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고공농성의 선구자, 강주룡을 아십니까

일제강점기 평양 평원고무공장 여성 노동자다. 그의 별명은 체공녀(滯空女). 체공은 공중에 머무른다는 뜻으로 우리나라 고공농성의 선구자다. 그가 체공을 결행한 무대는 12m 높이의 을밀대 지붕. 평양에 고무신공장이 70여 개 가까이 성업했다. 1929년 세계 대공황의 여파는 식민지 조선에도 불어왔다. 공장에서 일본인 노무자에 비해 조선인 남성은 절반의 임금을, 여성은 그 절반의 절반을 받았다. 가마솥에 고무를 쪘다. 찐 고무의 역한 냄새를 견디며 하루 15시간 일해도 여공들이 받는 일당은 국밥 한 그릇값, 30전이었다. 1931년 그마저 18% 삭감하며 해고로 압박하자 단식농성, 공장점거를 하며 파업을 벌였다. 그러다 공장주가 부른 경찰에 쫓겨났다. 억울함에 광목천 1필을 사서 벚나무에 목을 매려고 했다. 다시금 마음을 고쳐먹으니, 울분이라도 실컷 토해내며 죽으리라. 그의 눈에 을밀대가 들어왔다. 광목천으로 그네를 타듯 올라섰다. 이른 아침부터 산보객들이 신기해하며 모여들었다. "아, 저기 사람이 있다."
강주룡은 외쳤다. "우리는 49명 우리 파업단의 임금감하(삭감)를 크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평양의 2300명 고무 직공의 임금감하 원인이 될 것이기에 우리는 죽기로써 반대하려는 것입니다… 끝까지 취소하지 않으면 나는 근로대중을 대표하여 죽음을 명예로 알 뿐입니다." 9시간 넘게 피 토하듯 소리치다 일본 경찰에 의해 끌어내려 왔다. 국내 최초의 고공 농성은 임금삭감을 막고 해고자 절반을 복직시키며 파업 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본인은 해고를 피하기 만무했다. 당시 오기영 기자가 잡지 <동광>에 기고한 '을밀대 상(上)의 체공녀, 여류투사 강주룡 회견기'에 이 내용을 기록했다.
1990년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82m 높이의 골리앗 크레인에 올랐다. 골리앗 투쟁은 90년대 노조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었다. 30명 이상 죽어 나간 쌍용차 노동자도 굴뚝에 올랐다. 김진숙은 309일간 한진중공업 크레인 농성을 벌였다. 일본 다국적기업 니토덴코의 한국옵티칼은 구미공장이 화재로 전소하자 공장을 폐쇄하고 희망퇴직에 불응하는 노동자를 해고했다. 박정혜는 불탄 공장 옥상에 올랐고, 600일이라는 세계 최장기 고공농성 기록을 남기고 지난 8월29일 땅을 밟았다. 아직도 고용승계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왜 일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오르고 또 오를까. 왜 용산 철거민은 남일당에 설치한 망루로 올랐을까. 왜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 노동자들은 수시로 도크와 철탑을 오르고 있을까. 이렇게 하늘 가까이 오르는 사람들은 그 이유를 "힘없고 약한 사람들이 최후로 선택하는 수단"이라고 말한다. 고공농성은 밑바닥 노동자가 오르고 또 올라 높낮이 경계가 사라지는 시시포스의 노동일지 모른다. 강주룡은 31세 되던 해에 그 솟대 같은 삶을 내려놓는다. 감옥을 전전하며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다 빈민굴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강주룡은 노동자의 권리만 주장하지 않았다. 노동계급이자 식민지 민중으로서, 가부장제 사회에 짓눌린 여성으로서 3중 억압에 직면했고, 이에 저항했다. 자유로운 영혼, 시대와 불화한 신(新)여성이었다. 남편 최전빈과는 20세에 결혼했다. 부부 애정은 각별했다. 남편이 독립운동을 위해 서간도로 가자 같이 풍찬노숙했던 강주룡은 남편과 사별하는 순간을 이렇게 구술한다. "남편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을 때는 벌써 틀렸습디다.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 먹였더니 좀 정신을 차렸으나 그날 밤으로 죽었습니다. 생사를 몰라 바늘로 살을 찔러 보고야 죽은 줄 알았으나 이미 죽은 사람이니 시신 옆에서 한잠 자고 이튿날 아침 병문안 온 사람들 손으로 묻었습니다."
/부성현 전 매일노동뉴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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