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 여행에서 바다와 오름만 떠올리기 쉽지만, 숲길을 걸으며 깊은 숨을 고르는 순간에야 비로소 진정한 힐링이 찾아온다.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붉은오름 입구에서 시작하는 ‘사려니숲길’은 바로 그런 경험을 선사하는 곳이다.
이름처럼 ‘신성한 숲’을 의미하는 이 길은 삼나무와 다양한 수종이 어우러져 사계절 내내 다른 얼굴을 보여주며, 유네스코가 지정한 제주 생물권 보전지역 속에서 특별한 자연을 만날 수 있다.

사려니숲길은 단순한 산책로가 아니다. 빽빽하게 들어선 삼나무 사이를 걷는 순간, 도심에서 쌓였던 피로와 복잡한 생각이 사라지고 숲이 사람을 감싸는 듯한 포근함이 밀려온다. 울창한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과 바람은 마치 숲 자체가 생명력을 불어넣는 듯한 기분을 준다.
여기에 졸참나무, 서어나무, 편백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이 더해져 숲의 결은 계절마다 다른 색채로 바뀐다. 봄에는 연둣빛, 여름에는 짙은 녹음, 가을에는 노랗고 붉은 단풍, 겨울에는 고요한 빛으로 물들어 사시사철 걷는 즐거움이 다르다.

사려니숲길은 접근 코스에 따라 그 매력이 달라진다. 조금 도전적인 경험을 원한다면 사려니숲 주차장에서 출발해 조릿대숲길을 지나 비자림로 입구까지 다녀오는 코스가 있다.
약 3시간에서 3시간 30분 정도 소요되며, 울창한 숲과 고저차 있는 길이 주는 묵직한 걷기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다만 길이 울퉁불퉁해 유모차나 노약자에게는 다소 부담스러울 수 있다.
좀 더 가볍게 숲을 즐기고 싶다면 붉은오름 남쪽, 남조로변 입구에서 출발하는 코스를 추천한다. 이 길은 약 2시간에서 2시간 30분 정도 걸리며 잘 정비된 숲길 덕분에 누구나 편안하게 걸을 수 있다. 어느 길을 선택하든, 숲이 주는 청량감은 변함없이 깊게 다가온다.

사려니숲길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물찻오름이다. 하지만 이곳은 숲 생태계 보전을 위해 ‘자연휴식년제’가 시행되어 일반인의 출입이 오랫동안 제한된 구역이었다. 드물게 열리는 ‘사려니숲 에코힐링(Eco-Healing)’ 행사 기간에만 개방되었기에, 많은 이들이 더 특별하게 여기는 곳이기도 하다. 잔잔한 호수와 고요한 숲이 어우러진 물찻오름의 풍경은 사려니숲길이 단순한 산책로가 아님을 다시금 보여준다.
현재 붉은오름 입구에서 비자림로까지 이어지는 주요 트레킹 구간은 예약 없이 무료로 누구나 즐길 수 있지만, 물찻오름으로 향하는 ‘에코힐링 체험 구간’은 사전 예약이 필수인 유료 프로그램으로 운영된다. 이처럼 숲을 보호하면서도 여행객에게 특별한 경험을 제공하는 운영 방식은 사려니숲길의 진정한 가치를 잘 드러낸다.

사려니숲길의 진가는 걷는 동안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삼나무 숲에서 풍기는 진한 향, 발아래서 들려오는 바람과 잎사귀의 소리, 그리고 숲 사이사이에서 불쑥 마주하는 새들의 울음까지 모든 순간이 온전한 힐링으로 이어진다.
특히 숲길의 끝자락에서 마주하는 물찻오름의 고요한 풍경은 ‘쉼’이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여행이란 단순히 새로운 곳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되돌아보고 마음의 여유를 찾는 과정임을 이곳에서 실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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