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기업지배구조 개선의 날이 밝았다?
글로벌 1위 비철금속 제련기업인 고려아연의 경영권을 둘러싸고 ‘공개매수’ 싸움이 진행 중이다. 공개매수는 ‘적대적 인수합병’의 가장 대중적 방법. 경영권을 탈취하려는 ‘공격자’는 모든 주주를 대상으로 특정 가격에 주식을 사겠다고 공고한다. 그 호가는 시세보다 훨씬 비싸다. ‘방어자’인 현 경영진은 더 높은 공개매수 가격을 부르는 것으로 맞선다. 마치 경매소 같았다.
지난 9월13일 사모펀드 MBK파트너스(MBK)와 ㈜영풍이 주당 66만원에 고려아연 주식을 매수하겠다고 공시했다. 공개매수 마감은 10월4일. 당시 고려아연의 양대 주주는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측(약 33.9%)과 장형진 영풍 고문 측(33.1%)이었다. 지분 차이가 크지 않다.
전날인 9월12일 고려아연 주식 종가는 55만6000원. 주주들로선 MBK·영풍에 청약하면 약 10만원의 추가 수익을 얻게 된다. 그러나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고려아연의 현 대주주가 더 높은 가격을 부를 터이니. 실제로 그렇게 흘러갔다.
MBK·영풍은 9월26일, 공개매수가를 75만원(9월26일)으로 올렸다. 일주일 뒤인 10월2일, 고려아연은 10월23일까지 1주당 83만원으로 매수하겠다고 공시했다. 고려아연은 공개매수한 주식을 자사주(고려아연 법인이 해당 주식들의 소유자)로 등록한 뒤 전량 소각하겠다고 밝혔다.
MBK·영풍은 공개매수 마감일인 10월4일까지 경영권에 도전장을 내밀 만큼 충분한 지분을 매입하진 못했다. 결국 공개매수를 열흘(10월14일까지) 연장하는 한편 매수가를 고려아연과 동일한 83만원으로 올렸다. 이에 맞서 고려아연은 매수가를 다시 89만원으로 높인다(10월11일).
그러나 MBK·영풍은 공개매수 마감일인 10월14일, 5.34%의 지분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당초 제시했던 ‘최소 매수량(6.9%, 이 정도는 가져야 경영권에 도전할 수 있다는 의미)’보다는 적지만, ‘승기를 잡았다’는 평가가 나왔다. 실제로, 의결권 있는 주식으로 계산해보면 MBK·영풍의 지분율은 47~48%까지 나올 수 있다. MBK는 “오늘은 한국 자본시장에서 의미 있는 이정표로 남게 될 것”이라며 사실상 승전고를 울렸다. 자본시장 일각에서도 이 소식에 환호하며 ‘기업지배구조 개선으로 주주가치를 높일 수 있는 돌파구가 열렸다’라고 평가했다.
사모펀드는 기업 경영권을 인수한 뒤 비싸게 팔아 수익을 낸다. 최근 한국에서는 이런 사모펀드의 행동에 윤리적 명분까지 덧붙이는 경우가 늘고 있다. 이른바 재벌이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원흉이며 ‘기업가치’를 낮추는 주적으로 인식되고 있어서다. 일각에서는 사모펀드가 이런 재벌을 견제해 주주가치를 높이고 왜곡된 기업지배구조를 바로잡는다고 주장한다. 이런 논리하에서 사모펀드는 가히 정의의 사도다.
영풍은 왜 고려아연의 경영을 비난할까
지난 9월19일 MBK·영풍은 기자간담회에서 고려아연의 경영 행태를 맹렬히 성토했다. 이들에 따르면 최윤범 회장이 경영 일선에 뛰어든 2010년대 말부터 고려아연은 “무분별한 투자”로 인한 손실 증가와 부채 부담 심화, 수익성 악화를 겪었다. 재무건전성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고려아연의 부채 규모는 2019년 410억원에서 올해 상반기엔 1조4110억원으로 35배나 증가했다. 순현금(현금 보유-부채)도 급격히 줄어들어 올해 말쯤엔 ‘순부채’로 돌아선다고 했다. 이런 와중에도 최윤범 회장 주도로 수익성이 검증되지 않거나 고려아연의 본업과 무관한 투자들이 계속되고 있다며, MBK·영풍은 개탄해 마지않았다.
