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사랑 통했다…해체 위기 야구단 살리고 100년 극장도 지켜

최예린 기자 2024. 10. 10. 05:0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광주 동구, 지역 아닌 사업에 지정기부 추진
지난해 총 9억 모금…민간 플랫폼도 활용
지난 9월6일 광주 광산구의 한 실내 야구연습장에서 ‘이스트 타이거즈(East Tigers) 야구단’의 선수들과 감독·코치, 부모, 광주 동구와 동구장애인복지관 담당자들이 함께 모여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최예린 기자

“헤이. 자세 잡고. 이쪽으로 정확하게!!”

9월 초 광주 광산구의 한 실내 야구연습장. 추적추적 내리는 비 사이로 시끌시끌한 소리가 가까워졌다. 연습장에 들어서니 ‘이스트 타이거즈(East Tigers)’이라고 적힌 빨간 유니폼을 입은 선수 10여명이 코치 쪽으로 야구공을 던지며 피칭 연습을 하고 있었다. 아마추어 투수를떠난 공은 제법 속도를 붙이더니 ‘퍽’ 소리를 내며 코치의 글러브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스트 타이거즈’는 광주동구장애인복지관이 2016년 발달장애 청소년을 모아 창단한 야구단이다. 동구의 이스트와 기아의 타이거즈를 조합한 것으로, ‘이·티(E·T)’란 약자로 더 많이 불린다. 야구단은 매주 토요일에 야구연습장을 빌려 연습하고 있다.

처음엔 발달장애 자녀를 데리고 나오기 두려워하던 부모들도 팀 스포츠인 야구를 통해 아이가 더 건강하고 밝아지는 모습을 보며 만족해 했다. 10여명으로 시작해 지금은 정원 30명이 꽉 차, 입단 대기자가 밀려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다.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민석이 엄마 안수진(45)씨는 “주말에 마땅히 갈 데가 없었는데, 야구단을 시작하고 아이가 참 좋아해요”라고 웃으며 말했다.

지난 9월6일 광주 동구 ‘이·티야구단’의 강도훈 선수가 피칭 연습을 하고 있다. 최예린 기자

대기업 사회공헌사업의 하나로 선정돼 운영해온 야구단에 위기가 찾아온 건 2021년이다. 기업의 후원사업이 마무리되면서 다른 자금원을 찾아야 했지만, 마땅치 않았다. 몇 년째 같은 유니폼을 물려 입으며 버텼지만, 후원금도 바닥이 나면서 야구연습장조차 빌리기 힘들었다.

상황을 역전시킨 건 ‘고향사랑기부제’였다. 광주 동구는 지난해 1월1일 고향사랑기부제가 시행되자, 기금 사업으로 ‘이·티 야구단’을 선정했다. 이어 같은해 7월부터 12월까지 ‘발달장애 청소년 이·티 야구단에게 희망이 되어주세요’라는 지정기부로 2억5400여만원을 모금했다. 덕분에 몇 년 만에 새 유니폼을 맞췄고, 지난 27일부터 사흘 동안 여수로 전지훈련도 갔다. 매주 훈련장 대여비와 강사비 등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남은 기금은 해마다 모아 ‘발달장애인 전용 야구장’ 건립 비용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지역’ 아닌 ‘지역 문제’에 기부…광주 동구의 모험

광주 동구는 지난해 ‘고향사랑기부제’ 시행을 앞두고 고민이 깊었다. 특별히 내세울 특산품이 없고 향우회 등 고향에 대한 연대도 약한 대도시 기초지자체의 특성 탓이었다. 사용처를 미리 밝혀 그 사업에 기부하게 하는 ‘지정 기부’를 생각한 것도 ‘어떻게든 고향사랑기부제를 잘 활용해보려는’ 안간힘이었다.

