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찾아서, BMW R18 & 미니 쿠퍼 컨버터블


결혼 전에 바이크를 팔지 말았어야 했다. 날개를 잃어버린 새처럼 삶의 의지가 꺾이고 말았다. 실의에 빠진 내게 한 줄기 빛과 같은 전화가 걸려 왔다…


이현성 사진 이영석

결혼과 동시에 날개를 잃어버렸다. 결혼 준비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없었다. 이곳저곳, 돈 들어갈 데가 왜 이렇게 많은지 모아둔 돈을 모두 쓰고도 부족했다. 결국 아끼던 바이크를 떠나보냈다. 지루한 삶에 활기를 불어넣어 준 착한 친구였는데, 떠날 때까지도 제 한 몸을 기꺼이 희생해 주었다. 참 고마웠다. 주변 지인들은 바이크 판매를 끝까지 말렸다. 결혼하고 나면 절대 다시 살 수 없으니 가지고 있으라고 몇 번이나 나를 설득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의 말이 백번 옳았다. 바이크와 함께 한 삶이 벌써부터 그리워지는 걸 보니 말이다. 역시 인생 선배들의 조언을 들었어야 했다.

바이크 시승 행사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가정의 평화를 지키면서 라이딩을 즐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까닭이다. 지난봄에는 BMW 모토라드가 마련한 2023년 시즌 오프닝 투어를 다녀왔다. 오랜만의 라이딩에 신이 나서 쌀쌀한 바람을 가르는 와중에도 추운 기운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400km 넘는 장거리 주행 후에도 피로가 쌓이기는커녕 오히려 힘이 펄펄 솟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니 머릿속은 또 라이딩 생각으로 가득 찼다. 창고에 가만히 내버려 둬서 더러워질 일도 없는 헬멧만 괜히 꺼내 닦고 써보기를 반복했다.

헛헛한 나날을 보내던 중 BMW 모토라드가 반가운 소식을 전해왔다. 이번에 제주 라이딩 투어 프로그램을 새로 마련했는데, 먼저 경험해 보라는 것. 복권에 당첨이라도 된 듯 탄성이 절로 나왔다. 바이크 렌트는 물론 숙식 지원까지 약속받았다. 게다가 제주도의 숨은 명소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전문 인스트럭터가 길 안내를 나선다니,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감탄사를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문제는 사무실이었다는 점이다. 옆에 있던 동료 기자가 이 소식을 듣고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참고로 그는 2종 소형 면허가 없다. 아쉽지만 다음 기회를 노려 보자고 다독였다. 하지만 그의 사전에 포기란 없다. 여기저기 연락을 돌리더니 미니 쿠퍼 컨버터블 시승차를 빌리는 데 성공했다. 그것도 얼마 전 출시한 따끈따끈한 신차, 씨사이드 에디션이다. 항상 느끼는 사실이지만 그는 참 수완이 좋다. 한편으론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가 있으니 아름다운 제주도 시승 촬영을 도와줄 포토그래퍼까지 함께할 수 있으니까.

드디어 제주로 떠나는 날이 밝았다. 많은 짐을 챙기느라 이른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였다. 작은 캐리어와 헬멧 가방, 노트북 넣은 백팩까지 짊어 멨지만 발걸음은 가벼웠다. 공항은 수학여행 시즌을 맞아 전국의 학생들로 북적였다. 서둘러 공항을 벗어나 제주도로 기수를 틀었다. 제주 공항에는 클릭앤라이드 박경수 대표가 일찍이 우리를 마중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라이더들의 안식처 얼리 블랙 라운지의 호스트이자 BMW 모토라드와 손잡고 제주 투어 프로그램을 마련한 주인공이다. 이번 투어의 길 안내를 맡아 줄 인스트럭터이기도 하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박경수 대표와 함께 굶주린 배를 든든히 채웠다. 바이크를 보관하고 있는 차고는 식당에서 멀지 않았다. 그는 공사가 아직 끝나지 않아 아직 누추하다고 말하며 차고 문을 열었다. 겸손한 그의 설명과 달리 엔트리 모델인 GS310부터 R1250 GS, R 18 시리즈 등 20여 대에 달하는 바이크가 화려한 모습으로 우리를 반겼다. 드림 바이크로 점 찍어 둔 R1250 GS에 자연스럽게 눈이 갔다. 장거리 여행에도 피로가 덜하고, 보다 높은 위치에서 제주의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어 최고의 동반자나 다름없다.



