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안에 실리콘밸리서 ‘유니콘’ 만드는 법 [BreakFirst]
기업용 채팅 솔루션 분야 세계 1위인 ‘센드버드’는 한국에서 미국 실리콘밸리로 진출한 스타트업 가운데 첫 유니콘(기업가치 1조 원 이상의 비상장 기업)이 된 기업입니다.
한국 스타트업이 유니콘으로 등극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숫자로 간단히 표현할 수 있습니다. CB인사이트에 따르면 올해 5월 기준 전 세계 유니콘 기업은 1248곳인데요, 한국 유니콘 기업은 20곳 남짓입니다. (다만 센드버드는 한국에서 창업했지만 2014년 미국으로 본사를 이전한 뒤 유니콘이 돼 미국 유니콘 기업으로 분류됨)
문화적, 제도적 여건이 다른 미국에서 센드버드는 어떻게 유니콘 기업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을까요.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역경을 거쳐야 하기 마련이죠. 김동신 센드버드 대표(44)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스타트업’이라는 단어가 생소하던 시절 첫 창업에 나섰고, 성공한 선례가 없어 주변 이들이 미국 진출을 말릴 때에도 꿋꿋이 밀고 나가야 했습니다. 아마도 관성에 맞서지 않았다면 지금의 센드버드는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김 대표는 어떤 마음가짐과 태도로 센드버드를 꾸려나갔는지 〈브렉퍼스트〉팀과 함께 살펴보시죠.
센드버드의 시작은 ‘관성 깰 용기’
김 대표는 2013년 한국에서 센드버드를 창업했습니다. 창업 당시 사명은 ‘스마일패밀리’로, 그에게 두 번째 창업이었습니다.
스마일패밀리의 초기 서비스는 육아정보 커뮤니티로, 지금의 센드버드와는 완전 딴판이었습니다. 당시 김 대표를 포함해 공동 창업자 4명 중 3명이 신생아나 한 살 언저리의 자녀를 두고 있었는데요, 어린 자녀를 키우면서 느낀 고충과 니즈를 해결할 수 있는 서비스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전세계적으로 25만 명이 가입을 했을 정도로 반응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특히 가입자의 90%가 미국인이었고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육아정보 커뮤니티 서비스로는 미국에 자리 잡지 못했습니다. 김 대표는 세계 최대 액셀러레이터(투자·육성 전문기업)인 와이콤비네이터의 지원을 받기 위해 문을 두드렸는데, 와이콤비네이터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창업자가 한국인 남성 4명인데 심지어 한 명은 싱글이네요? 모두 미국에서 한 번도 아이를 키워본 적도 없고요. 그런데 미국 엄마를 대상으로 육아 커뮤니티를 만들겠다고요? 당신이 미국 엄마라면 이 앱을 쓰겠나요?”
이 말에 김 대표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많이 실수하는 것 중 하나가 문제를 ‘머리로만’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에요. 풀고자 하는 문제와 ‘우리 팀이 그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할 수 있는 팀인가’는 다른 문제거든요. 이거에 대해서 통렬하고 솔직하게 생각해야 해요.”
상황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갔습니다. 당시 김 대표는 구정진 씨(현 센드버드 최고기술경영자(CTO))를 만났다가 ‘미국에는 소프트웨어 개발 키트(SDK)나 애플리케이션 프로그래밍 인터페이스(API)로 사업을 하는 회사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인데요. 회사 자금이 떨어져 가는 위기의 상황. 김 대표는 구 씨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급한 대로 메신저 기능을 SDK로 만들어 기업 간 거래(B2B) 방식으로 팔기 시작했습니다.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자’는 심정으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알고 보니 ‘황금 동아줄’이었습니다. 김 대표가 만든 메신저의 유료 고객이 급속도로 늘어난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다시 한번 와이콤비네이터의 문을 두드렸고,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으며 2016년 와이콤비네이터의 육성 기업에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육아정보 커뮤니티에서 기업용 채팅 솔루션으로 피버팅(pivoting·사업방향 전환)한 이 회사는, 와이콤비네이터의 조언에 따라 사명도 지금의 ‘센드버드’로 바꿨습니다. 지금의 센드버드의 시초인 셈입니다.
