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개혁과 연금개혁, 한발짝부터 [세상읽기]
최영준 |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
의사의 수를 증원하겠다고 발표했던 날 저녁, 몇몇 동료들과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입을 모아 만일 증원에 성공한다면 윤석열 정부의 최대 치적이 될 것이라 입을 모았다. 지난 정부의 ‘400명’ 증원 시도를 비롯한 지난 20여년의 시간을 반추해보면 더욱 그랬다.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의사 수가 증가한다고 서울 이외 지역의 의사 부족 문제나 공공성의 문제들이 자동적으로 풀리지 않는다. 다만, 현재 상황이 개선되는 데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2천명이라는 숫자는 상징적이라고 생각했다. 내년부터 2천명 증원은 현실적으로 들리지는 않았다. 2천명은 협상 테이블에서 던지는 최초의 안과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아마도 발표 이후 줄다리기 협상이 이어지면서 500명 언저리 어딘가에서 최종 타협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대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전공의들과 학생들은 병원과 학교를 떠났다. 정부는 이러한 의사들을 압박했고, 의사들은 더욱 반발했다. 2천명에서 한발짝도 물러나지 않는 것이 최초의 계획이었는지 알 수는 없다. 여하튼 정부는 물러서지 않았다. 문제는 정부가 누구와 타협해야 문제가 풀리는지조차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응급실에서 조치를 받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국민들이 발생하는 상황이 무기가 되어 증원 자체를 백지화하라는 일부 목소리가 커진다. 적정한 수를 찾아보자는 목소리는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정부를 강력히 비판하는 목소리에 묻힌다. 막다른 골목이다.
연금개혁도 또다시 교착상태가 예상된다. 국민연금의 재정적 지속가능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일정 정도 합의가 있다. 고령화와 기대수명의 가파른 증가 속에서도 국민연금 보험료율은 지난 25년 동안 인상되지 않고 있다. 생을 마감할 때까지 연금 지급을 약속하고 있는 국민연금의 특성상, 많은 이들이 20~30년 정도를 기여하고 20~30년 정도 연금을 받을 수 있는 시대이다. 소득의 9%를 기여하여 노후에 안정된 연금을 기대하는 것은 산술적으로 불가능하다. 정체된 보험료율은 적정소득 보장을 압박한다.
이에 정부는 연령별 보험료율 차등인상과 자동안정화 장치를 도입하여 장기적인 재정적 안정성을 확보하자는 개혁안을 제안했다. 하지만 공적연금의 목표는 재정안정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노후소득 보장이 공적연금의 최우선 목표이다. 정부의 안은 노후소득 보장이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한 우려에 충분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국민연금에 대한 우려는 이미 상당 기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막상 제도개혁은 소득보장 강화와 재정안정 강화라는 입장의 대립 속에 2007년 이후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양 입장이 소득보장과 재정안정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논쟁이 길어질수록 두 입장의 차이점만 부각되며 타협은 점점 더 어려워지는 듯했다.
연금개혁은 긴 논쟁 이후 지난 5월 개혁의 적기를 맞이했었다. 21대 국회가 끝나기 전 국회 연금개혁 특별위원회의 논의와 국민 공론화 등을 거쳐 13%로 보험료율 인상과 소득대체율 43% 대 45%로 의견을 좁혔었다. 합의가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은 거부했고, 그동안 충분한 논의가 없었던 자동안정화 장치 등을 제안하며 개혁은 다시 안갯속으로 가고 있다.
의료개혁과 연금개혁에 참여한 모두는 각자의 합리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배가 가라앉고 있는데 합리성들이 날카롭게 부딪치기만 하고 타협이 없다면 패자는 우리 모두이다. 공공정책의 개혁은 나를 넘어 모든 시민들의 미래와 행복이 달려 있는 일임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개혁 한번으로 이상적인 상황을 만들 수 없다. 개혁하고 또 다음 개혁을 투명하게 준비하면 된다.
정부는 의사 증원 수에 대해 최소한 2026학년도부터는 유연하게 대처해주기를, 자동안정화 장치는 더 중장기적인 의제로 두고 이번에는 모수개혁으로 첫걸음을 내디뎌주기를 당부한다. 의사 관련 단체들은 의료체계 정상화에 나서면서 국민들의 마음을 얻어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원하는 미래의 의료체계가 무엇인지를 함께 논의했으면 한다. 더 나은 국민연금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개인들과 단체들도 바람의 날카로움보다 해의 따듯함을 가지고 모두가 신뢰할 수 있는 국민연금이 될 수 있도록 함께 만들어 나갔으면 한다.
한발 양보하는 것은 참 어렵다. 힘이 있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게 민주주의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노동자 잇단 사망’ 영풍 대표 구속 기소...중대재해법 첫 사례
- 합참 “북한 쓰레기 풍선 넉 달간 5500개…선 넘으면 군사 조치”
- 숙소비만 월 40만원 필리핀 가사관리사…2명은 연락두절
- ‘사장 새끼는 미친 X이다’…욕한 직원 해고했지만 ‘무효’
- 7명 숨진 ‘부천 호텔 화재’ 원인…“에어컨 전선에 부식 흔적 확인”
- 43조 적자 한전, 예상 밖 4분기 전기요금 동결…물가 부담 탓
- 한동훈 독대 요청에 “상황 보자”…윤 대통령은 왜 ‘떨떠름’ 할까
- 일본 떨게 만든 ‘17살 여자 메시’ 최일선…북한 20살 월드컵 세번째 정상
- 트럼프 누른 해리스, 4~5%p 계속 앞서…호감도 16%p 급상승
- ‘검은 고양이’ 현실판?…연인 살해 뒤 시멘트 부어 16년 숨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