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만 담아온 수많은 새벽 별빛 뒤에 지리산의 일출이 왔다 [ESC]
백무동-소지봉-장터목-천왕봉-세석평전 19.1㎞ 백무동 원점 코스
기암괴석 지나 한국 내륙 최고봉에…“이번 산행은 완전 높은 여행”
중1 아들과 아빠, 직장인 딸과 엄마 등 가족단위 등산객 서로 응원
온 세상 굽어보도록 높고, 많은 것을 헤아릴 만큼 깊고, 모든 것을 품을 만큼 넓은 곳. 산속에 산이 있고 산 넘어 산이 있는 곳. 백두산까지 이어지는 약 1625㎞의 장엄한 백두대간의 시작점이자 종착점인 지리산을 8살 아들과 함께 찾았다.
가을비 내리는 개천절 아침 8시45분, 경남 함양군 마천면의 지리산국립공원 백무동탐방지원센터를 출발한 나와 아들은 아직 여름의 티를 다 벗지 못한 초록의 등산로에 들어섰다. 잔잔히 어깨를 적시는 부슬비는 울창한 숲이 뿜어내는 피톤치드에 청량감을 더했다.
오전 4시에 일어나 천왕봉으로
우리의 목표는 대한민국 내륙에서 하늘과 제일 가까운 곳, 지리산 천왕봉(해발 1915m)이다. 장터목대피소에 올라 하룻밤 머무른 뒤 이튿날 새벽, 천왕봉에 오를 계획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이자 가장 넓은 면적을 지닌 산악형 국립공원인 지리산에는 국립공원공단 누리집에서 안내하는 16개의 탐방코스 외에도 출발점과 끝점을 달리하는 다양한 코스가 존재한다. 그중 우리가 오를 코스는 하동바위, 소지봉, 장터목을 거쳐 천왕봉에 오른 뒤, 연하봉, 촛대봉, 세석평전을 지나 한신계곡 줄기를 따라 원점으로 회귀하는 총 19.1㎞의 백무동 기점 코스다. 오르는 길은 지리산의 원시림과 기암괴석이, 하산길은 한신폭포, 오층폭포, 가내소폭포, 첫나들이폭포 등 지리산의 유려한 폭포와 소(연못)가 산행에 즐거움을 더해줄 것이다. 나와 아들 모두 지리산은 처음이기에 탐방로 정보와 지도를 꼼꼼히 살폈다.
“아빠, 뭐 먹을 것 없어? 배고프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오전 11시가 넘었다. 빵과 과일로 아침을 가볍게 해결했던 아들이 출출함을 느낄 법도 했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마땅히 비를 피할 곳은 없었다. 몇 걸음 더 올라 높다란 아름드리나무 곁에 다가섰다. 기분 탓일까. 빽빽한 나뭇잎이 빗방울을 조금은 막아주는 것 같았다. 집에서 손질해 온 사과와 편의점에서 사 온 삼각김밥을 꺼냈다. 보온병에 담아 온 따듯한 온수까지 곁들이니 제법 훌륭한 한 끼 식사였다. 걸음을 이어 소지봉(해발 1312m)을 지날 무렵, 빗줄기가 잦아들었다. 하늘을 덮은 나뭇가지 틈으로 옅은 햇빛이 반짝였고, 잠시 후 산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몽환적인 분위기에 매료된 우리는 서로의 낮은 숨소리에 귀 기울인 채 크고 작은 돌을 딛고 올랐다.
해밀(비 온 뒤 맑게 갠 하늘)은 오래가지 못했다. 다시금 굵은 빗줄기가 어깨를 두드렸고, 우리는 걸음을 재촉했다. 오후 3시10분, 장터목대피소에 도착했다. 해발 1653m의 장터목대피소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건축물이다. 그러한 이유로 ‘하늘 아래 첫 집’이라고도 불린다는 나의 설명에 아들은 “이번 산행은 산도 제일 높고 대피소도 제일 높고, 완전 높은 여행이네!”라며 웃음꽃을 피웠다.