난관은 있었다. 당시 행정안전부의 ‘고향사랑 이(e)음’에는 지정기부 시스템이 없었던데다, 행안부가 고향사랑기부의 민간플랫폼 이용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향사랑기부금법은 기부자가 주소지 지자체에는 기부할 수 없도록 하고, 모금 한도액도 500만원으로 제한하고 있다. 행안부는 민간플랫폼을 이용할 경우, 기부자의 주소지와 기부액을 확인할 수 없기에 민간플랫폼을 이용하면 안된다고 했다. 민간 고향사랑 기부제 플랫폼인 ‘위기브(We)’를 통해 모금을 진행했던 강원 양구군도 3일만에 모금을 중단한 상태였다.

하지만 광주 동구는 여러 검토 끝에 ‘법적으로 문제없다’는 결론을 냈다. 고향사랑 기부금에 관한 법률 12조 2항은 “행안부 장관과 지자체장은 고향사랑 기부금의 모금·접수 및 답례품 제공 등의 업무를 지원하고 그에 관한 정도를 제공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 정보시스템을 구축·운영할 수 있다”고 규정하는 반면, 아래 시행령은 “정보시스템의 구축·운영 업무를 (행안부 산하의) 한국지역정보개발원에 위탁한다”고 정하며 공공플랫폼만을 고향사랑기부제 정보시스템으로 인정했다. 광주 동구는 시행령이 공공플랫폼으로 시스템을 제한한 것은 ‘지자체장이 정보시스템을 구축·운영할 수 있다’고 한 상위 법률의 범위를 이탈한 것이라 판단했다.

고향사랑기부제가 활성화된 일본 사례도 참고가 됐다. 일본의 고향납세는 중앙정부의 개입이 없고, 민간플랫폼은 자유시장경제 원리로 운영된다.지난해 기준 일본의 경우 40여개 민간플랫폼을 통해 10조원 이상의 고향세를 모금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고향사랑기부 모금액은 약 650억원이다.

지난 9월5일 광주 동구 충장로의 ‘광주극장’ 모습. 영화간판그림은 우리나라 마지막 ‘간판장이’ 박태규 화백이 그린 것이다. 최예린 기자

임택 동구청장은 실무진과 함께 일본의 현장을 직접 보고 오기도 했다. 광주 동구는 고향사랑기부제 담당인 인구정책팀을 다른 지역과 달리 ‘세무과’가 아닌 ‘기획예산실’ 아래 둬 전체 그림을 그렸다. 이런 준비 끝에 광주 동구는 고향사랑기부제 시행 다섯 달 뒤인 지난해 5월 고향사랑 기금사업으로 ‘이·티 야구단 지원’과 ‘광주극장 100년 프로젝트’ 등을 선정하고, ‘위기브’를 통해 지난해 7월부터 모금을 시작했다.

‘광주극장’도 ‘이·티야구단’처럼 사라질 위기에 놓인 상태였다. 1935년 문을 연 광주극장은 처음으로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에 의해 설립된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일하게 남은 단관극장이다. 지금도 매일 영화를 상영한다. 일제강점기 광주극장에선 영화 상영과 공연뿐 아니라 강연이나 야학이 수시로 열렸고, 이 때문에 일본 순사들이 항일 내용을 검열하는 ‘임검석’(극장 등을 단속하는 경찰관을 위한 특별석)까지 극장 안에 있었다. 해방 뒤에도 이 임검석은 시대의 상흔을 나타내는 공간으로 유지됐고, 1970∼80년대엔 학교 선생님들의 학생 선도실로도 쓰였다. 지금의 광주극장은 독립·예술 전용관으로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재정난에 낡은 시설를 보수하지 못한 채 후원회원의 후원금으로 근근이 버티는 상황이다. 광주 동구는 ‘광주극장을 보존해 후대에 물려주기 위한 프로젝트’로, ‘고향사랑기부제’를 통해 극장 노후시설 개선 비용을 마련하는 기금을 모금하기로 한 것이다.