관악산에서 내려와야 에베레스트산에 오를 수 있다
센드버드는 스마일패밀리 시절이던 2014년 본사를 미국으로 옮겼습니다. 와이콤비네이터로부터는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지 못했지만, 당시 이 회사에 관심을 가진 고 김정주 넥슨 창업주가 김 대표에게 “미국 법인을 만들면 그쪽에 투자를 해주겠다”고 제안해 온 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하지만 미국으로 가기 위해 준비할 때부터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요즘은 해외로 본사를 이전(플립·flip)하는 스타트업이 늘고 있지만 당시에는 없다시피 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행과 로펌 등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곳들에서도 관련 업무를 수행해 본 경험이 없었고요.
“저희가 미국에 가려고 할 때 한국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 미국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미국에 돈 싸서 들고 왔다가 다 버리고 돌아가더라’라며 ‘오지 말라’고 말렸어요. 국내에서도 은행부터 법률 전문가까지 ‘이건 못 하는(불가능한) 거다’라는 반응이었고요.”
김 대표는 이에 굴하지 않고 미국 변호사 등과 함께 법령을 해석해가며 승인을 받아 결국 미국으로 본사를 이전했습니다.
“3억 명이 살고 있는 미국에서는 충분히 똑똑하지 않은 사람들도 사업을 잘하고 있는데, 우리라고 못할게 뭐가 있을까 생각이 들어 도전했어요. ‘성공’이라고 말하긴 아직 이르지만, 센드버드의 사업이 잘 진행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나니 미국으로 오는 후배 사업가도 늘고 있고, 미국 법인을 만들어 투자를 하는 사람도 생겨나더라고요. 센드버드가 물꼬를 트면서 물줄기가 생겨난 것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김 대표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기업이 만드는 서비스나 제품이 5000만 명을 대상으로 한다면 한국은 굉장히 좋은 시장이겠지만, ‘전 인류에게 닿을 수 있는’ 사업을 한다면 기왕이면 더 큰 시장을 상대로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영어권 시장을 대상으로 사업을 하면 미국뿐 아니라 영국 호주 등 여러 나라로 확장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요. 또 사용자인터페이스(UI)와 사용자경험(UX)을 글로벌 표준에 맞춰야 영어권 시장에서 통용되는데요. 이 경우 스페인어나 다른 언어로 만들어도 해당 시장에서 받아들여질 가능성도 매우 높아져요.”
그는 한국의 모바일 앱이나 웹사이트에 한국적인 패턴들이 많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들 요소가 한국을 벗어난 곳에서는 통용되지 않다 보니, 한국 제품을 단순 번역한 것만으로는 외국인들이 낯설어해서 성공하기 어렵다고 지적했습니다.
“특정 시장을 최우선 순위로 두고 해도 사업이 성공할까 말까 하는 만큼, 처음부터 큰 시장을 상대로 하는 것이 효율적인 전략이 아닐까요. 관악산에 오른 사람이 에베레스트산에 오르려면 일단 관악산에서 내려와야하거든요. 관악산과 에베레스트산은 연결이 안 돼 있잖아요. 내려오려면 굉장히 많은 용기가 필요한데, 성공할수록 내려오기가 쉽지 않죠. (마찬가지로 글로벌로 가려면) 한국에서 수익을 내고 있는 것도 상당 부분 버릴 각오를 해야하는데, 이미 매출이 나오고 있으니 못 버리거든요. 투자자들도 ‘다른 곳 보지 말고 여기에 집중하라’고 하지, ‘다 버려도 좋으니 해외시장 가보세요’라고 할리는 없고요.”
