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대 빚에 죽고 싶었던 날 살린 200만원의 위로
은혜는 우리가 산산조각 난 순간에 온다

학창 시절 가장 친한 두 명의 친구가 있었다.
대학 동기였던 한 명은 강남 8학군에서 엘리트 부모 아래서 자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녀의 세계는 교회와 학교가 전부였다. 공강 시간에는 성경을 들고 캠퍼스를 돌며 전도를 하는 친구였다.
또 다른 친구는 고등학교 동기로,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한 부모 아래서 어렵게 자란 뒤 열렬한 운동권 대학생이 되었다. 그녀는 주중에는 빈민가에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주말에는 각종 시위 현장을 누볐다.
둘은 결이 많이 달랐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더없이 착한 사람’이라는 평을 들었고, 둘 다 자신이 다니는 대학의 총학생회장 후보로 출마한 적이 있었다. 한 명은 ‘하나님의 세상’을 내걸고 출마했고, 다른 한 명은 ‘민중의 세상’을 내걸고 출마했다.(둘은 서로 다른 대학이었으며, 나를 통해서만 서로의 존재를 알았을 뿐 직접 알지는 못했다.)
가장 친한 친구가 나에게 사기를
하지만, 예상과 달리 전세입자는 쉽게 구해지지 않았고, 친구는 많이 미안해하면서 우리 부부의 대출 이자를 꼬박꼬박 입금해줬다. 그러던 어느 날 경찰로부터 전화가 왔다. “친구분에게 돈 빌려주신 적 있죠? 사기 피해입니다. 빨리 경찰서로 오세요.”
뭔가 단단히 오해가 있는 거라고 믿으며 경찰서를 찾았지만, 경찰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다리를 휘청이게 만들었다. 나의 친구는 오래전부터 사기꾼과 내연의 관계에 빠져 있었고, 사기꾼이 시키는 대로 주변 사람들에게 각종 거짓 명목으로 돈을 빌렸으며, 그렇게 빌린 200억원의 돈을 들고 둘은 미국으로 도주했다는 것이었다.
자책과 수치심에 허우적거릴 때
나는 가까운 친구들과 지인들, 부모님께 솔직히 상황을 털어놓았다. 앞으로 당분간은 밥값도, 커피값도 낼 수 없고, 용돈도 드릴 수 없는 형편이라고. 결혼을 앞둔 남동생에게도 축의금을 전혀 낼 수 없다고 양해를 구했다.
나의 상황을 들은 지인들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러니까 친구와 돈 거래하는 거 아니야. 돈 잃고 사람 잃는다는 옛말이 틀린 게 아니라니까.”
“어떻게 겁도 없이 대출까지 받아서 돈을 빌려줄 생각을 했어?”
“남편이랑 관계는 괜찮겠어? 그러다가 이혼까지 가는 거 아니야?”
모든 말이 다 옳았다. 다들 내 상황이 걱정되고 안타깝고 답답해서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들은 날이면, 딱 ‘죽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나 자신이 너무 한심했고, 창피했고, 수치스러웠다.(다른 범죄 피해자와 달리 성폭력 피해자와 사기 피해자들은 자신에 대한 자책감과 수치심을 격렬히 느낀다.)
돌 반지 팔아 한걸음에 달려온 또다른 친구
“밥은 먹을 수 있어?”
“밤에 잠은 잘 수 있어?”
“내가 뭘 도와주면 좋겠어?”
나는 울음을 삼키며 답했다.
“네가 특별히 도와줄 것은 없어. 다만 한동안은 만나기 힘들 것 같고 만나더라도 내가 돈을 낼 수 없는 형편이라는 것만 이해해줘.”
친구가 돌아간 뒤, 테이블 위에 놓인 편지 봉투를 발견했다. 그 안에는 손편지와 함께 현금 200만원이 들어 있었다.
“장롱에 있는 돌 반지까지 팔았는데도 지금 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네. 이것밖에 도와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이 돈은 갚지 않아도 되니까 일단 급한 생활비로 쓰도록 해.”
나는 그 200만원을 갚기 위해 살았다
‘갚아야겠다. 반드시 살아서 갚아야겠다.’
억대의 은행 빚은 난감하고 막막하고 억울했다. 도저히 갚을 수 없을 것 같고, 갚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친구가 준 200만원은 반드시 갚아야 할 돈이었고, 너무나 갚고 싶은 돈이었다. 친구가 보여준 위로에 응답하기 위해 나는 벌떡 일어나야만 했다. 그때부터 빚을 갚기 위한 맹렬하고도 치열한 그랜드 플랜이 시작되었다.
일회용 기저귀를 살 돈을 아끼려 천 기저귀를 썼고, 분유 한 통을 살 때도 손을 덜덜 떨었다. 땀을 뻘뻘 흘리는 무더위에도 음료수 한 캔을 사 먹을까 말까를 수십번 갈등하며 버틴 덕에 드디어 은행 빚을 다 갚았고 친구에게도 200만원을 갚을 수 있었다. 오직 친구에게 200만원을 갚을 날을 목표로 산 덕분에 나는 배신에 지지도 않았고 경로를 이탈하지도 않았다.
내가 깨지기 전엔 은혜가 들어올 수 없다
그래서, 지금 인생의 가장 나쁜 날들을 지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미국의 영성 작가 앤 라모트의 위로를 전하고 싶다.
“은혜는 우리가 산산조각 난 순간에 온다. 부서지기 전에는 들어올 틈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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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밍아웃 한 친구를 안심시킨 말 “응, 그렇구나”
https://www.hani.co.kr/arti/society/health/1217681.html?h=s
▶나의 위로는 왜 친구에게 ‘상처’가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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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아이’ 콤플렉스 친구를 위로하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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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으라”는 말은 상실에 대한 위로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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