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은 아무 것도 믿지 않는 것인가?” 질문에 답을 찾는 방법은?
[송광용의 밤마다 카페테라스]
초교 5학년의 토론 수업 풍경
목소리 크다고 이기는 게
아니라는 걸 배우는 아이들
어른들은 왜 토론을 잘 못할까
10월의 어느 날, 5학년인 우리 학급의 학부모 공개수업 풍경. 이제 막 토론이 시작될 참이다. 아이들은 저마다 준비한 자료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마른침을 꼴깍 삼킨다. 찬성과 반대 편이 마주 보고, 앞엔 사회자가 앉아 있다. 판정단 다섯 사람이 교실 뒤에서 토론자들을 주시하고 있다. 판정단의 뒤편엔 학부모들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긴장 속에서 토론이 시작된다. 아이들의 날카로운 논증에 감탄이 나오기도 하고, 엉뚱한 반응에 웃음이 터지기도 한다. 아이들의 치열한 토론이 끝나고 판정단이 토론의 승패를 발표한다.
요즘 학교에서는 토론 수업을 많이 한다. 토론 수업은, 요즘 강조하는 대표적인 '학습자 중심의 수업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학생들은 토론을 경험하고 있는데, 많은 어른은 제대로 된 토론을 해본 적이 없다. TV 토론 프로그램을 통해 간접 경험할 뿐이다. 토론의 본질이 상대방을 찍어 누르는 거라는 오해에 사로잡혀 있기도 하다. 아이들의 토론은, 토론에 대한 어른들의 오해를 푸는 데 도움을 준다.
토론하며 바뀌는 아이들
토론은 서로를 돕는 과정이다. 친절한 미소를 보이며 서로를 거드는 방식이 아니라, 치열하게 다투며 협력한다. 토론자들은 한 가지 문제를 다른 위치에서 바라본다. 나와 다른 의견은 전체 그림을 완성하는 데 필수적이다. 토론자들은 상대방의 의견을 들으며 내 생각을 조금씩 수정해 간다. 내 주장의 허점을 보완하고, 상대방의 말을 들으며 내 생각을 확장한다.
처음에 우리 학급 아이들의 첫인상은, 말이 많다는 거였다.
에너지가 넘쳐서 조금만 틈을 주면 시끌시끌해졌다. 수업 분위기 잡으려면 골치 좀 아프겠군, 하고 생각했다. 토론 수업을 시작하고서 분위기가 역전됐다. 말하기 좋아하고 에너지 넘치는 이 아이들은 토론의 규칙 안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무의미한 농담을 하며 낄낄거리던 남학생들이 주제에 집중하며, 필요한 말을 찾으려고 애썼다. 아이돌 이야기로 수다를 떨던 여학생들이 논증 자료가 가득한 종이 뭉치를 들고 앉아 토론을 준비했다.
반전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평소 발표만 시키면 입을 꾹 다물던 한 아이가 있었다.
반 아이들에게 이 아이는 원래 발표를 안 하는 애라고 이미지가 굳어진 지 오래였다. 그 아이가 토론 수업만 하면, 판정단도 아니고 토론자를 희망하는 것이다. 7~8명의 토론자 사이에 숨어 있으려고 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근데 놀라운 건,
그 아이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처음엔 잘 안 들리게 주장 한 문장을 말하더니, 이제는 주변 아이들이 알아들을 정도가 됐다. 그 아이는 여전히 토론자를 자청한다.
속없이 자주 웃고 얌전한 남학생 하나는, 토론만 하면 날카로운 논리를 펼친다. 평소 모습과 다른 면을 보여줘서 놀라움을 준다. 그리고 처음에 토론을 할 때 흥분해서 벌떡 일어나 삿대질하며 목소리를 높이던 남학생 하나는, 점차 목소리를 낮추고 말할 줄 알게 되었다.
승부욕 강한 이 아이는 목소리가 크다고 토론에서 이기는 게 아니란 걸 점차 깨달아 갔다.