스타트업 대표라면 예외없이 겪는 우울증, 적극 도움 구해야
겉으로 화려해 보이더라도 창업자들 상당수가 심리적인 부담을 안고 살아갑니다. 김 대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센드버드의 매출이 10억 원이 넘은 시점, 투자유치를 하기 위해 30곳의 벤처투자사와 미팅을 했지만 29곳으로부터 거절당했고, 나머지 한 곳마저 센드버드에 불리한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막막하고 속상한 심정을 드러낼 수 없었습니다. 앞선 투자사와의 미팅에서 거절당해도 그 다음 투자사와의 미팅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다시 웃으며 ‘세상에서 가장 성공적인 회사’인양 연기해야했고, 사무실에서는 직원들 앞에서 가장 자신감 있는 대표인 듯 가면을 써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인지부조화’가 오기도 하고요.
“우울증은 몇 가지 조건만 맞으면 건강한 사람도 경험할 수 있어요. 스타트업 경영진들은 예외없이 모두 겪으세요. 마음의 병은 스스로 극복하기 어려워요. (우울증을 주변 사람에게 말하면) 내 자신이나 회사에 대해 안 좋은 인식을 줄까봐 걱정하시는데, 주변에 다른 사업을 하시는 분 중 믿을만한 사람에게 얘기를 적극적으로 하시고 도움을 구하시는게 좋아요. 특별하게 엄청 의미부여를 한다기보다는 ‘나 잠시 삐끗했네, 빨리 치료받아야지’라는 생각으로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아가면 되는 것 같아요.”
김 대표는 다소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대학생 시절 프로게이머로 활동했던 것인데요. 1990년대 전화접속모뎀 방식으로 인터넷을 사용하던 시절, 중학생이던 그는 온라인 게임을 너무 많이 한 나머지 당시 한 달 전화비만 20만 원 넘게 나오곤 했다고 합니다.
속상해하시는 어머니 모습에 고등학교 3학년 때는 게임을 끊었지만, 서울대에 입학하자마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게임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삼성에서 창단한 프로게임단 ‘칸’의 이름을 앞세워 대회에도 출전했고요. 1년간 프로게이머로 활동하면서 세계대회에서 3위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기록을 세운 바로 그날, 그는 돌연 게임을 접었습니다.
“대회에서 1등을 한 사람을 보니, 아버지가 옆에서 부채질을 해가며 ‘넌 할 수 있어’라고 응원하고 있더라고요. 인생을 게임에 걸고 있는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저는 게임을 업(業)으로써 하겠다는 마음은 전혀 없었고, ‘내가 앞으로 저렇게 살고싶은가’에 대해 생각해 봤을 때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살핀 뒤 아니다 싶을 때 미련 없이 돌아서는 결단력은 첫 창업한 회사를 매각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김 대표는 2007년 ‘파프리카랩’이라는 이름의 소셜 게임 회사를 창업했다가 5년 뒤인 2012년 일본의 한 게임사에 매각했는데요. 콘텐츠 기반 사업에서 개인적으로 의미를 찾지 못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창업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창업 과정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훨씬 잘 알게 된다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파프리카랩을 운영하던) 어느날 삶의 의미가 없어진다고 많이 느꼈던 시기가 있었어요. 마치 제가 게임을 접었던 이유처럼, 게임을 만드는 것도 ‘재밌지만 나에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기업이 만들어내는 가치의 의미를 찾지 못하면 평생 할 수 없겠다고 생각이 들었죠. 그렇게 고민을 하다 1년 반 정도 뒤에 회사를 매각하게 됐어요.”
이후 스마일패밀리 창업, 센드버드로 피버팅을 거치며 자신에 대해 더 잘 알게된 김 대표는 “사회의 문제를 기술이나 디자인을 통해 해결할 때 동기부여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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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경 기자 whatsu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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