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펙트 데이즈 : 늙은 남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보고-박재욱 신라대 교수]
퍼펙트한 삶은 무엇일까
오늘, 지금, 당장 감사하고사랑하고, 기뻐할 수 있다면
내 작은 삶도 아름답지 않은가

식물성 풍부한 주제와 영상

일본에서 야쿠쇼 코지만큼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주인공을 감당할 수 있는 배우가 또 있을까. 나가사키 출신으로 도쿄 치요다구 토목과 공무원으로 출발한 그가 일에 지쳐 배우로 전업했으며 그동안 화려한 배우 인생을 살다 이제 70세 노인을 앞두고 있다. 그 흔한 스캔들 하나 없이 평생을 일구어낸 대배우라는 입장에 앞서, 한 늙어가는 남자로서 살아온 인생의 정점에서 맡은 '시부야 공원 화장실 미화원' 역할은 단순히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잘 어울린다. 영화 주제와 주연을 맡은 한 늙어가는 남자의 인생 스토리가 궁합을 맞춘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에서 야쿠쇼 코지가 역을 맡은 히라야마 마사키(平山正木)라는 이름도 재미나다. 뜻으로 읽으면 평평한 산야에 올곧은 나무. 영화는 도시적 삶의 강퍅함과 동물적 악육강식의 경쟁적 야만성에서 비켜나있다. 집에서 키우는 들풀 화초와 도심 속에 비좁게 들어앉은 작은 숲에서 늙은 남자 히라야마는 환한 미소를 머금고 앉는다. 화려한 꽃이나 웅장한 숲들이 아니다. 소담한 들풀과 작은 숲에서 공존하되 경쟁하지 않으며, 서로에게 부대끼지 않되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하늘만 응시하는 식물성 가득찬 삶의 평화로움이 존재한다. 풀과 꽃은 서로 다투지 않으며 서로 이기려 하지 않는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 포스터

영화의 미장센은 과도하리만치 온통 '나무'로 채워져 있다. 그가 읽던 윌리엄 포크너의 『야생종려나무』, 중고책가게에서 새로 산 고다 아야의 『나무』도 모자라 히라야마가 사는 동네에 있는 도쿄 최고층 전망대 '스카이트리'에다, 스카이트리 주변 스미다 강변에서 조카 니코와 자전거 타고 바다를 이야기하던 그 다리 이름조차 '사쿠라바시(櫻橋)'이다. 또 있다. 단골 이자카야, 코인 세탁소, 동네 목욕탕 센토, 저녁마다 하이볼 마시러 가는 지하도 가게가 있는 스미다강 건너 '아사쿠사(淺草)'조차 식물성이라니.

자족적 삶이란? 발견인가 발명인가

원래 도쿄 시부야구의 토일렛(화장실) 프로젝트의 홍보물로 기획된 이 영화는 홍보물 이상의 예술성으로 초월성을 발휘한다. 히라야마의 '자족적 삶'이 화장실이라는, 누구나 꺼려하지만 반드시 필요로 하는 장소의 특이성에서 출발하는 게 이채롭다. 히라야마가 누리는 평화와 안정의 출발점이 도쿄 최고의 번화가에 자리 잡은 화장실로, 온갖 인간의 소비와 배설물이 쏟아져 나오는 공공시설에서 시작되고 완결된다는 형식이 무척 경이롭다.

우리는 삶의 변화가 추구하는 높은 경지를 찾을 때면 새로운 장소에서 뭔가를 찾으러 떠나고 헤매는 일상의 습성이 있지만, 히라야마는 세상의 구석진 곳에서 새롭게 눈뜨지는. 새로운 일상의 발명을 이루어낸다. 단순히 보자면 자족하는 삶이란, 제 몸에 걸치는 이미 만들어지고 누구에게나 공용되는 기성복을 발견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고안하고 고민해 제 몸에 어울리게끔 재단해내는 발명품 같은 게 아닐까.

퍼펙트한 삶이란 무엇인가

영화를 보며 들기 시작한 생각은 '과연 늙은 남자는 무엇으로 사는가'였다. 모두 퍼펙트한 인생을 꿈꾸겠지만, 퍼펙트하다는 개념과 의미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또한 퍼펙트한 삶은 하루하루가 밀알처럼 모이고 쌓여야 가능하겠지만, 매일 똑같은 하루가 반복된다고 매일이 똑같은 모습과 의미를 지니는 건 아닐 것이다. 히라야마가 별 다를 거 없어 보이는 매일 찍은 사진을 주말이면 현상소에 맡기면서, 새 필름을 카메라에 채우고 맡긴 사진을 찾아와 벽장 속 작은 철제 상자에 차곡차곡 채워두는 일상적 반복이 인상적이다.

