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을 위한 이 술...나물 앞에 두고 마시니 이거 참 호사군

한은형 소설가 2024. 10. 12.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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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한은형의 밤은 부드러워, 마셔] 화요

얼마 전 베를린에 다녀온 사람으로부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베를린 예술대학교 앞에 있는 한식당에 갔는데 자기 말고는 모두 유럽인이었다고. 베를린에 사는 사람도 있었지만, 뮌헨이나 함부르크 같은 다른 독일 도시나 스위스나 이탈리아에서 여행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고 했다. 삼겹살을 상추에 싸서 먹는 모습도 놀라웠지만, 더 놀라웠던 것은 카스 일색인 광경이었다고. 식당에 맥주가 카스만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왜 카스를? 이런 질문을 옆의 스위스 부부에게 던졌더니 한국 음식에 한국 맥주를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고 한다. 아하!

술은 그저 술이 아니라 음식의 일부고, 적확한 음식과 어우러질 때 자신을 초과한다고 생각한다. 음식을 끌어안고 동반 상승한달까. 이게 바로 내가 맛있는 술을, 또 새로운 술을 찾아 헤매는 이유다. 낮과 밤에, 절기와 기후에, 기분과 상황에, 또 술집의 분위기와 안주에 그만인 술을 포개놓고자 하는 지향이 내게는 있다. 풍류라기보다는 탐구다. 세상의 모든 술을 마시겠다는 호기와는 거리가 멀고 그저 내가 다가갈 수 있는 술 중에 가장 좋은 것을 취하겠다는 견실한 자세! 세상사에서 좋은 것만을 취하기가 녹록지 않다는 걸 알기에 마실 때만은 충분히 그러고 싶다.

화요는 탄산수나 진저에일, 라임 등과 함께 칵테일이나 하이볼로 마시기도 한다. /화요

베를린의 한식당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 것은 내가 요즘 가장 많이 먹는 게 한식이라서다. 정확히 말하면 한식과 한식을 위한 술. 나물과 화요다. 나물이 먼저인지 화요가 먼저인지 모르겠는데 어느 날 그것들이 내게로 들어왔다. 나물에 화요를 마시는 루틴이 시작되었다. 밥을 좋아하지만 일주일 내내 한식을 안 먹은 적도 있어서 요즘의 흐름이 나도 신기하다. 부지깽이나 고춧잎, 무나물 같은 나물이나 들기름에 구운 두부에 화요를 마시면 참으로 좋다. 어릴 때부터 나물을 좋아했지만, 화요와 마시니 더 좋다.

좋은 데는 이유가 없다고 하는데 나는 아니다. 나물이 품고 있는 연두와 초록을 입에 넣으면 너무 흡족해서 웃음이 난다. 여기에 화요를 더하면 웃음이 짙어진다. 나물을 해본 분은 아시겠지만 데쳐서 무치면 한 줌이다. 또 파와 마늘과 깨 맛이 아닌 나물 맛을 살리며 나물을 하기란 쉽지 않다. 미나리와 시금치와 방풍나물과 고사리는 다르게 취급해야 한다. 이렇게 한 나물을 앞에 두고 화요를 마시면 이거 참 호사군이라는 생각까지 드는 것이다. 그래서 차마 ‘박주산채(薄酒山菜)’라고는 못하겠다. 박주산채라는 단어의 어감은 포근하지만 변변치 못한 술과 산나물이라는 뜻은 아무리 겸양이라고 해도 너무 박하니까요.

내가 ‘화요를 마신다’ 함은 ‘화요 토닉’을 마신다는 뜻이다. 하이볼로 만들어 마시는 것이다. 이제는 없어진 가이센동을 잘하는 집에서 마셨던 화요 토닉이 인상적이라 그렇게 되었다. 가쿠 하이볼이라고 하는 산토리에서 나오는 위스키 가쿠빈으로 만든 하이볼도 마셨는데 화요 토닉을 마시니 잘만 마시던 가쿠 하이볼이 보잘것없게 느껴졌다. 그랬던 날이 있었다. 그렇게 머리 어딘가에 잠들어 있던 화요가 어느 날 툭 튀어나왔다. 그래서 편의점에 갔다가 화요를 들고 와서 거의 매일 화요 토닉을 마시고 있다는 말씀.

위스키는 온더록스나 하이볼보다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걸 선호하지만, 화요는 ‘타서’ 마신다. 화요 토닉이어야 한다고 말씀드린다. 자체 실험의 결과, 진저에일이나 탄산수보다는 토닉 워터로 타는 게 좋았다. 레몬은 없는 편이 낫고, 뭔가를 더한다면 아주 얇게 저민 라임을 추천 드린다. 화요 25도는 1대1로, 화요 41도는 화요가 1, 토닉 워터를 2로 하고 있다. 얼음을 넣어야 토닉 워터의 탄산이 더 탱글탱글해진다는 말씀도 드리고 싶다.

화요 토닉을 마시면서 떠오른 것은 화요를 만드는 광주요에서 하던 내가 좋아하는 식당이 이제는 없다는 사실이다. 서울의 어느 백화점 지하에 있던 그 식당의 음식은 여전히 생각이 날 정도로 맛이 좋았고, 그 식당이 여전히 있어서 화요와 함께 마시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십 년도 더 전에 사라져버린 이제 없는 그 식당의 이름은 녹녹이다. 녹녹을 그리워하는 것과 별개로 며칠 전, 횟집에서 서비스로 주신 청어구이의 부드러운 가시를 바르며 화요 토닉과 먹는 맛은 각별하였다는 말을 남기고 싶다. 장충동 C 횟집의 온후하신 아르바이트 분 덕에 저 상당히 행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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