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츠 보다 잘 팔릴까 봐" 벤츠가 수출 금지 시킨 한국차

우리나라를 휩쓸었던 영화 속 캐릭터가 있었습니다. 바로 영화 <타짜> 속 '이 인물'인데요. 늘 감초 같은 캐릭터로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주는 배우 김응수가 연기한 '곽철용'이 재조명받으면서 그의 캐릭터가 녹아들어있는 대사 하나하나가 많은 남자의 가슴을 뛰게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인 대사는 바로 '묻고 더블로 가'였죠. 지나간 손해는 덮어두고 더 큰 이득을 내어 만회하겠다는 상남자다운 면모가 잘 드러나는 대사였습니다.

오늘 소개할 이 모델이야말로 '곽철용 정신'이 깃든 모델인데요. 온갖 풍파 속에서도 언제나 최고의 자리와 품위를 지켜왔던 차. 빚더미에 깔린 쌍용차를 구원할 기대주였지만 무거운 어깨를 버티지 못하고 결국 2세대로 끝나버린 차. 이번 시간에는 쌍용자동차의 플래그십 세단, 체어맨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체어맨 이야기│대한민국 0.1%를 위한 차]

1990년대 초중반, 우리나라 국가 경제는 그야말로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우선 88 서울 올림픽을 성황리에 마무리하면서 대한민국에 대한 위상이 눈에 띄게 높아졌습니다. 이 무렵 소련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하면서 개혁과 개방, 세계화의 물결을 통한 기회의 장이 새롭게 펼쳐지기도 했죠. 당연하게도 돈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고급차에 대한 수요 역시 크게 늘었습니다. 국산차 업체도 '해외 모델', 그중에서도 전략적 제휴 관계를 맺고 있던 일본 업체의 모델을 기반으로 고급차를 연달아 투입하면서 시장의 요구에 발맞췄어요.

버스회사로 시작해 상용차와 SUV를 전문적으로 만들어오던 틈새시장 메이커 '쌍용'은 야심 차게 내놓은 고급 SUV '무쏘'가 히트하자 자신감을 얻었고, 더 큰 한방으로 시장에서 확실한 존재감을 다질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바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고급스러운 대형 세단을 출시한다는 계획이었죠.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최고급 차를 판매해 적자를 만회하고 향후 중형 세단 등 라인업을 확장해 종합 메이커로 거듭나겠다는 목표였습니다.

하지만 예상했다시피 당시 쌍용차에 그런 차를 만들 만한 기술력과 노하우가 있을 리 없었죠. 변변한 세단 라인업 하나 없었던 쌍용차에 대형 럭셔리 세단 개발은 정말 뜬구름 같은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기술 제휴를 맺고 있던 큰 형님, '메르세데스-벤츠'의 손을 빌리기로 했어요. 하지만 세단이야말로 벤츠의 주력 제품이자 자존심이었던 만큼 선뜻 손을 잡아주지 않았고, 쌍용 실무진은 오랜 설득과 노력을 기울여 기술 이전을 성사하게 됩니다. 이전해주는 대가로 벤츠의 '소형 상용차' 생산을 주문받게 되는데, 그 차가 바로 수출명 '벤츠 MB100/140'. 국내명 '이스타나'죠. 우여곡절 끝에 'W-CAR' 프로젝트가 시작됐고, 막 단정된 W124 E클래스의 차대와 파워트레인 각종 부품 역시 벤츠의 물건을 사용해 개발이 진행됐습니다.

한국 사람은 기회를 절대 대충 잡지 않죠. 테스트카가 완성되자 쌍용은 국내에서 할 수 없는 각종 테스트를 진행하기 위해 이 차를 독일 현지의 벤츠 연구소로 보냈습니다. 이 차를 구석구석 살펴본 벤츠 실무진들은 그야말로 '깜놀'. 디자인과 주행 품질이 기대 이상으로 훌륭했고, 특히 개발 중이던 '최신 S클래스'와도 유사한 부분이 많았습니다.