“아빠, 우리 내일은 몇 시에 출발해야 해? 일출은 언제야?” 이른 저녁 식사를 마친 아들의 물음에 난 지도를 펼치며 답했다. “여기서 천왕봉까지는 1.7㎞야. 걸음이 빠른 어른들은 1시간, 천천히 걸어가면 1시간30분 정도 걸린대. 일출은 오전 6시27분이랬어.” 함께 지도를 들여다보던 아들이 답했다. “아빠, 그럼 우리는 2시간 전에는 출발하는 게 좋겠어. 난 어른들보다 느리니까!”
오전 4시, 휴대전화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아들은 어느새 벌떡 일어나 앉아 있었다. 물병을 들어 마른 목을 축인 우리는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거리며 등산 장비를 챙겼다. 오전 4시25분, 대피소 앞 목조 계단을 오르며 천왕봉으로의 여정은 시작되었다. 다행히 비는 그쳤다. 하지만 밤새 내린 비로 인해 등산로 중간중간 생겨난 물웅덩이에는 살얼음이 맺혀 있었다.
삼대가 덕 쌓아야 한다지만, 단박에
“도벌꾼이 무슨 뜻이야, 아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언덕을 오르던 아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아들의 시선이 닿은 등산로 한편에는 ‘1950년대 푸르른 숲의 나무를 훔쳐 베어가던 도벌꾼들이 자신들의 흔적을 없애려 불을 질렀다’는 제석봉 고사목 군락지의 아픈 과거를 담은 안내판이 서 있었다. 탐욕에 눈먼 인간의 부끄러운 자취를 곱씹으며 걸음을 옮긴 우리는 통천문에 다다랐다. “앗! 박쥐다!” 통천문의 철제 계단을 오르던 아들의 헤드 랜턴 불빛에 놀란 서너 마리의 박쥐 떼가 날아올랐다. 우린 잠시 멈춰 서서 주위를 맴돌며 날갯짓하는 박쥐들을 바라봤다. 통천문을 지나 능선에 오르자, 천왕봉 너머 밤하늘에 무수히 많은 별이 반짝였다. 눈앞에 펼쳐진 찬란한 야경을 사진에 다 담을 수 없음이 안타까웠다.
오전 5시33분, 청쾌한 새벽 공기를 들이켜며 천왕봉 정상에 올랐다.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 천왕봉 정상석에 새겨진 13글자가 우리를 반겼고, 동쪽 하늘 지평선에는 곧 있을 찬란한 여명을 예고하듯 붉은색 띠가 길게 둘려 있었다. 해발 1915m 천왕봉의 바람은 한겨울을 방불케 했다. 바람을 피해 바위 아래 자리를 잡았다. 아들은 털모자와 패딩 재킷 덧입고 핫팩을 터뜨렸다. 난 그런 아들의 어깨를 팔로 두르고 일출을 기다렸다. “아드님이랑 오셨나 봐요! 저희도 아들이랑 왔는데!” 중학교 1학년 아들과 함께 일산에서 왔다는 한 아빠가 인사를 건넸다. 화엄사를 출발해 연하천대피소와 장터목대피소에서 각각 1박을 했다는 50대의 아빠는 중간에 몇 번이고 포기하고 싶었는데 천왕봉을 꼭 오르고 싶다는 중1 아들 덕에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그때였다. “와아아!” 저마다의 기대와 사연을 안고 천왕봉에 오른 이들이 일제히 탄성을 내질렀다. 붉은 태양이 힘차게 떠오르며 새로운 하루의 시작을 알렸다. 나와 아들은 장엄한 천왕봉 일출에 압도됐다. 삼대가 덕을 쌓아야지만 비로소 만날 수 있다는 천왕봉의 일출이었다. 아들과 함께 호흡하며 흘린 값진 땀방울의 결실이었다. 마치 세상이 멈춘 듯 일출의 순간은 고요했다. “오늘 일출은 정말 멋지다, 아빠!” 붉게 상기된 아들의 표정에서 진한 보람이 느껴졌다. 나 역시 벅찬 감동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한 손으론 아들의 어깨를, 다른 한 손으론 아들의 손을 꼭 움켜쥔 채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우리는 한동안 천왕봉 일출의 감동을 만끽했다.