MBK·영풍은 대안도 내놓았다. 본업과 무관한 투자금을 회수한다. 또한 첨단산업의 수요가 늘어나고 있는 ‘전기동(전기분해로 추출하는 순수한 구리)’과 ‘반도체용 황산(반도체 제조 공정에 사용되는 고순도 황산)’ 사업을 확대해서 제련업 경쟁력을 강화한다. 이를 통해 기업가치를 높이고 ESG도 제고하겠다는 것이다.
MBK·영풍 연합의 한 축인 ㈜영풍은 고려아연의 관계회사다. 경북 봉화군 석포리에서 석포제련소를 운영하고 있다. 석포제련소는 고려아연의 온산제련소(울산 울주군 온산읍)와 협력관계를 유지해왔다. 영풍의 장형진 고문으로 대표되는 장씨 집안과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의 최씨 집안은 오랜 인연으로 얽힌 사이다.
㈜영풍과 고려아연의 뿌리는 1949년 창립된 ‘영풍기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황해도 출신인 장병희씨와 최기호씨가 수산물 수출업체로 공동 창업했다. 두 사람은 시류를 볼 줄 아는 영민한 자본가였다. 1970년대 박정희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에 맞춰 석포에 아연 제련소를 만들었다. 당시 포스코(포항제철)가 출범하면서 아연(철강재 도금, 자동차와 가전제품 외장재) 수요가 폭증하고 있었다. 영풍기업은 1974년 울산 온산면에 조성된 비철금속(철 이외의 아연, 동, 니켈, 납 등) 단지에 온산제련소를 설립해 아연 수요 증가에 대응했다. 이후 영풍기업은 제련뿐 아니라 전자, 도서 판매, 유통 등으로 영역을 확장하며 ‘그룹’으로 자리 잡게 된다. 계열사들은 서로의 지분을 가졌다. 두 집안 간 협력과 견제의 표현이기도 했다. 장씨 집안은 석포제련소(지금 영풍의 주력사업), 최씨 집안은 온산제련소(고려아연) 경영을 맡았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며 협력은 약해지고 견제는 강해진다. 특히 2010년대 하반기 들어 기업집단(그룹)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면서(순환출자 금지 등) 영풍그룹은 지배구조를 개편한다. 이 와중에 장씨 집안은 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영풍의 지배권을 장악했다. ㈜영풍은 고려아연의 최대주주(지분율 25% 내외)다. 그러나 고려아연은 최씨 집안이 그대로 경영했다. 장씨 집안은 석포제련소(영풍)와 전자(영풍전자) 부문 등을 맡았다.
이런 가운데 영풍그룹의 ‘캐시카우’인 제련산업에서 극심하게 명암이 갈리고 만다. 비철금속 제련업은 본질적으로 공해산업이다. 여러 성분이 섞인 광석을 높은 온도로 끓인 뒤 필요한 금속만 추출한다. 이 과정에서 필요 금속 이외의 다른 요소(폐기물)와 대기오염 가스가 대량 방출된다. 환경 규제가 강화된 시기엔 이런 폐기물과 가스를 얼마나 잘 처리하느냐가 제련업체의 경쟁력이다. 석포제련소는 이 부분에서 실패했다. 2010년대 들어 환경오염 및 오염수 불법 배출(석포제련소는 낙동강 상류에 있다), 대기오염물질 농도 수치 조작, 안전사고 등으로 수십 차례 행정처분을 받았다(〈시사IN〉 제865호 ‘제련소 폐쇄를 이들이 주장하는 이유’ 기사 참조) .