그 흔한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 올림푸스 시진기로 찍어야만 한다(똑같은 올림푸스 카메라를 나도 이십년 넘게 서랍 속에 보관하고 있다). 아날로그는 복제 불가능성과 비가역성을 내포한다. 히라야마가 조카 니코에게 힘주어 말하는 대사처럼 "다음은 다음이고, 지금은 지금일"뿐이다. 매 순간의 느낌과 자족. 언제 어디서 무슨 수로 되찾나. 아침마다 현관문을 열 때면 그의 표정은 하루 중 가장 환해진다. 그에게 하루하루가 새로운 아침이다

반복이라 해서 기계적인 삶이 아니라 리듬과 음률이 있는 삶. 마치 메트로놈이 연신 똑딱거린다 해서 리듬과 음률을 잃어버리지 않는 이치이다. 영화의 주제어가 되다시피 한 코모레비(こもれび: 木漏れ日·木洩れ日)는 우리말로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다. 나뭇잎 사이로 어른거리는 햇살은 수만 년 내내 바닷가를 부딪히는 파도처럼 똑같은 게 하나 없다. 모양도 제각각이고 받아들이는 느낌도 닮은 꼴이 하나 없다.

삶이 그저 반복되는 것처럼 느낀다면 당신의 삶은 아직 퍼펙트하지 않다. 언뜻 조용하고 흔들림 없이 보이지만 내면 깊은 곳에선 여전히 심박수가 널뛰기하고 감동 지수가 살아있는 삶. 히라야마가 순수하고 귀여운 조카 니코를 바라볼 때, 단골 이자카야 마마상의 전 남편에게 질투할 때, 무엇보다 라스트신(scene) 4분에서 울고 웃고 또 웃다가 우는 듯한 그 미묘한 표정 연기 장면들에서, 퍼펙트한 삶이란 죽어 있고, 죽어가는 게 아니라 세상사 희노애락에 반응하나 거기에 결코 얽매이지 않은 삶이란 걸 암시한다.

삶의 본질은 코모레비처럼 얼핏 꿈꾸는 듯 불명확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어쩌면 흑백사진처럼 단순하고, 그래서 더욱 명확한 것일지도 모른다. 바슐라르가 그래서 몽상은 잠재력을 키운다고 했던가.

잇쇼겐메이(一生懸命)라는 일상의 의식

이전의 일본어에서 잇쇼겐메이는 一莊懸命으로 썼었다. 중세 일본에서 영주(다이묘)의 장원을 목숨 걸고 지킨다는 뜻에서 출발한 이 말은, 중간에 一所懸命으로 바뀌면서 장소의 의미, 즉 직장, 가정, 마을 등을 사수한다는 의미로 쓰이다가, 이제 一生懸命으로 바뀌어 쓰인다. 뜻은 달라져도 발음은 동일하다. 말 그대로 '목숨을 건다'는 의미인데, 우리말로 '열심히'로 단순 번역될 수 없다. 이제 내 인생에다 목숨을 건다는 의미로 쓰이는 시대가 된 것일까.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온갖 정성을 다해 지키고 보듬는 대상이 권력, 국가, 조직, 가정에서 이제 나 자신의 인생으로 바뀌고 있다.

히라야마가 화장실 미화원으로 그렇게도 충실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건 도를 닦듯 자신을 닦는 일상의 의식이 된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한 장면. 화장실 청소일을 같이 하는 다카시(왼쪽), 주인공 히라야마, 다카시의 여자친구 아야(오른쪽).

무언의 언어가 주는 표현과 위안의 힘

세상이 말로 넘쳐흐른다. 영화 시작부터 한참동안 히라야마의 대사가 나오지 않는다. 히라야마가 벙어리인가 싶을 정도로 말이 없다. 그래서 시간을 재봤다. 1시간 15분 동안이라니! 조카 니코가 나타난 이후에야 비로소 히라야마가 말문을 연다. 그 이후 그가 내뱉는 대사조차 단문 일색이고, 이어지고 엮어지는 대사가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말 없이 대사 없이 긴 시간 영화의 앵글은 잠시도 히라야마에서 눈길을 떼지 않는다. 순전히 그의 표정, 동작만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야쿠쇼 코지라는 거인이 아니고서는 가능할까 싶다. 온전히 순하고 평범한 인상 하나만도 아니다.

다카시라는 철부지 미화원 동료 녀석이 갑자기 일을 관두어 뜻하지 않은 야근으로 일상의 리듬이 흔들릴 때 전화로 구청 관계자에게 분노하고, 삼촌을 좋아하는 이쁜 조카 니코를 보는 흐뭇한 표정, 삶에 지친 다카시의 여친 아야가 그가 즐겨듣는 카세트테이프의 옛 노래에 위안을 얻을 때 바라보는 측은지심, 아야가 그의 빰에 키스해 줄 때 좋아하던 모습, 짝사랑 이자카야 마마상(여주인)이 전 남편과 안고 있을 때 스쳐가는 질투의 찰나, 결별한 여동생이 집 나간 조카를 찾아와 헤어지며 힘껏 안아줄 때 눈에 맺히는 이슬, 그의 표정은 말없이 수없이 일렁댄다. 어쩌면 대사보다 더 깊은 여운과 심연의 감동을 안겨준다.

