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탁사 분양금 반환 책임 어디까지?…“신탁사 곳간까지는 ‘NO’” [허란의 판례 읽기]

2025. 8. 24.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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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신탁 사건 파기환송
대법원 “신탁재산 범위 내로”

[법알못 판례 읽기]

서울 서초구 대법원. 사진=연합뉴스



부동산 분양 계약이 해제돼도 분양관리 업무를 맡은 부동산신탁사가 고유재산까지 털어 분양금을 모두 돌려줄 의무는 없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신탁사가 신탁재산 범위 내에서만 책임을 지겠다는 특약이 유효하다고 본 것이다. 그동안 분양금 반환 소송에 시달려온 신탁업계는 경영 부담이 크게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대법원 1부(주심 서경환 대법관)는 지난 7월 3일 경기 고양시 생활숙박시설 수분양자들이 코리아신탁을 상대로 낸 부당이득금 반환 소송에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에 돌려보냈다(2024다204986).

항소심이 신탁사의 전면적 책임을 인정했던 판단을 대법원이 뒤집으면서 부동산 분양시장에 큰 변화가 예상된다.

 

 생활형숙박시설 수분양자들, 계약금 반환 소송 제기

코리아신탁은 N건설과 고양시 일산서구 토지에 생활형숙박시설을 신축해 분양하는 관리형 토지신탁계약을 체결했다.

코리아신탁은 신탁계약을 원인으로 해당 토지에 대한 소유권이전등기를 마쳤고, 이후 신축된 건물에 관해 소유권보존등기를 완료했다. 수분양자들은 공급자(매도인 겸 수탁자) 코리아신탁, 위탁자 N건설과 분양계약을 체결하고 계약금을 지급했다.

분양계약서 제4조 제5항 제2호에는 “코리아신탁이 건축물분양법 제10조에 따라 벌금형 이상의 형을 선고받은 경우 수분양자들이 분양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는 조항이 명시됐다.

사업 과정에서 마감자재 변경 등 일부 설계가 사전 고지 없이 변경되자 수분양자들은 2021년 1월 31일 고양시에 ‘건축물분양법 위반행위 행정처분 요청’ 민원을 제기했다. 고양시는 같은 해 2월 2일 코리아신탁과 N건설 등을 형사고발했다.

N건설과 그 대표이사는 2021년 12월 15일 건축물분양법 제11조, 제10조 제2항 제6호, 제7조 제2항 위반 사실로 각 벌금 100만원의 약식명령을 받았고 2022년 1월 27일 확정됐다.

핵심 위반 내용은 “설계변경 신청일 10일 전까지 분양받은 자 전원에게 내용을 알리지 않은 것”이었다.

원고들은 이를 근거로 계약 해제와 계약금 반환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으나 코리아신탁은 ‘신탁재산 범위 내에서만 반환 의무가 있다’고 맞섰다. 이미 계약금이 사업비로 쓰였기 때문에 이 사업과 무관한 고유재산까지 털어줄 수는 없다는 얘기다.

 

 엇갈린 1·2심

1심 의정부지방법원 제1민사부(재판장 전기흥)는 설계변경이나 입주 지연 등을 계약 해제 사유로 보지 않고 수분양자 청구를 기각했다. 1심은 N건설의 설계변경이 건축물분양법 위반에 해당하더라도 “인테리어 및 실시설계에 의한 동등자재 이상의 마감자재 변경으로서 부수적 채무”라며 계약 해제 사유가 되지 않는다고 봤다.

그러나 2심 서울고등법원 제15민사부(재판장 윤강열)는 정반대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N건설이 설계변경 신청일 10일 전까지 해당 내용을 통보토록 한 건축물분양법을 위반했으므로 분양계약은 적법하게 해제됐다”고 봤다.

또 “코리아신탁의 계약해제 통보는 부적법해 효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2심은 코리아신탁이 계약금 2억5000만원 전액을 반환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수분양자들이 지급한 분양대금은 신탁재산에 속하고 코리아신탁은 분양수입금을 포함한 모든 자금의 수납과 집행 업무를 담당하므로 분양대금 반환 의무는 신탁재산의 범위를 초과한다고 볼 수 없다”고 설시했다.