반면, 고려아연은 특유의 혁신적 노하우와 투자로 수익성을 높이면서 글로벌 1위 비철금속 제련업체로 자리를 굳혔다. 비철 광석엔 다양한 금속이 섞여 있다. 아연 제련용 광석엔 납이, 납 광석엔 아연이 함유되어 있다. 광석에서 아연을 추출하고 남은 폐기물에서 다시 납을 빼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 노하우의 활용으로 온산제련소는 고체 폐기물들을 방출하지 않는, 세계 최초의 제련소로 발전했다. 고려아연은 아연뿐 아니라 납(배터리, 전원 케이블), 인듐(액정화면), 은 등에서도 글로벌 1위 생산업체다.
어차피 갖지 못할 경영권
지난 5년 동안 두 업체의 사업보고서를 비교해봤다. ㈜영풍(개별 기준)의 경우, 2019년(500억원)과 2020년(235억원)에는 영업이익에서 흑자였으나 이후 3년 동안 적자 규모가 계속 늘어나 2023년에는 1424억원을 기록했다. 이 시기에 영풍이 고려아연으로부터 받은 배당금은 4700억원에 달한다. MBK 같은 사모펀드들이 가장 중시하는 주주환원 면에선 어땠을까. ㈜영풍의 (연결)현금배당 성향(순이익 가운데 배당금 총액 비율)은 2019년 7.38%에서 2021년 13.85%를 고비로 급락한다. 2023년엔 마이너스 28.26%다.
고려아연의 사업보고서(개별 기준)에 따르면, 2019~2023년 이 회사의 영업이익은 매년 7000억~9000억원에 달했다. (연결)현금배당 성향도 2019년 36.86%에서 계속 늘어 2023년에는 57.4%에 도달했다. 국내 기업 중 가장 높은 편이다. 지난해 주주환원율(배당금과 자사주 매입·소각으로 주주에게 돌아간 수익을 합친 개념)은 창사 이래 최고 수준인 76.3%를 기록했다.
지금 영풍은 고려아연의 경영 실적을 비판하며 경영권 교체를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고려아연은 ‘몰아내야 할 만큼 나쁜 경영’에도 불구하고(?) 자본시장에서 탐내는 ‘상품’이 되었다. 최윤범 회장 측은 불안했을 것이다. ㈜영풍의 25% 외에도 장씨 측의 개인들과 회사들이 고려아연에 7% 이상의 지분을 가졌다. 합치면 30%대 초반이다. 최 회장 측의 지분은 15.9%에 불과했다. 최 회장 측은 4차 산업혁명 관련 기술개발을 매개로 현대차(전기차), 한화(신재생에너지), LG화학(이차전지 소재) 등을 우군으로 끌어들인다. 투자금을 받거나(제3자 유상증자) 자사주를 맞바꿨다. 이로써 현대차-한화-LG화학이 17.3%의 고려아연 주식을 갖게 된다. 최 회장 측 지분(15.9%)과 합치면 30%대 초반으로 장씨 측과 비슷했다.
비슷한 시기, 고려아연은 석포제련소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석포제련소 폐기물 처리나 광석 공동구매 등에서의 협력을 중단하려 했다. 장씨 집안으로서는 3대에 걸친 인연에 대한 배신으로 느꼈을 만하다. 이 협력 관계의 중단은 석포제련소에 중대한 위기를 초래할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타난 구원자가 MBK였다.
지금까지의 경과를 보면, 최근 고려아연 인수전은 ‘비철금속 제련 집안’들 사이의 싸움 같다. 지난 50여 년 동안 제련산업에서 전문성을 축적한 장씨 측이 고려아연의 경영권을 얻어 석포제련소와 모종의 시너지 효과를 노리는 것 아닐까? 비철금속은 국가경제의 기간산업이다. 현재 진행 중인 4차 산업혁명에서도 비철금속 소재의 수요가 급격히 늘어날 것으로 예측된다.