아시아 변방, 한국의 국소 메이커인 쌍용을 얕잡아 봤던 벤츠는 예상치 못한 높은 완성도에 판매 간섭을 우려했고, 미국과 유럽 선진국 등에 체어맨을 수출하지 못하게 막는 것으로 견제했어요. 쌍용 역시 내수 시장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큰 타격은 없었습니다. 이윽고 1997년, '체어맨'이라는 이름표를 단 대형 세단이 혜성처럼 등장했죠.

[체어맨│1997-2003]

자동차의 본고장, 독일의 기술력과 디자인을 전면에 내세운 체어맨은 벤츠의 후광을 등에 업고 화려하게 등장했습니다. 차명인 '체어맨'은 단어 뜻 그대로 의장, 회장 등 집단의 대표를 의미했습니다. 타겟 고객의 특징을 그대로 반영한 묵직한 이름이었죠. 당시 경쟁 모델이 뉴 그랜저를 다듬은 현대 다이너스티, 마쯔다 센티아를 베이스로 한 기아 엔터프라이즈 등 일본풍 고급 세단이었던 것을 떠올리면 유러피언 디자인의 체어맨은 단연 돋보였습니다.

벤츠의 수석 디자이너 '요제프 갈리첸도르프'가 주도한 디자인은 벤츠에 기반한 직선 위주의 견고한 인상에 부드러운 곡선이 가미된 모습으로, 우아하면서도 동시에 위풍당당함이 느껴지는 디자인이었습니다.

깍두기 같은 생김새를 하고 있었던 당시 벤츠에 비해서도 오히려 더 근사한 모습이었어요. 라디에이터 그릴 한가운데 자리 잡은 거대한 쌍용 로고는 무모함을 무릅쓰고 목표를 달성한 그들의 자신감을 드러내는 듯했죠. 보닛 끝에 자리한 전용 날개 엠블럼도 남다른 이미지를 뽐냈고요. 동급 최고 수준의 전장을 확보해 늘씬하게 뻗은 측면은 벤츠를 연상케 하는 불판 형태의 알루미늄 휠과 당시 유행하던 투톤 컬러로 단정하게 마무리했습니다.

후면 역시 두꺼운 C필러에서 매끄럽게 이어지는 길쭉한 트렁크, 전면부 날개 엠블럼을 이어받은 듯한 리어램프가 돋보여 한눈에 봐도 고급차다운 이미지가 물씬 풍겼습니다.

여기에 램프를 음각으로 울퉁불퉁하게 처리해 와류를 발생시켜 흙먼지가 쓸려 내려가도록 고안한 벤츠 특유의 디테일까지 그대로 이식해 그야말로 '벤츠보다 더 벤츠다운 분위기'의 차였어요. 특히 원톤으로 칠해진 하위 트림 모델은 훨씬 벤츠다웠습니다. 갑자기 이런 차를 만들어 왔으니 당시 벤츠 실무진들이 깜짝 놀랄 만도 했죠. 비록 중형 체급인 E클래스에 기반했기 때문에 전폭이 넉넉하진 않았지만, 경쟁 모델 역시 좁은 도로 폭에 맞춘 내수형 일본 차 기반이라 차급에 비해 좁은 건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약점으로 작용하진 않았습니다.

와이퍼도 남달랐는데요. 일반적인 더블 암 와이퍼가 아닌, 당시 벤츠가 특허를 가진 생소한 '싱글 암 와이퍼'를 사용했습니다. 가운데 자리한 하나의 거대한 와이퍼가 좌우로 움직여 넓은 면적을 닦아냈는데, 삼각형 꼬다리도 남지 않았고 잔여물로 인한 시야 방해 역시 최소화한 기발한 장치였죠.

다만 하나의 육중한 팔이 넓은 면적을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악천후에서는 대응 능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졌습니다. 보기에 따라 정신없어 보인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고, 내구성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죠. 또 보시다시피 빗물을 닦기보다는 날려 보내는 것에 가까웠기 때문에 차 양옆에 위치한 차나 사람에게 의도치 않게 물을 끼얹었습니다. 특히 신호 대기 중일 때는 눈치가 보일 정도였죠.

