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조원 ‘전쟁 추경’의 빛과 그림자

3월31일, 정부가 26조2천억원 규모의 1회 추가경정예산안을 발표했다.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 전쟁 장기화로 촉발된 고유가·고환율 충격에 대응한다는 명분이다.
이른바 '전쟁 추경'으로 불리는 이번 예산안은 역대 두 번째 규모의 추경이라는 점에서 그 무게가 남다르다. 국채 발행 없이 초과 세수(25조2천억원)와 기금 여유재원(1조원)으로 재원을 충당했다는 점은 이례적이며 긍정적인 신호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대 규모의 단일 추경이 전쟁이라는 외생적 충격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은, 한국 경제의 대외 취약성을 다시 한번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불가피한 위기의 무게
이번 추경의 배경을 이해하려면 현재의 대외 충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직시해야 한다. 국제 유가는 WTI 기준 배럴당 100달러를 위협하는 수준까지 치솟았고, 이란 전쟁 장기화에 따른 공급망 교란은 수출 중심 경제인 한국에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 2025년 2.9%였던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2026년 1.7%~2.0% 수준으로 떨어졌으며, IMF·OECD 등 주요 국제기구도 줄줄이 성장 전망을 하향하고 있다. 세계 경제는 스태그플레이션의 그림자 아래 놓여 있고, 한국 역시 그 그림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고환율 문제는 수입 물가를 끌어올리며 서민 생계를 직접 압박하고 있다. 한국은 에너지 자원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는 구조여서, 유가 급등의 충격이 다른 나라보다 더 빠르고 깊게 전달된다. 소비자물가 상승, 기업 생산 비용 증가, 수출 경쟁력 약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상황에서 정부가 재정으로 충격을 흡수하려는 선택은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 경기 침체와 물가 상승이 겹치는 이 국면에서 손을 놓고 있는 것이야말로 더 큰 정책 실패가 될 수 있다.
재원 조달의 절제
재원 조달 방식은 이번 추경의 가장 두드러진 미덕이다. 2020~2022년 코로나 추경이 수십조원의 국채 발행으로 재정 건전성을 훼손했던 전례와 달리, 이번 추경은 초과 세수만으로 편성했다. 국채 발행 없이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이 오히려 1.0%포인트 낮아지는(51.6%→50.6%) 효과가 생긴다. 재정준칙 논의가 한창인 시점에, 재정 여력 안에서 위기에 대응했다는 점은 정책적 절제로 평가받을 만하다.
지난 12년간 16차례나 반복된 추경의 역사를 보면, 그 상당수가 국채 발행을 수반했다. 2022년 2차 추경은 52조4천억원으로 역대 최대였고, 재정 부담을 후대에 떠넘긴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번 추경은 적어도 그 비판만큼은 피해 갈 수 있다. 초과 세수의 활용은 세금을 더 걷지도, 빚을 더 내지도 않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재정 운용의 최소한의 원칙을 지킨 셈이다.
지원금 설계의 진화
추경의 핵심 축은 소득 하위 70% 국민에게 지급하는 '고유가 피해 지원금'이다. 2인 가구 기준 월소득 630만원 이하를 대상으로, 수도권 10만원·비수도권 15만원을 기본으로 지급하며 저소득층일수록 최대 60만원까지 차등 지원한다. 3천600만명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이 지원금에 약 4조8천억원이 투입된다. 지역 소멸 위기와 비수도권 경기 침체를 고려한 차등 설계는 단순한 '현금 살포'와 구별되는 정책적 배려라고 할 수 있다.
주목할 점은 이번 지원금이 코로나 시기의 전 국민 일률 지급 방식에서 진일보했다는 사실이다. 소득 상위 30%를 제외하고, 저소득·비수도권 거주자에게 더 두텁게 지원하는 방식은 '선별 복지'와 '보편 복지' 논쟁의 절충점을 찾으려는 시도다. 1인 가구 기준으로 소득 수준에 따라 10만원에서 최대 60만원까지 격차가 벌어지는 구조는, 고유가 충격이 저소득층에게 상대적으로 더 혹독하다는 현실 인식을 정책에 반영한 것이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설계의 방향성만큼은 과거보다 정교해졌다.
전 국민 유류비 지원의 양면
전 국민 유류비·교통비 경감에도 5조1천억원이 투입된다. 이 중 4조2천억원은 정유사 손실 보전 등 석유 최고가격제 운용 비용이다. 에너지 가격 급등으로 서민 생계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유가 안정을 위한 직접 개입은 불가피한 조치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이번 추경의 단일 사업 중 가장 큰 규모가 유류비·교통비 지원 사업이라는 점은, 정부가 '고유가 충격'이라는 추경 편성 명분에 충실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가스·전기 요금 안정을 위한 지원과 LPG 차량 사용자, 저소득층 연료비 할인 확대 등 세부 사업들도 포함됐다. 생활 밀착형 에너지 지원은 즉각적인 체감 효과를 낳는다는 점에서 정치적 선호도가 높다. 그러나 이 방식이 장기화될수록 가격 신호가 왜곡되고, 에너지 소비 절감 유인이 약해진다는 부작용도 존재한다. 보조금으로 가격을 누르는 정책은 시장에 '에너지를 마음껏 써도 된다'는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
재생에너지 투자의 공백
이번 추경에서 가장 아쉬운 대목은 재생에너지 전환 투자의 빈약함이다. 석유 가격 지원에 4조원 넘는 예산이 투입되는 반면, 재생에너지 관련 예산은 5천억원에 그쳤다. 고유가의 근본 원인이 화석연료 의존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번 추경은 불난 집에 물을 뿌리면서 정작 소방 시스템 개선에는 인색한 꼴이다. 위기 대응과 구조 전환을 동시에 추구해야 할 재정 정책이 단기 봉합에만 치중하고 있다는 비판은 충분히 유효하다.