그러나 이런 기대는 한국기업투자홀딩스(고려아연 인수를 위한 특수목적법인)의 9월24일 공시에서 무너진다. 이 문건에는 MBK와 ‘영풍 측(영풍 법인, 장씨 집안, 특수관계자)’ 사이의 ‘경영협력계약’이 담겨 있다. 이에 따르면, 장씨 집안이 아니라 MBK가 고려아연의 경영권을 잡는다. 더욱이 현재 영풍 측이 보유한 고려아연 지분 가운데 상당 부분이 MBK로 넘어갈 수 있다.
MBK·영풍이 고려아연 경영권을 인수하면 이사회를 새로 구성할 것이다. 새 이사회에선, MBK 추천 이사의 수가 영풍 측보다 1명 더 많도록 규정되었다. 최고 임원들(CEO와 CFO)도 MBK가 지명한다.
MBK는 영풍 측이 보유한 고려아연 주식에 대해 콜옵션(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 MBK가 ‘약속한 분량의 주식을 약속한 가격으로 우리에게 팔라’고 요구하면, 영풍 측은 따라야 한다. 그 목적은 ‘지배지분 가운데 MBK의 몫을 영풍의 몫보다 많게 하는’ 것으로 보인다. 계약서에 따르면, ‘콜옵션 대상 주식’은 다음과 같다. “(영풍 측과 MBK가) 소유한 주식을 기준으로 그 ‘50%+1’주에 해당하는 주식 수에서 MBK가 소유한 주식 수를 차감하여 산출되는 나머지.”
몹시 혼란스러운 문장이니 풀어보겠다. 고려아연 주식이 모두 100장인데 MBK·영풍이 38장으로 경영권을 장악했다고 치자. 38장 중에 영풍 측의 주식은 33장, MBK가 공개매수한 주식은 5장이다. 38장(양측이 소유한 주식)을 기준으로 ‘50%(19장)+1장’은 20장이다. 이 20장에서 MBK 소유 주식(5장)을 차감하면 ‘나머지 주식’은 15장(콜옵션 대상)이다. 즉, 영풍 측은 MBK의 콜옵션 행사 시 33장 가운데 15장을 MBK에 팔아야 한다. MBK의 소유 주식이 20장(기존 5장+콜옵션으로 받는 15장)으로 늘어나는 반면 영풍 몫은 18장으로 줄어든다. MBK는 경영권은 물론 최대주주 지위까지 얻게 된다. 이 콜옵션은 MBK·영풍이 고려아연 이사회의 과반수를 선임하는 날부터 행사할 수 있다.
이쯤 되면 영풍 측이 왜 고려아연 인수에 참여했는지 모호하다. 어차피 갖지도 못할 경영권을 왜 탐내는가. 계약서에 답이 있다. 공동매각 요구권(Drag-Along Right)과 동반매도 청구권(Tag-Along Right)이다. 사모펀드 같은 재무적 투자자(자산을 비싸게 팔아 수익을 올리는 것이 목적)가 다른 인수 희망자에게 경영권(지배지분)을 팔 때 가장 골치 아픈 일은 무엇일까? 다른 소수주주들이 ‘그 가격으론 못 팔겠다’라고 버티는 경우다. 인수 희망자는 지배지분(일단 38장) 전체를 요구한다. MBK의 20장을 사봤자 영풍이 저항하면 경영권을 행사할 수 없다. 그래서 MBK가 순조롭게 ‘엑시트(인수 이후 재매각)’하려면 영풍도 함께 팔도록 강제할 장치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공동매각 요구권이다. 영풍 측에도 우려 사항이 있다. 최대 주주인 MBK가 자신이 보유한 고려아연 주식만 비싸게 팔고 ‘튀어’버릴 수 있다. 이런 경우에 대비해, 소수주주가 될 영풍은 MBK에 ‘나의 고려아연 주식도 당신들과 같은 조건으로 함께 매각해야 한다’라는 내용의 동반매도 청구권을 걸어놓은 것이다.
