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티테크 연구실에서 시작된 상상, 기술의 방향을 묻다

[편집자 주] 기술은 빠르게 발전하지만 그 변화가 일상과 사회에 어떤 모습으로 스며들지는 쉽게 그려지지 않는다. 과학동아는 이 질문을 함께 던지기 위해 연구자와 창작자, 청소년이 참여하는 ‘SF미래스케치 워크숍’을 아모레퍼시픽과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두 차례에 걸쳐 진행했다.
“스토리의 배경은 근미래 대한민국입니다. 이 시대의 대표 뷰티 기술은 표정, 윤곽, 광택을 실시간으로 조절하는 광학 메이크업 모자 ‘루미나캡’이죠. 주인공은 화장품 회사에서 신기술을 개발하는 연구원으로 어머니의 생일에 직접 만든 루미나캡을 선물합니다. 그런데 이 모자를 쓰고 외출한 어머니에게 뜻밖의 일이 벌어져요.”
발표가 시작되자 웅성거리던 소리가 잦아들었다. 모자를 쓰는 것만으로 자연스러운 메이크업이 가능하다는 신선한 SF 설정에 참가자들의 시선이 발표자에게 집중됐다.
“우리는 흔히 아름다움을 ‘20대의 기준’에 고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름다움은 사실 나이대마다 전혀 다른 기준과 맥락을 가져요. 그 지점을 아들과 어머니의 갈등으로 풀어낸 게 정말 흥미롭네요.”
실제 뷰티테크 연구진의 피드백에 다른 참가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 뷰티테크의 최전선을 보다
이달 6일 용인 아모레퍼시픽 R&I 센터에서 열린 SF미래스케치 워크숍은 연구자와 창작자가 함께 연구 현장의 기술을 이해하고 그것이 일상과 사회에 가져올 변화를 상상해 SF 시놉시스를 만들어 보는 자리였다.
이날 워크숍은 구성원부터 독특했다. 과학에 관심이 많은 중·고등학생, SF를 쓰고 싶은 창작 지망생, 그리고 뷰티테크의 최전선에서 기술을 개발하는 연구원들이 한 공간에 모였다.
워크숍은 연구소 랩투어로 시작됐다. 아모레퍼시픽 R&I 센터는 1954년 설립된 국내 가장 오래된 화장품 연구소로 건물은 포르투갈 출신 건축가 알바로 시자가 설계했다. 곳곳에 최우람 작가의 조각 작품이 놓여 있었다. 연구자들에게 창의적 자극을 주기 위한 장치였다.
히스토리 공간에 들어서자 참가자들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국내 1호 화장품 제조업 허가증 사본부터 최근 7년 연속 CES 혁신상을 수상한 제품까지 연구소의 70년 역사가 차례로 전시돼 있었다.
랩투어를 이끌던 전상훈 연구인프라운영랩장은 그 가운데 오래된 사진 한 장을 가리켰다. “이게 1970년대 피부 진단기 사진입니다. 벌써 50년 전에 ‘피부를 측정해 맞춤 화장품을 추천한다’는 개념이 시작된 거죠.” AI 앱으로 피부를 스캔해 맞춤 제품을 추천받는 시대, 참가자들은 기술 발전이 생각보다 훨씬 긴 시간 축 위에 놓여 있음을 실감했다.
실제 화장품의 제형 연구가 진행되는 랩은 여느 화학 연구실과 비슷했다. 벤치 선반에 다양한 재료들이 촘촘히 놓여 있었다. 하나 다른 특징이 있다면 은은하게 퍼지는 향이었다. 매일같이 향기를 맡으며 연구하는 기분은 어떨까.
“개인적으로는 무향 제품을 더 선호한다”는 전 랩장의 말에 주변에서 가볍게 웃음이 터졌다.
이어진 강연에서 남진 뷰티테크랩장은 5~10년 안에 상용화될 기술들을 SF적 시점으로 소개했다. AI 기반 피부 진단, 3D 프린팅 마스크팩, 반도체·마이크로 진단칩, 나노버블 세척기 등 실제 개발 중이거나 아이디어 단계인 기술들이 소개될 때마다 참가자들의 표정이 조금씩 바뀌었다. ‘이게 진짜 곧 현실이 된다고?’ 하는 놀라움이었다.
● 미래를 그린 우리의 첫 SF 시놉
본격적인 SF 시놉시스 제작 시간. 이제 공은 참가자들에게 넘어갔다. 참가자들은 5개 조로 나뉘어 지금까지 둘러본 연구소 풍경, 특히 눈에 들어온 기술들을 포스트잇에 키워드로 정리했다.
포스트잇이 책상 위에 빠르게 쌓여갔다. 연구원들은 조별 테이블을 천천히 이동하며 기술적 현실성을 보태주는 역할을 맡았다.
“저희는 유전자를 이용해 노화를 되돌리는 화장품을 소재로 시놉시스를 써보려고 해요. 이런 화장품을 몸에 주입하려면 어떤 기기를 써야 할까요?” 중학생 참가자 정의진 양의 질문에 뷰티테크랩에서 미용기기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복문정 연구원이 답했다.
