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 휘날리던 피란선, 미군은 왜 폭격했을까[사물의 과거사](4)

2022. 9. 28.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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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배를 보니 배 위에 태극기를 그려놓았어요. 태극기가 그려진 배를 때리니까(폭격하니까) 적 비행기인 줄 알았는데, 직접 보니까 호주기(미군기)였습니다. 왜 태극기 그려진 배를 때렸는지 지금도 모르겠어요.”(〈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중 ‘호남지역 미군 관련 희생 사건’ 조사보고서)

전남 여수시 남면 안도리 이야포 해변에 세워진 ‘평화탑’. 희생자들의 원한을 바다에서 하늘로 올려보낸다는 의미로 탑 꼭대기에 물새 한마리를 올려뒀다. / 최규화 제공


조근자씨에게 그날의 기억은 60년이 지나도록 ‘물음표’로 남아 있다. 1950년 8월 3일 전남 여수시 남면 안도리. 스물한 살의 조씨는 이야포 해변에 정박한 피란선 한척을 봤다. 조씨의 집에서도 태극기가 보일 만큼 가까웠다. 집보다 큰 배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배 위에는 태극기가 달려 있었다. 배 위를 맴돌던 비행기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걸까. 무차별 기총사격이 시작됐다. 총탄에 맞아죽고, 바다에 떨어져 죽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비참한 광경이 펼쳐졌다. 대체 왜 피란선을 향해 폭격을 했는지, 조씨는 알 수 없었다.

이야포 미군 폭격 사건으로 150여명이 사망하고 50여명이 부상당했다. 당시 배에 타고 있던 이들은 모두 350여명. 국군의 지시에 의해 부산에서 배에 오른 피란민들이었다.

폭격이 끝나자 마을 사람들은 뗏목과 배로 생존자들을 날랐다. 생존자들은 마을 사람들의 집에 머물면서 치료를 받고 가족의 시신을 찾았다. 시신을 찾은 사람들은 해안 주변에 묻고 육지로 나갔다. 며칠 뒤 남은 시신들을 모두 배에 실어 배 전체를 불로 태웠다.

“어인 날벼락인가? 아군기가 피란민을…”

누가 배에 탔는지, 누가 죽고 누가 살았는지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안도리 주민들이 아니라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피란민들이었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마을 사람들의 기억에만 존재하던 이야포 미군 폭격 사건은 2010년 1기 진실화해위원회에 의해 진실이 규명됐다.

그날의 진실을 밝혀달라고 2005년 진실화해위원회의 문을 두드린 신청인은 단 한명, 사건 당시 열두 살이던 이춘송씨였다. 서울 마포에 살던 이씨의 일곱 식구는 전쟁이 일어나자 부산까지 피란을 갔다. 그곳에서 함께 피란선을 탔지만, 부모님과 두 동생은 이야포에서 폭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겨우 살아남은 누나 역시 사건 후유증으로 3년 뒤 숨을 거뒀다.

폭격 당시 소년 이춘송은 선장실 뒤쪽 물통 뒤에 숨어 아비규환의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 총소리가 날 때마다 일고여덟명씩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바다는 온통 피로 물들었다. 죽은 사람들의 피가 머리 위에서 흘러내려 이춘송의 온몸도 피에 젖었다.

아버지는 배 위에서 총에 맞고, 여동생을 껴안고 바다로 뛰어들었다가 목숨을 잃었다. 어머니와 남동생은 마을 사람들의 배를 얻어타고 오다 뭍에 도착하기 전에 숨을 거뒀다. 이춘송과 형, 누나만 다른 배를 타고 육지에 도착한 뒤, 수수밭에 숨어서 살아남았다.

이춘송씨도 그날 배에 달려 있던 태극기를 기억했다. 그는 2009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당시, 태극기가 달려 있던 피란선과 미군 비행기의 모습을 그림으로 또렷이 그려냈다. 심지어 폭격 전 피란민들은 미군 비행기를 알아보고 손을 흔들며 반겼다고 한다.

폭격이 휩쓸고 지나간 직후에도 미군 비행기를 향해 태극기를 흔들던 사람이 있었다.

“어떤 아저씨가 ‘태극기, 태극기’ 하고 소리쳤다. 어떤 사람이 조그마한 태극기 수기 하나를 갖다주었다. 이 아저씨는 태극기를 미친 듯이 흔들었지만 비행기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이 어인 날벼락인가? 아군 비행기가 피란민을 폭격하다니. 피란민을 죽이다니.”(생존자 윤학재의 수기 〈아리랑 그림자〉,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에서 재인용)

72년 지난 지금 ‘마지막 생존자’의 태극기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어떠한 경고도 받지 못하고 무방비의 민간인에 대한 폭격은 ‘사건경고의 원칙’은 물론이고, ‘전시의 약자에 대한 공격금지’인 제네바협약 제16조에 위반하고, 측정된 군사 목표물이 아닌 민간인과 민간시설을 공격한 행위로 헤이그규칙 제24조 및 미군 교범 제19조, 제45조 위반에 해당한다”고 사건의 불법성을 확인했다. 그리고 “(희생자들은) 정부의 소개명령에 따라 임시수도 부산에서 사건 현장까지 이동하다 사망”한 것이므로, 한국 정부 역시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규명 이후 8년이 지난 2018년, 사건 이후 68년 만에 첫 희생자 추모제가 여수 시민들에 의해 열렸다. 2020년에는 사건 현장인 이야포 해변에 평화탑을 세웠고, 지난해에는 희생자 위령사업에 대한 조례안이 여수시의회를 통과했다. 올해 8월 3일에는 처음으로 여수시가 주최하는 추모제를 열었다. 사건 이후 72년 만이다.

이야포의 진실이 사회적 기억으로 자리 잡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사이 이춘송씨도 세상을 떠났다. 1950년 피란길에 오른 일곱 식구 중 당시 열여섯 살이던 형 이춘혁씨만이 살아남았다. 진실과 함께 올 줄 알았던 화해는 아직도 닿지 않았다.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고, 누구도 보상하지 않았다. 이름 모를 생존자와 유족들은 어딘가에서 조용히 사라지고 있다.

지난 8월 18일 ‘이야포 미군폭격사건 위령사업 추진위원회’와 이춘혁씨는 2기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 신청서를 접수했다. 이들은 희생자 추가 신원 확인, 이야포 해저 피란선 추정 잔해 인양 조사, 희생자 유해 매장지 확인 및 발굴을 요구했다. 17년 전 동생 이춘송씨가 그랬듯이, 이번에는 형 이춘혁씨가 다시 한 번 진실화해위원회의 문을 두드렸다.

72년 전 그날 피란선 위에는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그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2022년 마지막 생존자 이춘혁씨가 다시 한 번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여기 대한민국 국민이 있다고, 그날 다하지 못한 국가의 책임을 이제는 다하라고 외치고 있다.

※여수 이야포 미군 폭격 사건은 1950년 8월 3일 전남 여수시 남면 안도리 이야포 해상에서 정부의 소개명령에 의해 부산에서 출발한 피란민 350여명이 타고 있던 피란선이 미군 전투기에 의해 폭격당한 사건이다. 150여명이 사망하고 50여명이 부상당했다.


최규화 전 진실화해위원회 언론홍보팀 주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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