흥분해서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는 태도를 보이면, 여지없이 판정단에 태도 점수가 깎였기 때문이다.
이 아이들은 왜 이렇게 바뀐 것일까. 피구만큼 토론이 즐겁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즐거운 일 앞에서 닫힌 마음을 활짝 열 준비가 되어있다. 토론의 즐거움 때문에 자기 모습을 바꾸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자주 말한다. 선생님, 오늘은 토론 안 해요? 토론한다고 예고하면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른다.
즐겁지 않은 어른 세계의 토론
어른의 세계에선 어떤가. 우리의 일상에는 규칙 없는 토론과 논쟁이 가득하다. SNS 버튼만 누르고 들어가도, 어떤 문제에 대해 날 선 공방이 오가는 걸 볼 수 있다. 대다수 사람은 그런 전장에 실수로라도 끼어드는 걸 원치 않는다. 한 마디 잘못했다가 나락 가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보았기 때문이다. 침묵하며 논쟁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교실 토론의 판정단처럼, ‘누가 좋은 토론을 하나’를 기준 삼지 않는다. 누가 내 귀에 듣기 좋은 말을 하는지가 유일한 기준이다. 내 생각과 다른 토론자가 아무리 좋은 논증을 해도 인정하지 않는다.
무책임하게 논쟁을 촉발하는 사람도 많다.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이고 공감을 살 만한 근거를 내세워야 한다. 하지만 자신만 이해하는 근거와 궤변으로 논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누구에게도 설득당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어디 한번 해봐라, 하는 아집은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 때때로 그런 태도를 보이는 사람을 보면, 교실로 소환해서 아이들의 판정을 받게 하고 싶을 때가 있다. 토론에 훈련된 아이들은 놀라울 정도로 객관적으로 토론의 승패를 판정한다. 처음에는 친한 친구가 있는 팀에 흔들리기도 하고, 자신의 개인적인 의견이 영향을 주기도 했지만.
어른들은 아이들처럼 놀이하듯, 상대를 존중하며 토론할 수 없는 걸까.
토론을 스포츠처럼
예전에 프랑스 교육의 모습을 그린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입시를 앞둔 고3 학생이 학교 수업을 마치고 어디론가 간다. 그 학생은 한 카페로 들어간다. 그곳엔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모인 토론 모임이 진행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대학 입시에 철학 시험을 본다. ‘토론은 폭력을 포기하는 것인가’(2024년), ‘아는 것은 아무 것도 믿지 않는 것인가’(2023년), ‘기술은 우리를 자연에서 자유롭게 하는가’(2022년). 기출문제에서도 보듯, 단순한 지식으로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다양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 지속적인 토론을 통해 주장하는 힘을 길러야 풀어낼 수 있다. 그래서 그 학생은 도서관에 가는 대신, 토론 모임에 가서 토론에 참여했던 것이다.
학생이 들어간 카페에 모인 사람들은, 일상에서 토론을 스포츠처럼 즐겼다. 그들은 어떤 문제를 놓고 논쟁하며 자신의 주장을 다듬고, 생각을 확장하는 기쁨을 알았다. 그들에게 토론 시간은, 지더라도 결국엔 모두가 이기는 시간이었다.
아이가 아닌 어른들이, TV 속에서가 아닌 일상에서 토론을 즐기는 문화가 우리에게도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 사생결단 없이도, 상처받지 않고도 안전하게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일상의 토론 모임들은, 작지만 강한 지렁이처럼 공론의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 것이다.
※ 송광용 작가는 청주교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낮엔 초등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밤마다 카페에 앉아 글을 쓴다. 에세이, 소설, 동화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저서로 산문집 <마음이 조금은 헐렁한 사람>, 장편동화 <거대 토끼 우토와 숲 방위대>가 있다. 밤의 카페테리아에서 만나 이야기를 건네듯, 소소하지만 울림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바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