재생에너지 비중을 높이는 것은 단순한 환경 목표가 아니라, 중장기적인 에너지 안보 전략이다. 이란 전쟁으로 촉발된 이번 유가 충격은, 결국 화석연료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한국 에너지 구조의 취약성이 빚어낸 결과다. 그럼에도 추경 예산 배분을 보면,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 인프라 확충이나 에너지 효율화 투자보다 정유사 보전에 8배 이상의 예산이 집중됐다. 이 불균형은 단순한 예산 배분 문제가 아니라, 에너지 정책 철학의 문제다.
이례적인 특별 항목들
이번 추경에서 눈에 띄는 대목이 몇 가지 있다. 청년 뉴딜에만 1조9천억원을 투입해 11만명에게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구상은 단순 경기 부양을 넘어 구조적 취업난 해소를 겨냥한 것으로 읽힌다. 반도체·AI 등 첨단 산업 R&D 지원 확대도 포함됐다. 고유가·고환율이라는 단기 위기 대응을 명분으로 한 추경 안에 산업 경쟁력 강화라는 중장기 과제가 함께 담긴 셈이다. 위기를 기회로 삼아 구조 개편의 계기로 활용하려는 의도는 평가할 만하다.
다만 '전쟁 추경'이라는 명분 아래 창업 오디션 예산 1천550억원이 수출기업 물류비 보전 바우처보다 더 많이 편성됐다는 지적처럼, 일부 사업은 추경의 긴급성·목적성과 거리가 있다는 논란도 피해 가지 못했다. 추경 예산은 본예산과 달리 '긴급·불가피한 사유'가 법적 요건이다. 이 요건에 부합하지 않는 사업들이 위기 대응의 외피를 빌려 끼어드는 관행은, 추경의 신뢰성을 갉아먹는 고질적 병폐이다.
여야 합의라는 이례적 풍경
여야가 4월10일까지 추경안을 처리하기로 합의한 것은 이례적이다. 지난 12년간 16차례나 추경이 편성됐고 그 때마다 정쟁이 반복됐던 역사를 고려하면 초당적 위기 인식이 작동한 셈이다. '현금 살포 중독'이라는 야당의 비판과 '긴급재정명령 활용 가능성'까지 거론한 대통령의 강한 위기 의식이 역설적으로 합의를 이끌어 냈다. 전쟁이라는 외부 충격 앞에서 정치권이 최소한의 협치를 복원했다는 점은 긍정적 신호다.
국내 정치 지형을 감안하면 4월10일 처리 합의는 이번 추경의 또 다른 특별한 점이다. 민주당 정부 출범 이후 추경 처리를 둘러싼 여야 갈등이 반복됐던 점을 돌이켜보면, 이번 합의는 '전쟁'이라는 비상 상황이 정치를 일시적으로 압도한 결과다. 그러나 합의가 신속 처리를 보장하더라도 실제 집행의 속도와 효율성은 별개의 문제다. 예산이 제때 집행되지 않으면, 아무리 잘 설계된 추경도 위기 대응으로서의 효력을 잃는다.
추경이 남긴 숙제
이번 추경은 불가피한 측면이 크고, 재원 조달 방식에서 일정한 절제를 보였다는 점에서 최악은 아니다. 지원금 설계에서 소득·지역 차등을 반영하고, 청년·산업 구조 개편에 일정 예산을 배분한 것도 과거보다 진전된 모습이다. 그러나 진짜 위기 대응은 단기 현금 지원 이후에 시작된다. 고유가 구조에 대응할 에너지 포트폴리오 전환, 경기 둔화에 대응할 내수 기반 강화, 그리고 추경의 신속하고 효과적인 집행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26조원은 흔적 없이 스러질 한 번의 진통제에 그칠 수 있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추경 중독'의 관성이다. 세수가 남으면 추경, 경기가 나쁘면 추경, 전쟁이 나면 추경. 이 공식이 반복되는 한 재정 정책은 장기 비전이 아닌 단기 봉합의 도구로 전락한다. 이번 추경이 진정한 위기 대응으로 기억되려면 재생에너지 전환 투자 확대, 에너지 안보 전략 재편, 그리고 다음 번 충격에도 흔들리지 않을 구조적 복원력 구축이 그 뒤를 따라야 한다. 26조원의 진짜 시험대는 예산안 통과가 아니라, 그 이후의 정책 행보에 있다.
나라살림연구소장 (jcs61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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