하지만 이번 투어는 R 18 시리즈와 함께 할 예정이다. 대형 크루저와 여유롭게 제주의 낭만을 만끽할 궁리를 세웠다. 이제 선택지는 3가지로 좁혀졌다. 가벼운 구성으로 경쾌한 주행에 가장 잘 어울리는 R 18 클래식, 주행풍을 막아 줄 커다란 윈드실드와 흥을 돋울 마샬 스피커, 사이드 케이스를 갖춰 장거리 여행에 안성맞춤인 R 18 베거, 방풍 성능을 한층 더 끌어올리고 리어 탑케이스까지 추가해 대륙횡단도 문제없는 트랜스 컨티넨탈 중 하나를 고를 수 있었다.

고민 끝에 R 18 클래식을 선택했다. 제주의 바람을 온몸으로 맞이하고, 굽이진 해안도로를 더욱 경쾌하게 질주하고 싶었다. 바이크 선택을 마치자 때마침 시승차를 받으러 갔던 동료 기자가 돌아왔다. 미니의 윗도리를 시원하게 벗어 던진 그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제주의 맑은 하늘은 정말이지 컨버터블 지붕을 열지 않고는 베기지 못하게 만든다. 동료 기자는 수완도 좋지만 날씨 운도 기가 막힌다. 지난 울릉도 여행부터 날씨 요정이 그와 함께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가 타고 온 미니 컨버터블 씨사이드 에디션은 쿠퍼 S를 바탕 삼는다. 미니 컨버터블 출시 30주년을 기념해 국내에는 단 99대만 판매하는 한정판 모델이다. 외장 컬러는 바다와 백사장에서 영감을 받은 캐리비안 아쿠아와 나누크 화이트 두 가지를 마련했다. 시승차는 미니가 처음 선보이는 나누크 화이트로 칠해져 있었다. 이 밖에도 물결이 퍼져나가는 모양을 형상화한 18인치 휠, 조개 모양을 본 따 그린 주유구 캡 등 해변이라는 의미를 가진 한정판 모델답게 바다에서 힌트를 얻은 요소들로 가득했다. 제주 투어에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컨버터블이 분명했다.



투어 첫째 날은 제주 서쪽 해안을 따라 달렸다. 이호테우 해수욕장을 시작으로 애월항, 협재해수욕장, 신창풍차해안도로 등 제주도의 테두리를 그려 나갔다. 도로 위는 막힘 없이 쾌적했다. 통행량이 적은 곳만 골라 달린 까닭이다. 파란 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바다, 온몸을 감싸 안는 선선한 바람, 손끝에서 느껴지는 수평대향 2기통 1800cc 엔진의 기분 좋은 진동이 어우러지며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미니 컨버터블을 타고 뒤따르는 동료의 얼굴에도 즐거운 표정이 가시질 않았다. 뜨거운 햇볕이 싫을 만도 한데 톱을 닫을 생각은 없는 듯 보였다. 그는 바람이 좋아 전혀 덥지 않다고 전했다.



한참을 달리다 박경수 대표가 바이크를 멈춰 세웠다. 그리곤 손가락으로 바다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돌고래였다. 수면 위로 등지느러미를 드러내며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바다를 내리 쬐는 햇살은 일렁이는 파도와 함께 춤을 췄다. 아름다운 풍경이 나타나면 곧장 갓길에 바이크를 세우고 자연을 감상하는 것도 바이크 투어의 매력 중 하나였다. 우리가 멈출 때마다 미니 컨버터블은 정차하기에 마땅한 장소를 찾아 헤맸다. 현지인만 아는 좁디좁은 옛길을 따라다니는 일도 고역이었다. 그나마 차체 크기가 작은 미니라서 고생이 덜했다. 조금만 컸어도 먼 길을 돌아와야 했을 터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 보니 해가 넘어가는 줄도 몰랐다. 컴컴해지고 나서야 숙소인 얼리 블랙 라운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얼리 블랙은 이름 그대로 이른 저녁을 뜻한다. 박경수 대표는 “짙은 어둠 속으로 사그라드는 붉은 노을이 멋진 곳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고 말하며 이름의 배경을 설명했다. 조금만 서둘렀어도 좋았을 텐데 후회가 남았다. 하지만 우리에겐 아직 기회가 한 번 더 있다. 아쉬운 마음이 컸지만 오늘은 이만 휴식을 취하고 다음 날을 맞이하기로 했다.


조금 쉬어도 좋으련만 탁상 위에 미니 차 키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머릿속에는 지붕을 열고 제주의 밤공기를 마셔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찼다. 참을 수 없었다. 이미 잘 준비를 마친 동료는 나가 놀자는 말에 손사래를 쳤다. 완강히 거부하는 그를 겨우 조수석에 태우고 밤바다를 거닐기 시작했다. 얼리 블랙이 위치한 서귀포시 강정동은 아직 개발이 많이 이뤄지지 않았다. 덕분에 불빛이 적어 하늘에 떠 있는 별이 보다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바닷바람은 머리 위를 스치듯 간지럽혔다. 과연 미니 컨버터블과 함께하는 제주의 밤은 아름다웠다.