영풍은 MBK에 고려아연 경영권과 영풍의 고려아연 지분을 넘길 뿐 아니라 함께 ‘엑시트’할 장치까지 만들어놓았다. 고려아연을 인수한 뒤 적극적으로 경영할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고려아연 측은 MBK·영풍의 ‘경영 부실’ 비난에 대해 강력히 반박하고 있다. 예컨대 MBK·영풍이 의도적으로 고려아연의 현금 유동성을 폄훼했다고 주장한다. “올해 6월 말 연결 기준 고려아연의 현금은 2조1277억원으로 같은 시기 총차입금(1조3288억원)을 모두 상환해도 7989억원의 ‘순현금’ 상태다. 신사업 투자로 부채 규모가 늘었지만, 올해 6월 말 연결 기준 부채비율은 36% 수준으로 우량기업보다 낮은 수준을 유지했다.”
그 증빙으로, 고려아연이 최근 기록한 신용등급 AA+ 및 기업어음 최상위 등급을 제시한다. 지난 8월 ‘한국ESG연구소’에서 선정한 상반기 평가에서도 고려아연은 A+ 등급을 받았다.
그러나 지난 5년 동안 고려아연의 부채가 급격히 증가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 부채 증가가 MBK·영풍의 주장대로 ‘무분별한’ 투자 때문이라면 심각한 일이다.
그러나 투자의 성패를 투자 시점에서는 정확히 가늠할 수 없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례들이 있다. 1970년대 포항제철 설립은 국내외에서 “무분별한 투자”로 비난받았다. 1970년대 중후반 삼성의 반도체 투자도 ‘미친 짓’으로 여겨졌다. 삼성전자는 1990년대에 LCD 패널과 플래시메모리, 이차전지 등에 그룹 전체를 휘청거리게 할 만한 거금을 투자했다. 이 투자는 10여 년 뒤에 삼성전자를 글로벌 자이언트로 만들었다.
MBK가 중국계 펀드?
제련산업은 총체적 위기 국면이다. 기후위기로 인한 ‘탄소중립’ 의제가 전 지구적 규제로 제도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탄소를 발생시키지 않는 재생에너지로 기업활동에 필요한 전력을 조달하라’는 RE100은 단지 윤리가 아니라 기업활동에 거대한 제약 조건으로 등장했다. 투자기관들이 RE100 충족 정도를 투자 실행의 기준으로 삼는가 하면 글로벌 거대 기업들은 공급업체들에 신재생에너지로 생산한 중간재를 요구한다. 제련산업은 엄청난 규모의 에너지를 사용한다. 탄소는 물론 이산화황, 질소산화물, 중금속 증기 등 다양한 유독가스를 방출한다.
제련산업이 버틸 수 있을까? 고려아연의 대안은 ‘트로이카 드라이브(3대 신사업 추진)’였다. 이에 따른 투자로 부채가 급증했다.
첫째, 니켈 및 전구체 생산 부문으로 진출. ‘전구체’는 이차전지의 양극(陽極)에 필요한 핵심 소재다. 전구체의 핵심 소재는 니켈이다. 고려아연의 자회사인 켐코는 2022년 LG화학과 합작으로 한국전구체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그동안 중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왔던 이차전지 소재를 국산화하려는 시도다.
둘째, 신재생에너지다. 고려아연은 오스트레일리아에 썬메탈이란 대형 제련소를 자회사로 거느리고 있다. 이 회사에 청정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해 태양광 발전소인 아크에너지를 2018년 설립했다. 또한 아크에너지를 거쳐 ‘매킨타이어 풍력발전소’의 지분 30%를 취득했다. 태양광 및 풍력 발전소에서 생산된 신재생에너지를 썬메탈과 오스트레일리아 가정들로 공급하게 된다. 이 에너지로 생산된 비철금속은 ‘탄소중립’ 규제로부터 자유롭다. 신재생에너지는 ‘그린 수소’로 만든 뒤 암모니아 형태로 전환시켜 한국 등 오스트레일리아 외부로 수송할 수도 있다.
셋째, 자원순환이다. 폐기된 이차전지, 컴퓨터나 스마트폰 등의 부품, 산업폐기물 등에서 아연이나 동, 니켈 등을 추출한다. 광석에서 비철금속을 추출하지 않으니 문자 그대로 ‘도시광산’을 만드는 셈이다. 이 사업을 본격화하려면 광범위한 폐기물 수집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이그니오나 캐터맨 같은 미국의 전자 폐기물 재활용 업체들을 인수했다.