히라야마의 일상에서 말이 없다고 고립되거나 외롭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 다만 그의 짧은 대사처럼 "서로 연결된 세상도 있고, 그렇지 않은 세상도" 있을 뿐이다. 실제 그의 세계는 닫힌 공간이 아니라 열려 있으며, 공원에서 길을 잃은 아이에게 손을 내밀 수 있으며, 공원에서 점심 때 옆자리에서 식사하는 여자 사무원에게도 언제나 미소 지을 수 있다. 그는 니코나 아야처럼 상처 받은 신세대와 공감하고 소통하는 데 탁월하다. 오래된 고목 아래에서 기대기만 해도 묘한 힐링과 위안을 얻듯 별말 없이 같이 있어주고 노래를 함께 들어주는 것만으로 상처받은 아이들은 치유되고 자생력을 얻는다.

주연을 맡은 야쿠쇼 코지와 빔 벤더스 감독(오른쪽).

빔 벤더스 감독의 <베를린 천사의 시> 후속편?

빔 벤더스 감독의 대표작인 1987년 <베를린 천사의 시>(원제 “베를린의 하늘”)는 한번 본 사람이라면 쉬이 잊히지 않는 작품이다. 여기서 감독은 흑백과 컬러라는 이미지의 대비를 주로 사용했는데, 이번 영화에서도 부분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주인공 히라야마가 잠을 잘 때 형상을 알 수 없는 장면들이 흑백으로 나타나고 뭔지 모를 형상 속에서 추상적 이미지가 나타난다.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벤더스 감독이 흑백의 이미지를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영원과 현실, 천사와 인간의 시선 등의 주요 의미들을 표현하는 영화적 장치로 활용했다면, 이번 영화에서는 유한과 무한 속에서 방황하는 인간적 이미지를 더욱 강조하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천사 다미엘이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가장 큰 이유로 인간처럼 “지금” 느끼고 사랑하고 싶다는 욕구였는데, 거의 40년 만에 촬영된 이 영화에서도 “지금”의 중요성을 여전히 강조하고 있다. 사랑한다면 지금 당장 사랑한다고 말하고, 미안하다면 지금 당장 미안하다고 말해야 한다. 인간의 불행이나 고통, 슬픔은 해야 할 때 하지 못한 부작위의 어리석음에서 비롯된다고 감독은 믿고 있는 듯하다. 영원의 시간을 감각 없이 무의미하게 사는 천사의 삶보다 고통 받고 아프더라도 느끼며 살고 싶다는 인간적 욕구를 삶의 소중한 가치로 이끌어낸다. 네! 아멘! 보다는 오! 아!를 외치고 싶다고 천사 다미엘은 갈구한다.

이번 영화에서는 거꾸로 인간에서 천사로 변신한 히라야마를 보는 듯하다. 다미엘처럼 무감각한 천사가 아니라 인간의 정과 느낌을 온전히 품은 제대로 된 천사의 형상으로 재탄생하는 천사를 꿈꾸게 만든다. <베를린 천사의 시> 마지막 장면은 “to be continued”로 마무리 되어 곧 후편이 나올 것 같은 기대감을 갖게 했는데, 이 영화 <퍼펙트 데이즈>가 나오기까지 무려 36년이 걸렸다. 빔 벤더스 감독은 긴 세월 과연 퍼펙트한 답을 찾았던 것일까.

맺는 말

자족은 세상의 다툼에서 벗어난 자기만의 평화요, 정신적 공간의 확보 없이는 불가능하다. 고립되고 닫힌 세계가 아니라 누구에게라도 열려 있는 다양하고 감각적인 평화로운 삶이다. 과거 생활로의 회귀는 불가능하고 그럴 이유도 없다. 공허하고 무의미한 까닭에 임퍼펙트(imperfect)한 옛 삶을 되풀이할 것인가. 세상의 유한성을 슬퍼하고 아쉬워 할 필요도 없다. 알맹이 없고 무감각한 영생보다는 내일 당장 생의 끝 문을 닫을지라도 오늘, 지금, 당장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순간순간 감사하고 눈물이 나도록 사랑하고 기뻐할 수 있다면 내 작은 삶도 제법 아름답지 않겠는가. 더욱 담담하게, 담백하게 그리고 단순하게 살자.

- 늙어가는 이 세상의 모든 남자들에게 바친다


이 글은 박재욱 신라대 교수가 쓰신 현재 상영중인 '퍼펙트데이즈(Perfect days)'의 영화평이다.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필자의 승낙을 받아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