실내 역시 세 개의 원으로 꾸며진 단조로운 계기판, 납작한 스티어링 휠, 넉넉하게 두른 우드 그레인 등 곳곳에서 벤츠의 향기가 짙게 배어 나왔습니다. 고급스럽긴 했지만 독일차 특유의 '기능을 앞세운 디자인'과 외관의 각을 실내에도 고스란히 반영해 투박함이 느껴졌던 벤츠와 달리, 체어맨의 실내는 외관의 단아함을 이어 부드러운 곡선이 돋보였고 고급스러움은 남기면서도 최신 트렌드에 걸맞게 꾸며져 '체어맨'만의 분위기를 만들어 냈습니다.

특히 원가 절감의 일환으로 일명 'DIN' 규격의 유닛을 사용해 계단식으로 쌓아 올리는 게 일반적이었던 다른 차들에 비해 전용 부품으로 마감해 버튼의 수를 줄이고, 공조 장치를 인포테인먼트 화면에 통합하는 등 요즘 차량과 비교해도 크게 뒤지지 않을 만큼 깔끔했죠.

여기에 최대 3인까지 지원하는 메모리 시트와 터치스크린 내비게이션, 측면 에어백은 물론 충돌 순간 안전벨트를 팽팽하게 당겨주는 '프리텐셔너' 기능까지 적용하는 등 당시 최고 수준의 편의 장비와 벤츠의 명성에 걸맞은 각종 안전 사양으로 무장했습니다. 썬바이저가 두 개 달린 게 어릴 때 참 신기했어요. 이런 차는 역시 뒷좌석이 메인이죠. 럭셔리 세단인 만큼 뒷좌석 역시 호화롭게 꾸며졌습니다.

긴 휠베이스로 넉넉한 거주성은 물론 전동 리클라이닝과 열선 시트, 오디오 조작이 가능한 암레스트, 후방 전동 블라인드와 측면 커튼 등 넉넉한 편의 사양으로 채워 VIP를 모시기에도, 가족과 함께하기에도 만족스러운 공간을 제공했죠. 트렁크 공간 역시 중요한 분들의 소중한 짐을 채워 넣기에 충분했습니다.

[겉과 속이 같은 차]

벤츠의 4기통 2.3L, '직렬 6기통 2.8, 3.2L 가솔린 엔진'을 탑재했고, 변속기 역시 벤츠에 4단 및 5단 자동 변속기를 맞물려 겉부터 속까지 온통 벤츠로 채워졌습니다. 엔진룸도 요즘 고급차 못지않게 플라스틱 커버를 더해 보이지 않는 곳까지 신경 썼다는 느낌을 줬어요. 특히 주력 트림인 직렬 6기통 라인업은 '음색과 회전 질감이 비단결처럼 부드럽다'는 뜻에서 붙여진 '실키식스'라는 별명처럼 차급에 충실한 정숙성과 고급스러운 주행 질감을 선사했습니다.

최고 사양으로 V6 3.5L와 3.6L를 각각 선보였던 다이너스티, 엔터프라이즈와의 배기량 싸움에서는 다소 뒤처졌지만 이 한마디면 모든 게 정리됐죠. '벤츠 엔진입니다'

무엇보다 뒷바퀴를 굴린다는 점이 전륜 구동인 다이너스티, 뒤이어 등장한 에쿠스와의 경쟁에서도 강력한 방어 수단으로 작용했습니다. 일반적으로 구동계가 앞쪽에 몰려 있는 전륜 구동 차량은 고속 주행 시 상대적으로 가벼운 후방이 좌우로 떨리는 '피쉬테일' 현상이 쉽게 일어날 수 있는데요. 미세한 진동이 계속되면서 뒷좌석 승객에게는 불쾌감과 멀미를 유발할 수 있어 VIP를 모시는 쇼퍼 드리븐 차량으로는 적합하지 않았고, 이게 곧 전륜구동 대형차의 한계로 지목되기도 했죠. 에쿠스 역시 일상적인 주행에서의 승차감은 훌륭했으나, 고속 영역에서는 확실히 벤츠의 후륜구동 플랫폼과 파워트레인을 사용한 체어맨이 앞섰습니다.