“미용기기에서는 아주 얇은 주사, 마이크로니들 같은 방식이 쓰여요. 전류를 이용해 세포막에 작은 구멍을 만드는 방법도 있고요.” 옆에서 같이 듣고 있던 남 랩장도 “유전적 차이는 실제 연구자들도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분야”라며 “노화 속도, 피부색, 탄력 같은 건 모두 유전자가 관여한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옆 조에서는 ‘살아 있는 세포막 마스크’라는 흥미로운 아이디어가 등장했다. 극도로 얇은 마스크를 얼굴에 붙이면 뇌에서 생각한 대로 RNA 기반 설계가 작동해 실시간으로 표정, 피부색, 메이크업 등 얼굴을 재구성할 수 있다는 발상이다.
가상 메이크업을 전문으로 하는 고명진 뷰티테크랩 연구원은 “DNA나 RNA 기반 마스크는 관리가 어렵고 비용이 높아 상업화하기가 매우 어렵다”며 “대신 초박막 LED 필름으로 얼굴 전체의 메이크업을 표현하는 미래 기술은 저희 연구원들도 상상해 본 적이 있다”고 조언했다.
한편 문예창작과를 지망하는 고등학생과 화학 연구원을 꿈꾸는 고등학생이 함께 모인 한 조는 ‘파우더 에러’라는 홍보용 메이크업 아티스트 로봇을 상상했다.
인공 피부로 덮여 있고 개인의 퍼스널 컬러 분석을 수행하는 이 로봇이 우연히 유명 뷰티 인플루언서를 만나면서 예상치 못한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는 설정이다. 여기에 애니메이션과 영화 덕후인 인공지능 전문 정성민 뷰티테크랩 연구원이 유사한 SF 콘텐츠 사례를 소개하며 세계관을 잡는 데 힘을 보탰다.
이처럼 2시간 동안 이어진 토론은 모두의 얼굴이 발그레 달아오를 만큼 열띠게 진행됐다. 제목, 기획 의도, 로그라인, 세계관, 캐릭터 설정, 시놉시스, 레퍼런스까지 모두 완성해야 하는 빡빡한 일정이었지만 어느 조에서도 지친 기색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 SF로 기술의 방향을 되묻다
“저희 조의 작품 제목은 ‘아름다운 신세계’입니다. 아름다움의 수치가 인간의 가치를 판단하는 세계에서 이유도 모른 채 점수가 급락한 주인공이 그 근원을 찾아가는 이야기입니다.”
각자의 시놉시스를 발표하는 시간. 발표가 시작되자 멘토로 참여한 SF 전문가와 연구원들의 메모가 한층 빨라졌다. 과학동아 SF스토리 공모전 입상자로 꾸려진 한 조는 랩투어와 강연에서 인상 깊게 본 피부 수치화 기술과 AI 평가 기술을 정교하게 스토리에 녹여냈다.
SF 평론가인 이지용 단국대 인문사회융합연구사업단 교수는 “아주 능숙한 SF 구성”이라고 평했다. “’멋진 신세계’ ‘가타카’ ‘마이너리티 리포트’ 에서 등장했던 주제나 소재들을 적절히 오마주하려는 시도도 있었고 기술이 획일성에서 맞춤화로 변화해 온 흐름을 보여준 오늘 강연 내용을 반대 방향에서 풀어내며 훌륭한 사고 실험을 해냈다”고 설명했다.

발표를 들은 뷰티테크 연구원들은 연구 현장에서 놓치기 쉬운 지점을 다시 돌아보게 됐다고 입을 모았다. 복 연구원은 “아름다움을 수치화한다는 아이디어는 실제 연구와도 흥미롭게 연결된다”며 “우리가 피부 톤, 모공, 색소를 수치화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지만 그것이 아름다움의 본질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움을 기계가 판단한다면?’이라는 질문이 강하게 다가왔다”고 말했다.
기술을 개발하는 연구자의 고민은 조직의 방향성과도 맞닿아 있다. 박원석 아모레퍼시픽 R&I 선행뷰티연구소장은 “아름다움의 다양성과 인간다움의 기준을 생각하게 해주는 작품들이 인상 깊었다”며 “기업에서도 DEI(다양성, 형평성, 포용성)를 강조하는 만큼 오늘 발표는 앞으로 기술이 어떤 ‘아름다움’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 그 방향을 잘 보여줬다”고 말했다.
현장에 있던 학생들에게도 이번 워크숍은 특별한 경험이 됐다. 화학공학과 진학을 희망해 참여했다는 김주연 양(세종캠퍼스고 1학년)은 “평소에는 볼 수 없는 연구실을 직접 보고 기록할 수 있어 좋았다”며 “SF 속 기술들이 실제 연구와 맞닿아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과학기술이 현실을 어떻게 바꿀지 기대하게 됐다”고 말했다.
‘오늘의 과학소설은 내일의 과학사실이 된다.’ SF의 거장 아이작 아시모프가 남긴 말이다.그의 말처럼 용인 아모레퍼시픽 R&I 센터에서 열린 이번 SF미래스케치 워크숍에서는 기술을 상상해보고 그 상상이 다시 기술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순간들이 이어졌다.
기업과 대중이 함께 ‘미래 기술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고민해본 작은 실험의 장이기도 했다. 미래는 속도가 아니라 방향을 묻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이영혜 기자 yh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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