원심은 또 “코리아신탁이 분양계약의 당사자로서 분양대금 반환 의무를 부담한다”며 분양계약 제18조를 “신탁계약 내용을 정리·요약한 것에 불과해 분양 계약상 권리관계를 변동시키는 조항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대법원 “계약자유 원칙 존중해야”

대법원은 원심 판단을 정면으로 뒤집으며 신탁법 원리와 계약해석 방법론을 체계적으로 제시했다. 대법원은 “수탁자가 수익자 이외의 제3자에 대해 부담하는 채무는 원칙적으로 수탁자의 고유재산에도 미친다”면서도 중요한 예외를 인정했다.

대법원은 “관리형 토지신탁의 수탁자가 수분양자와 분양계약을 체결하면서 신탁재산의 범위 내에서만 계약상 책임을 부담한다는 ‘책임 한정 특약’을 한 경우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계약자유의 원칙에 비추어 이러한 약정도 유효하다”고 판시했다.

특히 “2011년 7월 25일 법률 제10924호로 전부 개정돼 2012년 7월 26일 시행된 구 신탁법 제114조 이하에서 유한책임신탁을 도입했다는 사정만으로는 이러한 약정의 효력이 부정된다고 볼 수 없다”고 부연했다.

대법원은 이 사건 분양계약서를 면밀히 검토했다. 분양계약 제5조 제3항은 “분양대금 반환 의무는 신탁재산 범위 내에서만 코리아신탁이 부담하고 이를 초과하는 분양대금환불금은 N건설이 부담한다”고 규정했다.

제18조 제4항도 “공급 계약상의 책임을 부담하는 경우에도 신탁재산 및 신탁계약의 업무 범위 내에서만 책임을 부담한다”고 명시했다. 대법원은 “이는 분양대금 반환책임을 신탁재산의 범위로 한정하는 특약으로서 분양 계약상 권리관계를 변동시키는 조항에 해당하고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유효성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면책적 계약 인수 쟁점 지적

대법원은 원심이 ‘면책적 계약 인수’ 쟁점을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분양계약 제18조 제3항은 “신탁계약이 해지 또는 종료되는 경우 분양계약에 기한 코리아신탁의 모든 권리와 의무가 위탁자 N건설에 면책적으로 승계된다”고 명확히 규정했다.

코리아신탁은 2023년 9월 항소심에서 “신탁계약이 종료됐으므로 분양대금 반환 의무가 N건설에 면책적으로 승계된다”고 명시적으로 주장했다.

대법원은 “이는 신탁계약의 해지 또는 종료를 불확정기한으로 한 면책적 계약인수약정에 해당한다”며 “원심은 신탁계약의 해지 또는 종료 여부를 심리해 면책적 승계 여부를 판단했어야 한다”고 원심의 심리 누락을 비판했다.

원심이 이러한 중요한 쟁점을 제대로 심리하지 않은 것은 “면책적 계약 인수 여부에 관한 판단을 누락했거나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않아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돋보기]
 

 신탁업계 “숨통 트였다”

부동산신탁업계는 가슴을 쓸어내리는 분위기다. 부동산신탁사는 인건비·원자잿값 상승으로 사업비뿐 아니라 고유계정 자금까지 끌어와 공사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업계 관계자는 “신탁보수가 하락하는 와중에 분양대금 반환을 전액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이어지면 사업 지속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다”며 “이번 대법원 판단이 업계에 숨통을 터준 셈”이라고 말했다.

신탁업계는 부동산 시장 침체로 수익성 악화를 겪고 있다. 관리형 토지신탁은 부동산 침체기에 분양 부진, 공사 지연, 계약 해지로 수익이 급감한다. 금융감독원 자료에 따르면 2022년 1조원을 넘겼던 부동산신탁사들의 신탁보수는 2023년 9808억원으로 감소했고 2024년 전년보다 21.2% 감소한 7724억원으로 줄었다.

이번 판결로 신탁업계는 계약 체결 시 분양대금 반환 범위 제한에 공을 들일 전망이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부동산 분양시장의 책임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꿀 것으로 전망된다. 신탁사의 경영 부담은 줄어들지만 수분양자들은 더욱 신중한 계약 검토가 필요한 상황이 됐다.

허란 한국경제 기자 wh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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