“1987년 대학에 입학한 그해 처음 지리산을 찾은 후로 매년 천왕봉에 올랐습니다. 서울에서 지리산은 사실 쉬운 걸음은 아니죠. 그래도 1년에 한번은 왔었어요. 천왕봉에서 떠오르는 일출을 꼭 한번은 보고 싶었거든요.” 장터목대피소로 돌아온 중년 남성이 배낭을 정리하다 동작을 멈추고 감격에 겨운 목소리를 쏟아냈다. “하지만, 30년 넘도록 단 한번도 천왕봉 일출에 성공하지 못했어요. 지난밤에도 적잖은 비가 내리기에 ‘아, 올해도 글렀구나’ 싶었는데, 정말이지 오늘은 뭉클하네요.” 반대편의 또 다른 남성이 따듯한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며 말을 받았다. “저 아저씨가 30년 넘게 걸려 겨우 이룬 걸 넌 고작 8살 나이에 벌써 이뤘구나. 넌 반드시 큰사람이 될 거야!”
산오이풀의 상큼한 향 맡으며
오전 8시20분, 대피소 이웃들과 인사를 나눈 우리는 장터목을 뒤로하고 연하봉(해발 1721m)으로 향했다. “혹시, 맞으시죠? 저 작가님 책 읽었어요!” 연하선경(지리산의 25㎞ 주 능선 중 가장 아름답다고 손꼽히는 연하봉~촛대봉 구간)을 음미하며 지리산의 능선을 즐기던 중, 마주 오던 등산객이 인사를 건넸다. ‘깊은 산속에 발걸음이 가뿐한 아이가 있어 다시 보니 익숙한 얼굴이었다’며 우리를 알아본 중년의 여성은 징검다리 휴일을 맞아 직장인 큰딸과 함께 천왕봉에 오르는 길이라고 했다. 원래 칠선계곡 코스를 예약했지만, 전날 내린 비로 칠선계곡이 통제되어 아쉬운 마음에 백무동 한신계곡 코스로 올랐다고 했다. 다정함이 넘치는 모녀 일행과 우리는 반가움을 숨기지 않고 서로의 걸음을 응원했다.
“음…. 이게 무슨 냄새지? 아빠, 어디서 오이 향이 나지 않아?” 뒤따라오던 아들의 부름에 난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봤다. 아들의 말과 같이 오이 냄새가 느껴졌지만, 오이는 보이지 않았다. “찾았다! 아빠 여기야 여기!” 킁킁거리며 주변의 수풀을 관찰하던 아들이 보랏빛 꽃을 가리키며 외쳤다. 난 휴대전화의 스마트렌즈를 실행시키며 다가갔다. 산오이풀이었다. “오이 냄새를 맡으니깐 출출하다, 아빠!” 산오이풀을 한참 관찰하던 아들이 말했다. “조금만 더 가면 세석대피소가 나올 거야. 우리 거기 가서 점심 먹을까? 컵라면 어때?” 아들은 눈을 반짝이며 ‘좋아!’를 외쳤다.
촛대봉을 지나자 넓은 평원이 펼쳐졌다. 세석평전이다. “서진아, 여기 참 예쁘지? 하지만 오래전 이곳은 무분별한 야영으로 자연 훼손이 심했었대.” 멀리 보이는 건물을 손끝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기 보이는 세석대피소가 1996년에 생긴 후 오랜 노력 끝에 지금의 생태계를 되찾은 거야. 아침에 봤던 제석봉의 고사목 군락지 이야기도 기억하지? 우리는 자연에 해가 되지 않도록 늘 신경 쓰자, 아들. 오케이?” 아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우리가 만든 쓰레기는 모두 되가져가고, 나뭇가지나 꽃도 꺾지 않고! 컵라면도 안 남기고 내가 다 먹어야지!” 싱긋 미소 지은 아들은 경쾌한 발걸음으로 세석대피소를 향했다.