사모펀드 같은 재무적 투자자 입장에선, 성공 여부가 불투명한 트로이카 드라이브와 이로 인한 부채 증가는 매우 부담스러울 것이다. ‘사업의 장기적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본업(제련)과 무관한 투자금을 회수”하는 쪽이 재무적으로 현명할 수 있다. 사모펀드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고려아연을 인수하려면 뭔가 사업의 비전을 보여줘야 했다. 첨단산업으로 여겨지는 전기동이나 반도체용 황산 사업의 확대를 내걸었다. 이에 대해 고려아연 측은 제련산업에 대한 지식도 경험도 없는 사모펀드의 “표절”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고려아연은 이미 전기동(3만t)과 반도체용 황산(17만t)을 생산하고 있으며 이의 증산 계획도 지난해 말 발표했다.
누가 이길까? 10월18일(MBK·영풍이 제기한 고려아연의 자사주 취득 금지 가처분 신청에 대한 판결)과 10월23일(고려아연의 공개매수 마감일)이 분기점이다. 다만 어떤 결과가 나오든 양측의 지분 차이는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MBK·영풍은 시급하게 임시 주총을 열어 이사진을 새로 선출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고려아연 정관에 따르면, 임시 주총은 이사회의 결의 사항이다. 정기주주총회는 내년 봄에 연다. 경영권 싸움은 장기화될 가능성이 크다.
일부 정치권이나 언론에선 MBK를 외국계(특히 중국계) 펀드라고 부른다. 그렇지 않다. MBK의 국적은 엄연히 한국이다. 사모펀드에 투자한 ‘개인 및 기관(LP)’의 신원은 기밀 사항이므로 중국계 자금이 일부 들어가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사모펀드가 특정 LP의 요구에 따라 자산(예컨대 고려아연)을 중국으로 넘길 것이라는 주장은 섣부르다. 물론 “고려아연을 중국에 넘기지 않겠다”는 MBK의 약속도 믿을 바가 못 된다. 사모펀드는 자신에게 돈을 맡긴 LP들에게 ‘수탁의무(LP들을 대신해서, LP들을 위해, 펀드를 운영할 의무)’를 진다. 사모펀드는 그 국적이 어떻든 가장 비싼 값을 부르는 매입 희망자에게 자산을 팔고 나가는 것이 수탁 의무다. ‘엑시트’ 이전에도 고려아연이라는 회사의 장기적 발전이나 한국의 국가경제보다 사모펀드로서의 수탁의무를 최우선적 고려 사항으로 삼아 운영할 것이다.
그러므로 MBK의 고려아연 인수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을 보면서 ‘드디어 기업지배구조 개선의 날이 왔다’라고 기뻐하는 것은 섣부르다. 더욱이 왜 하필 수익성 높고 주주환원율 높고 과감한 투자 능력까지 갖춘 회사가 ‘기업지배구조 개선’의 시범 케이스가 되어야 하는가.
7% 지분을 가진 국민연금의 신중한 선택이 절실하다. 삼성과 엘리엇이 격돌한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주총 당시 국민연금은 이재용 가족의 손을 들어줬다가 곤욕을 치른 바 있다. 국민연금이 박근혜 당시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사적 이익을 위해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법원의 판단 때문이었다. 국민연금이 권력자들의 압박이 아니라, 국가경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삼성을 투기자본 엘리엇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기준으로 합병을 찬성했다면, 한국 법원과 국제중재(ISDS)의 판단은 크게 달라졌을 터이다. ‘국민연금기금 수탁자 책임에 관한 원칙’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장기 투자자로서 “투자 대상 기업의 중장기 발전과 기업가치 향상을 추구함으로써 기금의 중장기적 수익 제고를 도모”해야 한다. 국민연금은 이 원칙을 따라야 한다.
이종태 기자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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