다음 날 아침, 누구보다 먼저 준비를 마치고 바이크 앞에 섰다. 안전한 라이딩을 위해선 여유로운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시간에 쫓겨 준비하고 바이크에 오르면 괜히 급한 마음에 위험한 상황을 마주하기 쉽다. 둘째 날은 제주의 동쪽 해변과 비자림로를 달렸다. 비자림로는 20년 전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로 뽑힌 제주의 자랑. 울창한 숲을 옆에 끼고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는 관광 명소다. 몇 해 전 이곳을 방문해 빽빽이 늘어선 삼나무를 감상한 적 있다.

그런데 이번에 찾은 비자림로엔 심상치 않은 기운이 흘렀다. 아침부터 굴삭기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더 많은 관광객을 받기 위해 도로를 넓히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이미 수천 그루의 나무가 베어진 상태. 비자림로 주변에는 도로 확장 공사를 반대하는 수많은 현수막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울창한 숲을 보기 위해 많은 관광객이 비자림로를 찾았는데, 더 많은 관광객 유치를 위해 나무를 베어 버린다면 과연 이곳을 찾을 이유가 있을까? 아름다운 제주를 즐기고 있는 중이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웠다.

자동차 시장에는 레트로 열풍이 불고 있다. 바이크 또한 마찬가지다. 모두 하나같이 옛 추억을 상기시키는 모델을 개발하느라 열심이다. 제주도를 함께 달린 R 18 클래식 또한 레트로 바람을 타고 탄생했다. 1936년 출시한 R 5의 부활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오래전 자동차나 바이크를 현대적으로 되살리는 작업은 자연 보전에 비하면 일도 아니다. 지구 생태계 복원에는 훨씬 더 큰 비용과 긴 시간이 필요한 까닭이다. 잘려 나간 비자림로의 나무 밑동을 마주하곤 보다 책임감을 갖고 자연을 보존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오후 5시, 스마트폰이 알림을 울렸다. 얼리 블랙의 명물인 노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미리 알람 시간을 맞춰두었다. 이번 투어 중 가장 빠른 장단에 맞춰 굽이진 길을 내달렸다. R 18 클래식은 육중한 체격과 달리 꽤 가볍고 스포티했다. 최고출력 91마력, 최대토크 16.1kg·m의 힘을 내는 박서 엔진 덕분에 언제 어디서든 활기가 넘쳤다. 코너링 성능도 발군이다. 크루저 바이크가 와인딩 도로에서 운전 재미를 자랑할 줄을 몰랐다. 낮은 무게중심을 이용해 차체를 자유자재로 기울여 코너를 빠르게 빠져나갈 수 있었다.

경쾌한 R 18 클래식 덕분에 늦지 않게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절벽 끝에 서서 노을이 지는 곳을 바라보니 저 멀리에 산방산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앞에는 다른 산 능선이 산방산에 겹쳐 보였다. 신기루였다. 박경수 대표는 물체가 실제 위치가 아닌 다른 위치에서 보이는 자연현상으로 일몰 때만 볼 수 있는 광경이라고 설명했다. 그가 얼리 블랙의 이름을 힘주어 설명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이곳의 일몰을 보지 못하고 갔다면 제주의 석양이 이토록 환상적인지 모른 채 살아갔을 터다.

얼리 블랙의 일몰을 마지막으로 이번 투어의 모든 여정을 마쳤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3일 차 오전까지 투어가 예정되어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는 오후 비행기표를 구하지 못했다. 오전 일찍 떠나야 하기 때문에 3일 차 투어는 생략했다. 제주 투어는 라이더라면 한 번쯤 꿈꾸는 버킷 리스트 중 하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비용도 만만치 않고, 시간도 여간 많이 드는 게 아니다. 바이크 렌트 업체가 흔하지 않다는 점도 발목을 잡는다. 자기차 손해 보험 가입이 불가능해 교통사고 시 부담도 크다.



하지만 얼리 블랙의 투어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간편하게 제주 라이딩을 즐길 수 있다. 예약만 하면 2박 3일간의 바이크 렌트 및 주유, 보험 가입, 숙박, 식사 걱정으로부터 해방이다. 전문 인스트럭터와 함께 제주도를 보다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점도 장점이다. 가격도 125만원으로 합리적이다. 바이크를 제주도로 보내는 탁송 비용만 50만원이 넘는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얼리 블랙의 투어 프로그램은 특권이나 다름 없어 보였다.

만약 바이크를 타지 못한다면, 컨버터블이라도 빌려서 제주를 만끽해 보기를 강력 추천한다. 몇 번이나 갔던 곳이라 해도 컨버터블과 함께 달리면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머리 위로 내리쬐는 태양이, 얼굴을 타고 흐르는 바람이, 콧속을 파고드는 제주의 냄새가 분명 색다른 감동을 선물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