글·사진 박준형 작가
평일에는 세종시와 여의도를 오가며 밥벌이를, 주말에는 아이와 함께 배낭을 메고 전국의 산과 섬을 누비고 있다. 더 많은 아이들이 자연으로 한 걸음 나가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책 ‘오늘도 아이와 산으로 갑니다’를 썼다.
체온조절 위한 ‘레이어링’…모자, 장갑, 게이터도 도움
아이와 안전한 산행을 위한 복장 팁
아이와 함께 안전한 산행을 즐기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다. 가을철 산행 복장은 어떻게 갖춰야 할지, 우중 산행에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 알아보자.
산에선 상황에 맞는 체온조절을 위해 적절한 ‘레이어링’, 즉 겹겹이 입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더울 땐 한 겹 벗고, 추울 땐 한 겹 덧입는 운용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야외활동가들이 말하는 ‘베이스 레이어→미드 레이어→아우터 레이어’를 기준으로 나는 다음과 같이 준비한다. ‘베이스 레이어’는 속옷 또는 내복을 생각하면 쉽다. 기온과 날씨 여건에 따라 민소매나 반소매, 또는 긴소매를 입힌다. 아이의 피부와 바로 맞닿는 의류로, 피부에 자극을 주지 않는 감촉과 더불어 속건 기능을 지닌 소재가 좋다. 낙낙히 남는 크기보다는 아이의 몸에 딱 맞거나 적당히 타이트한 사이즈가 더 좋다. 산행 중 낙낙한 옷은 자칫 피부 마찰을 일으켜 아이가 불편함을 호소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드 레이어’는 단열, 즉 보온을 담당한다. 날씨와 기온에 따라 한 겹이 될 수도 있고 두 겹 이상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아이에게 플리스 소재의 상의를 주로 입힌다. 플리스 소재는 가볍고 보온성이 뛰어나며, 비 또는 땀에 젖어도 빠른 건조가 가능하다.
‘아우터 레이어’는 보온보다는 방풍과 방수, 투습에 초점을 맞춘 셸 재킷을 주로 활용한다. 흔히 외투라고 하면 패딩 점퍼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 옷은 비나 바람에 직접 노출될 경우 보온력이 떨어져 무용지물이 될 수 있으니 주의하자. 강풍으로 인해 체감기온이 떨어질 경우에는 셸 재킷과 미드 레이어 사이에 경량 다운(충전량이 적은 가벼운 재킷)을 한 겹 덧입히는 게 산행에 더 큰 도움이 된다. 천왕봉에 올라 일출을 기다리는 아들의 셸 재킷 안에도 경량 다운을 덧입혔다.
아이와의 우중 산행 시 꼭 챙기는 용품이 있다. 바로 모자와 장갑, 게이터다. 방수 소재의 챙이 넓은 모자는 빗물과 낙엽 등 낙하물로부터 머리를 지켜줄 뿐 아니라 시야 확보에 도움을 준다. 또 아이들은 바위나 밧줄에 의지해 미끄러짐을 방지하며 산을 오르내린다. 특히 비 오는 날은 더 미끄럽다. 이때 장갑은 손을 보호함과 동시에 아이가 조금 더 적극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쇼트 스패츠’라고도 불리는 게이터는 발목을 중심으로 등산화와 바지 밑단을 감싸는 등산용품이다. 게이터는 빗물뿐 아니라 작은 돌과 낙엽 등 이물질이 아이의 등산화 안으로 침투하는 것을 막아준다.
방수 소재 재킷을 입었더라도 두꺼운 빗줄기 앞에선 속수무책일 수 있다. 비 소식이 있다면 일회용 우비나 판초우의를 구비하고 손 닿는 곳에 여분의 양말을 준비하는 것도 좋다. 비로부터 배낭 속 내용물을 보호하기 위해 대형 김장 봉투를 배낭 안에 넣은 뒤 짐을 싸는 것도 우중 산행을 대비하는 좋은 방법이다.
박준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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