결과는 놀라웠다. 두 프로젝트에서만 3억3767만6천원이 모금됐다. 지난해 광주 동구의 고향사랑기부 모금액은 9억2141만2천원으로 전국 특별·광역시 75개 지자체 평균 모금액(9천700만원)의 약 10배다. 그 중 68.6%인 6억3147만7천원(이·티야구단 2억5400만5천원, 광주극장 8367만1천원, 지자체 맡김 2억9380만1천원)이 민간플랫폼을 통해 모금됐다. 김희선 광주 동구 인구정책팀장은 “지역이 아닌 지역의 문제 해결을 위한 기부를 만들어보자는 생각과 시도가 통했다. 재정이 열악한 지자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부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예상보다 훨씬 많았다. 희망을 봤다”고 말했다.

고향사랑기부제 희망 확산해 이어가려면?

광주 동구의 성과에 민간플랫폼 허용에 부정적이던 정부도 움직였다. 행안부는 지난 3월 고향사랑기부제 민간플랫폼에 정부시스템을 연동하는 방식으로 민간플랫폼 개방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무엇보다 행안부도 공공플랫폼과 비교해 지자체별 기부 프로젝트에 대한 피드백이 가능한 민간플랫폼의 장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광주 동구 경우 민간플랫폼인 위기브에서 웹진 형식으로 이·티야구단과 광주극장 프로젝트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와 소식 글을 모금 시작 때부터 꾸준히 업데이트해 올렸고, 이런 노력은 기부자와 모금액을 늘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지난 9월5일 김희선 광주 동구 인구정책팀장이 고향사랑기부제 민간플랫폼에서 ‘광주극장 100년 프로젝트’로 모금한 기금을 활용해 개선해야 하는 광주극장 시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최예린 기자

행안부 관계자는 “민간플랫폼 개방 필요성에 대한 논의는 행안부 안에서도 꾸준히 있었다. 그러나 광주 동구 지속한 요청과 성공적인 모금결과가 플랫폼 개방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친 건 사실”이라며 “민간플랫폼 선정과 시스템 연동 작업을 마친 뒤 올해 연말에는 민간플랫폼 개방을 시작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고향사랑기부제 민간플랫폼 개방을 반기면서도 지자체 자율을 좀 더 인정하고 민간의 진입 장벽을 낮추는 방식으로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한국지방자치학회 고향사랑기부제특별위원회가 지난달 23일 주최한 토론회에서 권선필 고향사랑기부제특별위원장(목원대 경찰행정학부 교수)은 “고향사랑기부제 운영에서 지자체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행안부의 역할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며 “지자체 자율을 기반으로 다양한 민간플랫폼이 진입해 협업할 수 있도록 장벽을 낮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희선 광주 동구 인구정책팀장은 “고향사랑기부제는 기부자와 지자체 간의 관계인데, 행안부가 두 집단의 중간에서 규제·통제하는 모습”이라며 “제도 시행 2년만에 민간플랫폼을 도입하겠다는 것은 고무적이지만, (정보보호 및 개인정보보호관리체계 인증 등) 행안부가 내건 조건을 이행할 민간 기업이 얼마나 될지 우려된다”고 했다.

기금 활용 범위를 확대할 필요성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상범 대한민국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 정책연구실장은 “고향사랑기부제의 가장 큰 문제는 기부금이 기금으로 조성되는 것이다. 각 지자체가 인구감소에 대응하기 위해 고향사랑기부로 형성된 기금도 지방소멸대응기금과 연계해 집행할 필요성이 제기되지만, 현재 기금은 특정 목적 달성에만 집행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며 “지자체가 자유롭게 기금을 집행하고 지정기부를 시행 할 수 있도록 개선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지자체 역시 행안부에 “더 많은 자율성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임택 광주 동구청장은 “일본 사례처럼 고향사랑기부제를 민간에 더 개방해 플랫폼들이 자유롭게 경쟁하며 서비스질을 높이도록 해야 한다”며 “그런 환경에서 각 지자체가 자기 특성에 맞는 플랫폼을 선택해 지역을 더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알릴 수 있어야 고향사랑기부제가 제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예린 기자 floye@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