지금에야 설계 기술과 생산 공법 의 발달로 이 한계를 많이 극복했고, 앞바퀴를 굴리면서도 5m가 넘는 차들이 많아지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차이는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에 전륜 구동 대형차를 만드는 회사들은 아예 'AWD 시스템'을 탑재해 뒷바퀴를 함께 굴리는 설계를 하기도 하죠. 승차감만큼은 전형적인 한국 대형차였습니다. 과속방지턱을 넘을 때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간다'는 표현을 이구동성으로 외칠 만큼 부드러운 승차감을 제공했어요. 과격한 주행에서의 대응 능력은 상대적으로 떨어졌지만 '이 차를 어떤 분들이 타느냐'를 떠올리면 당연한 것이었죠.

또 '4채널 ABS', 차체 자세 제어장치인 'TCS', 전자제어 서스펜션 등 첨단 사양을 투입해 경쟁차에 비하면 나름 민첩한 거동이 가능했어요. 다만 엑셀과 브레이크 페달의 반응은 수입차와 마찬가지로 둔감한 편이었는데, 그간 신경질을 내듯 예민하게 세팅된 국산 차를 타오던 소비자들은 '안 나간다', '밀린다' 등의 반응을 내보였지만 이내 적응하면 주행이 한결 느긋해질 수 있었습니다.

[국산차의 끝판왕]

체어맨은 등장과 함께 경쟁자를 압도했습니다. 찬란한 벤츠의 후광은 어쩌면 약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었던 부분을 가려줬고, 그들의 바람대로 쌍용을 단숨에 고급차 메이커로 자리 잡게 했어요. 벤츠 마케팅을 전면에 내세웠고 제품 역시 받쳐 주었으니 국산차뿐만 아니라 수입차 업계도 덩달아 긴장했습니다. 심지어 오리지널 벤츠를 수입하던 '한성자동차'에서 고객 이탈을 막기 위해 각종 소모품과 공임을 무상 제공하는 등 적잖이 신경 쓰는 모습을 보였을 정도. 당시 분위기가 어렴풋이 짐작되시죠?

3.2L 최고급 모델과 리무진만 먼저 투입했음에도 시판 첫 날 계약 대수만 1,134대, 출시 다음 달인 11월 한 달에만 500대를 판매해 대형차 시장 1위를 차지했죠. 길이를 30cm가량 늘린 리무진 모델은 남다른 고급스러움을 원했던 소비자에게 어필했습니다. 무려 전장만 5,355mm에 달해 국산 세단 중 가장 크고 비싼 제왕의 차 타이틀을 쟁취했죠.

앞서 현대차가 다이너스티의 뒷좌석을 15cm가량 늘린 롱 휠 베이스 모델을 '다이너스티 리무진'으로 판매하고 있었지만, 눈여겨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외관에서의 차이가 크지 않았습니다. 이에 일부 소비자들이 불만을 가졌다는 것을 눈치챈 쌍용은 롱 휠 베이스 대신 B필러를 길게 늘인 '스트레치드 리무진' 형태로 선보였습니다.

겉보기에 확실히 남다른 느낌을 줬기 때문에, 예상대로 고급스러움과 넉넉한 거주성은 둘째 치더라도 권위와 계급, '남에게 어떻게 보여지는지'가 우선이었던 소비자에게 환영받았습니다. 수직형으로 위계를 중요시하는 우리나라 조직 문화와도 잘 어울리는 모델이었죠. 물론 체어맨 라인업에 최상단을 장식했기 때문에, 뒷좌석은 TV 등 온갖 호화 사양으로 가득 채웠고 길어진 차체만큼이나 넉넉한 뒷좌석을 제공했습니다.

기본 가격 5천만 원이 훌쩍 넘을 만큼 비쌌지만 전체 판매량의 1/10 가량을 차지했어요. 하지만 잔치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출시 연도'를 눈여겨보신 분들이라면 체어맨 위에 드리워진 먹구름도 함께 보셨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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