에 가장 좋은 친구다”라는 대답이었다. 미국이 중국을 괴롭히기에 분열될지도 모를 14억 중국인이 똘똘 뭉치게 되었고, 덕분에 중국인은 다시 한번 중화 민족의 중흥을 이뤄낼 거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우리보다 질적으로 우수하며 양적으로 압도적인 기술 인력이 본업에 충실함으로써 국가를 위한 봉사와 충성을 하겠다는, 지극히 동아시아적인 명분까지 갖추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때 느낀 감정은 순수한 공포였다.

코로나19가 터진 후 5년 가까운 세월, 교류는 완전히 끊겼다. 당시 필자에게 동료이자 경쟁자였던 중국의 학자들이 지금 무엇을하고 있는지 아는 바 없다. 그저 우리보다 한참 앞서 있겠거니 추정할 뿐이다. 그리고 올해 초, 과학기술정보통신부(과기부)는 대중에겐 충격적이었겠으나, 필자는 당연하다 느꼈던 보고서를 발표했다. 중국의 기술력이 사상 최초로 우리를 추월했다는 내용이었다.노벨상은 아직 없다지만, 현재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는 것은 기술력임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척박한 환경에서 이를 악물고 밤을 새워가며 절차탁마한 우리 선배들 덕이다. 덕분에 1990년대까지만 해도 질은 좀 떨어지지만, 저렴한 가격으로 승부를 냈던 우리 제품을 21세기에 들어 프리미엄을 붙여 고가에 팔 수 있게 되었다. 1990년대 세계 무대에서 우리가 차지했던 위상은 오롯이 중국에 돌아갔다. 이제 중국에 본격적으로 기술력에서 뒤처지기 시작했으니, 초일류 시장에서 경쟁하는 것도 점점 버거워질 것이 명백하다.

10월 8일 과기부 국감에서 전문 과학 분야의 비자발적 실업자가 3만5000명으로, 전년 동월 대비 20% 넘게 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또한 올해 8월까지 연구 및 기술 인력의 신규 실업 급여 신청자 수가 2만여 명에 달한다는 사실이 공개되었는데,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했을 때 5000명 가까이 급증한 수치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광주과학기술원(GIST), 울산과학기술원(UNIST),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등 4대 과학기술원에서만 작년 대비 1000명에 가까운 인력이 연구실을 떠났다. R&D 예산 삭감의 직접적인 여파다.

이러한 수치 이상으로 현장에서 직접 느껴지는 분위기는 더 암울하다. 과학기술인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젊은 연구자들은 어느 날 갑자기 직업이 없어지는 날벼락을 맞았다. 중견 이상의 연구자들은 확정된 사업 예산이 취소되며 연구 현장을 떠나야만 했던 젊은 연구자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죄책감을 느낀다. 과거와 달리 대학원 진학을 고민하는 학부생에게 ‘멋진 분야니까 연구자의 길을 걸어보는 것도 좋다’는 권유를 할 면목이 없다.

혹자는 중국의 자료는 믿을 수 없으며, 중국의 기술력도 실제로는 과장되었다고 이야기한다. 미·중 갈등으로 반도체 생산에 핵심적인 장비 반입이 불가능해졌으니, 중국의 기술력은 몇 년은 후퇴했다고 한다. 진심으로 이런 이야기가 사실이면 좋겠다. 그게 아니라면 현재 우리의 상황은 너무 암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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