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최악 수준의 폭염이 내리쬔 올 여름은 '문화제국'이라는 CJ그룹의 정체성이 바짝 말라가는 계절이기도 했다. 지난달 21일 CJ CGV의 재무적투자자(FI)들이 아시아 사업에 대한 동반매도청구권 행사를 통보했지만, CJ 측이 마감 기한인 1일까지 콜옵션 행사 여부를 결정하지 못해 핵심 수익원인 아시아 시장 포기 가능성을 시장에 내비쳤다.
이틀 뒤엔 CJ ENM이 7000억 원 이상을 쏟아붓고도 무산된 라이브시티에 3144억 원의 지체상금까지 물어내야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CGV는 한국 영화산업을 상징하는 계열사다. 라이브시티는 글로벌 K콘텐츠 열풍의 기원인 K팝의 랜드마크를 준비했던 회사다. CJ그룹이 30년간 쌓아올린 문화제국의 양대 축이 동시에 흔들린 것이다.
CJ는 한국 문화산업의 게임체인저 역할을 해왔다. 1995년 '설탕 회사'의 오너였던 이재현 회장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을 만나 드림웍스에 3억 달러를 투자한 것을 시작으로 “문화 없이는 나라도 없다”며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할아버지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문화보국 철학을 직접 실현했다.
1998년 국내 최초 멀티플렉스 CGV강변11이 문을 열면서 한국 영화계는 급성장했으며 게임의 룰 자체를 바꾼 덕분에 '기생충'부터 '오징어게임'까지 이어진 K컬처 혁명의 토대를 닦을 수 있었다. 라이브시티 또한 K팝 전성시대를 내다보고 6만 석 규모 전용 아레나를 구상하면서 K문화의 중심이라는 CJ그룹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고자 했다.
그러나 역설은 여기서 시작된다. 게임체인저가 자신이 만든 판에서 스스로 물러서야 하는 아이러니에 직면한 것이다. MBK파트너스와 미래에셋증권이 CGV의 아시아 사업을 책임지는 CGI홀딩스에 대한 동반매도청구권 행사를 통보한 것은 CJ가 2019년 아시아 확장의 꿈을 품고 3336억 원에 매각했던 지분에 대한 최후통첩이다.
당시 홍콩 증시 상장을 조건으로 받은 투자였지만, 코로나19로 극장 사업이 직격탄을 맞은 데다 중국 정부의 규제까지 겹치면서 기업공개는 무산됐다. 경제 성장기를 맞은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시장에서 지난해 기준 여전히 각각 263억 원, 127억 원의 영업이익을 내는 CGI홀딩스는 CJ CGV의 알짜 자산임에도 CJ는 지분 되사기를 포기하면서 사실상 극장 사업에서 단계적으로 손을 떼겠다는 시그널을 보내고 있다. 이미 국내 CGV는 수익성이 떨어지는 극장을 폐쇄하고 희망퇴직을 단행하는 등 구조조정을 하고 있다.
라이브시티 프로젝트는 더욱 뼈아프다. 8년간 7000억 원을 투입했음에도 각종 인허가 지연으로 4년 이상 시간을 끌면서 끝내 사업이 중단됐다. 경기도가 부과한 지체상금은 당초 예상 1000억 원에서 3144억 원으로 3배 이상 늘었다. 지체상금과 자산 처분 손실을 합하면 순손실은 무려 1조 원을 넘는다.
의아한 건 CJ 스스로가 이런 운명을 예견하고도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CJ는 콘텐츠 시장이 OTT 중심으로 넘어갈 것이라는 흐름을 읽고 국내 미디어 시장에서 넷플릭스의 위상을 높여준 킹덤 시리즈를 공동 제작하기도 했다. 넷플릭스가 한국에 진출한 2016년 티빙을 인수해 4년 뒤 독립 법인화했으나 이미 거대해진 tvN을 비롯한 케이블 채널 사업과 30년을 지속해온 CGV 멀티플렉스라는 유산에 대한 미련 때문에 발 빠른 전환에 실패했다. 콘텐츠 유통의 지배자에서 공급자로 전락한, 말 그대로 게임체인저의 역설이었다.
물론 시대는 변하기 마련이고, 기업의 정체성도 영원할 수 없다. CJ는 이제 이재현 회장 시대 핵심 정체성이었던 '문화'를 대폭 축소하고 그룹의 성장동력 역할을 하는 K뷰티(올리브영) 중심으로 사업을 재편해 그룹의 뿌리인 K푸드(제일제당)를 안정적으로 지탱하는 구조로 전환하고 있다.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아이러니하게도 CJ가 키워낸 K문화 생태계는 CJ 없이도 스스로 성장하고 있다. 게임체인저의 숙명은 변화를 만든 후 스스로도 그 변화에 적응하는 것이다. CJ는 그러질 못했다. 어쩌면 CJ의 진짜 유산은 CGV나 라이브시티가 아니라 한국이 문화강국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증명한 것은 아닐까. 이제 그 DNA를 올리브영과 제일제당에 어떻게 이식하느냐가 관건이다. 30년 전 설탕 회사가 문화제국으로 변신했듯이, CJ가 다음 세대에서도 게임체인저가 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심현희 유통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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