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재 자취 서린 곳에서 시작했던 화업 다시 펼치다

‘춘설헌’

“어눌하고 소박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선 맛과 먹의 활용이 좋을 뿐 아니라 기존 미술계에서 통상적으로 유통되고 생산되는 그림과는 현저한 차이를 지닌다. 그의 미술언어와 그 어법은 한국 현대미술계에서 무척 생소한 그림이다. 그의 어법은 농사짓는 사람의 말투와 몸놀림, 노동을 연상시킨다. 그것은 현장에서 나오는 생생한 힘이다. 마치 농부가 작대기로 논바닥에 쓱쓱 그어댄 자국 같기도 하고, 달력 종이나 봉투 등에 숫자나 문자, 기호를 무심히 적어놓은 것 같기도 하다. 형언하기 어려운 기묘한 경지가 있다. 전적으로 땅과의 교감의 산물에서 나온 그림이다.”

이는 그를 가장 잘 평가한 글 중의 하나다. 미술평론가인 박영택 교수(경기대)가 담빛예술창고에서 열린 전시(2022.8.5∼10.2)에서 그의 작품을 보고 작성한 해설의 일부다. 이 해설의 당사자는 전남 무안 출생으로 담양에 거주하며 농토 속 일상을 구가하는 한편, 흙(황토)이라고 하는 재료를 작업으로 끌어들여 활용하고 있는 등 농사꾼의 심성으로 작업을 지속해온 박문종 화가다. 그는 광주시립미술관(관장 김준기)과 의재미술관(관장 이선옥)이 공동으로 마련한 ‘그림으로 농사짓는 화가’전을 연다. 전시는 11월 1일부터 12월 25일까지 의재미술관 1·2·4전시실로 ‘땅을 두들며 노래한다’와 ‘춘설헌’, ‘모내기’ 등 총 60여점이 출품된다. 이번 전시는 허백련미술상이 광주시립미술관이 주관을 맡아 여는 첫번째 순서다. 그는 연진회미술원 1기생으로 이곳에서 화가로서의 출발을 알려졌지만 정작 개인전이나 단체전과는 인연을 맺지 못하다 이번에 전시를 열게 된 것이다.

연진회미술원은 그의 미술인생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연진회미술원은 의재 허백련의 연진회 제자들이 스승의 뜻을 잇기 위해 1978년 창설한 단체다. 그는 창설한 해에 입회했다.

물론 의재 허백련 선생이 1977년에 별세했기 때문에 그의 수제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우연히 의재가 말년을 보냈던 춘설헌에서 반년 정도 머물며 ‘대한민국미술대전’에 입선하는 영예를 안았다. 난초 선을 놓고 서울과 지역이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 편차를 극복하는데 대략 3년여 소요된 듯하다. 3년간 난초 선만 그렸고, 마치 소설 속이나 영화 속에 나오는 무협 수련하듯이 그림을 그렸다고 전한다.

<@1>1970년대 후반 그림의 기본기를 닦은데 이어 1980년대와 1997년 담양으로 이주하기 전까지의 암울한 시대 상황을 필묵으로 표현한 수묵주의 현실화에 몰입했다. 그의 수묵화는 민중미술같은 인상을 안겨줘 민중미술사에서 한 지점을 이루고 있다.

평자들은 남도의 자연과 농촌을 배경으로 흙과 인간이 주고받는 서사를 그리는 화가로 평가하지만 1980년대의 격랑을 온몸으로 겪으면서 흙을 주목했던 듯하다. 캔버스에 흙을 써 봤더니 황토 냄새가 그윽했을 뿐 아니라 결속력이 의외로 좋아 줄곧 흙의 화폭을 일궈온 셈이다.

그의 작업은 늘 먹과 종이, 흙만 있으면 족했다. 흙빛 화폭은 1993년과 19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0년대 흙을 재료로 시도했던 덕분에 인사동에서 전시를 열 수 있었다. 이때 흙으로 그린 그림을 출품했는데 큰 반향을 이끌어냈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흙을 재료로 쓰는 화가는 흔치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는 반응이다. 그가 광주에 머물 무렵에도 그의 먹그림 등 작품에는 농촌 서정이 물씬 풍겼다. 어쩌면 그는 태생적으로 도회지보다는 흙이 있는 농촌이 더 잘 어울렸는지 모른다.

작품 중 ‘땅을 두들며 노래한다’는 농가월령가 중 3월령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인간이 씨를 뿌리고 가꾸고 거두는 일, 그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없다”라고 말하는 작가의 경작에 대한 철학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의재 허백련에 대한 경의를 담아 이번 전시를 기념해 그린 ‘춘설헌’은 의재의 후학 양성과 창작의 공간이었던 춘설헌을 대나무 숲과 매화꽃에 둘러싸인 풍경으로, 한지에 먹, 채색, 흙물을 이용해 간결하게 표현했다.

또 벼나 논의 사실적 이미지 대신 지도에서 논의 기호인 ‘ㅛ’를 사용하는 등 기호와 글자를 구사한 ‘신(新)문자도’, ‘ㅛ’와 단순화된 인간의 형상이 함께 배치돼 모내기의 풍경을 담아내고 있는 ‘모내기’ 등도 선보인다.

<@2>제1전시실에서는 ‘춘설헌’ 등 2020년 이후 작품 20여점을, 제2전시실에서는 1980년대부터 1990년대초까지 몰입했던 수묵주의 현실화인 ‘혈죽도’와 ‘사산’ 등에서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의 작품 10여점을, 제4전시실 중앙 이벤트홀에서는 15년째 펼쳐온 농촌체험프로그램에 참여한 아이들과 함께 한 ‘무등산’ 등 10여점을, 그 옆 작은 룸에서는 스케치 아래 글귀가 새겨져 있는 등 농사일기같은 ‘난초 스케치’ 연작을 각각 만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출생지가 농촌이었기에 그것이 자연스럽게 정신에 스며든 듯하다는 그는 ‘농부 화가’라고 칭하자 “농사는 내가 짓지 않고, 기계가 짓는다”면서 소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개막식은 11월 7일 오후 3시, 작가와의 대화는 11월 23일 오후 2시 각각 예정돼 있다.

고선주 기자 rainidea@gwangn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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